36개월 할부로 장만한 첫 자동차를 인수받던 날, 제일 먼저 한 일은 고사를 지내는 것이었다.(지금까지 185,000km를 달린 이 차를 별 탈 없이 계속 타고 있으니 쭈욱 첫 차다.) 고사라고 했지만 뭐 돼지머리 놓고 떡도 하고 북어, 과일을 진설하는 정도는 아니었고, 네 바퀴에 막걸리를 조금씩 뿌리고 나서 보닛 위에 타래실로 묶은 북어를 올려놓고는 자동차에 대고 절을 하는 것이었다. 이 행사의 기획과 운영은 돌아가신 엄마가 총괄 지휘하셨다. 이런 업무에 능숙한 연륜을 가진 엄마는 합장을 하고 자동차 앞뒤로 소금을 뿌리며 안전을 기원하는 디테일을 놓치지 않으셨다. 결혼을 하고 작은 평수의 아파트에 전세로 들어갔을 때도, 엄마는 안방 침대 머리맡 아래쪽에 굵은소금을 바가지 가득 담아놓으라는 기획안을 최종 결제해서 통보하셨다. 물론 하얗고 뽀얀 천일염 한 바가지를 집행용품으로 불출하는 걸 잊지 않으셨다. 소금은 뒀다가 겉절이 할 때나 쓰고, 시키는 데로 잘 진행했다고 결과보고서만 낼까 하다가 언젠가 감사에 걸릴지도 모를 일. 그대로 하는데 낫다는 결론에 성실하고 빈틈없이 업무를 처리해 버렸다. 하란다고 별말 없이 했다고, 얘는 착하다고 말씀하셨다는 후일담이 있다.
궁금했다. 왜 제사나 고사상에는 여러 바다 생물들을 마다하고 명태. 즉 북어를 올리는가 하는 것이다. (지금의 북어는 말린 명태를 뜻하는 것이 일반적이지만, 옛날에는 명태가 북쪽 바다에서 많이 잡힌다 해서 붙여진 명태의 또 다른 이름이었다.) 알려진 것은 명태는 그 생김새 때문에 액막이로 쓰였다는 것이다. 쩍 벌어진 입과 부릅뜬 눈이 중요한데, 쩍 벌어진 입은 나쁜 기운은 막아내고 복을 물어온다는 것이고, 부릅뜬 눈은 밝은 것을 싫어하는 귀신을 쫓아낸다는 것이다. 게다가 많은 알을 낳기 때문에 풍요를 상징한다. 여기에 장수와 영원을 의미하는 타래실이 더해져 액막이로서 존재가치가 증명되었다는 것이다.
하지만 정작 알고 싶은 것은 이렇게 생긴 다른 생선들도 있었을 텐데, 명태는 어떻게 해서 입 큰 아귀, 눈 큰 대구 등 쟁쟁한 선수들과의 경쟁을 이기고 부동의 1위 자리를 넘어 액막이의 대명사가 되었는가 하는 것이다. 뭘 모를 때는 백과사전을 찾아야 한다. 무려 60권 60책 분량의 어마어마한 생활사가 적혀있는 ‘오주연문장전산고 五洲衍文長箋散稿’라는 조선시대 백과사전에 북어에 대한 이야기가 있었다. ‘명태는 말려서 유통되는데 매일매일 반찬으로 삼기도 하고, 여염뿐만 아니라 유가에서도 제사에 쓴다’라는 부분. 그렇다, 명태는 아주 흔한 생선이고 사회적 신분의 높고 낮음이 없이 누구나 제사에 사용했다는 것이다. 태어난 계급으로 사회적 지위와 부가 결정되는 신분제 사회에서 명태는 도대체 얼마나 평등했던 것인가? 만약 이런 액막이가 무지무지 비싸고 귀한 것이어서 돈과 권력을 거머쥔 소수의 양반만이 구할 수 있었다면 어떤 일이 벌어졌을까? 어쩌면 역사에는 귀한 액막이를 쟁탈하기 위한 명태의 난이 수 차례 벌어졌다고 기록되었을지도 모른다. 자식들이 큰 병치레 하지 않고 무탈하기를 기원하고, 온 식구들의 삶을 걸고 시작하는 밥벌이가 신통하게 잘되길 바라는 마음이 신분과 부에 따라 더 귀하고 덜 귀한 것이 아닐 테니, 귀천 없이 흔하디 흔하고 입 쩍 벌어지고 눈 부리부리한 명태가 부동의 1위 액막이 자리를 수성해 왔던 것이다.
그러나 이제. 명태는 없다. 명태의 전성시대는 조선 후기에서 일제강점기를 거쳐 1990년대에 끝이 났다. 공식 통계에 따르면 2008년 우리나라의 명태 어획량은 0톤이 되었다. 명태, 동태, 황태, 코다리, 노가리 뭐라고 부르든 지금 우리가 볼 수 있는 것은 거의 수입산이다. 우리나라에 수입되는 명태는 연간 평균 25만 톤 정도가 되는데 21만 톤이 러시아산, 3만 5천 톤이 일본산 그리고 나머지 5천 톤 정도가 미국산, 캐나다산이다. 실감하기 어려운 남의 나라 전쟁으로 수입되는 명태의 양이 줄어들기도 하고, 이유는 알만한데 대책은 별로 없이 점점 더 높아지는 바닷물 온도, 왜 이렇게까지 하는지 설명하기 어려운 노가리 노획 등으로 명태가 극적으로 돌아오는 일은 점점 더 기대하기 어려워 보인다.
공방 앞 골목에도 제법 칼칼하게 동태탕을 끓여내는 식당이 있었다. 지금은 양꼬치와 우육면을 파는 곳으로 바뀌었다. 예전에는 집에서도 가끔 해 먹던 것인데 이제는 꽤 멀리 이름난 전문점을 찾아가야 먹을 수 있는 음식이 되었으니 점심 한 그릇이 쉽지 않다. 그래서 그냥 늘 가던 그 식당에서 점심을 또 먹는다. 음식을 기다리면서 주위를 보니 문 앞에 액막이 명태가 걸려있다. 입 쩌억 벌어지고 눈이 부리부리하게 잘 마른 북어는 아니고, 인테리어 소품 같은 느낌으로 가죽을 꿰어 만든 몸통에 명주실이 감겨 있다. 액막이임이 분명했다. 명태가 없어졌다고 사람 사는 게 달라지지는 않은 모양이다.
그래서 명태를 기다린다. 침몰하고 추락하고 격리되고 점령되는 현실이지만, 누구나 원하는 삶을 잘 써 내려가고픈 바람은 평등해야 하니까. ‘흔하지만 귀해서’ 누구도 고립되지 않고 연결된 일상을, 평범해서 소중한 또 하루를 이어갈 수 있길 기원하며.
<작업 일지>
1. 그냥 명태가 아니라 액막이가 되려면 크게 벌어진 입과 눈을 잘 표현해야 한다. 액막이 명태의 특징을 살린 밑그림 원작은 공방 최회원에게 부탁했다. (그에게도 저작권이 있다.)
2. 몸통 형태를 먼저 깎는다. 눈은 미리 뚫어두고 큰 머리와 마른 몸체에서 꼬리지느러미로 유연하게 이어지도록 작업했다. 위아래 지느러미도 표현해 주어야 완성도가 높아진다.
3. 아가미의 표현이 제일 어렵다, 미리 선을 그어두고 단차가 생기게 칼 작업을 세심하게 해 주었다. 오일을 바르면 더 잘 드러난다.
4. 조각도를 이용해 비늘모양을 떠낸다. 한번 실수가 전체 작업을 망칠 수 있으니 최대한 집중해야 한다.
5. 타래실 작업이 의외로 어렵다. 좀 더 단단하게 묶인 모양을 내려고 여러 번 연습해 완성했다.
6. 문에 걸 수 있는 클래식 버전과 탁상에 올릴 수 있는 걸이가 있는 모양, 작은 휴대용 걸이 등으로 확장해 가고 있다.
<덧붙여진 이야기>
마켓에 출점하는 모임인 <리얼우드 스튜디오> 회원들과 <IN A WOOD>에서 아이디어를 낸 차량 걸이용 액막이 명태 공동작업을 진행하게 되었다. 조금 더 신경 쓰면서 작업을 이어가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