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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명희 Nov 14. 2023

우리의 인간애는 어디 갔나?

전쟁은 멈춰야 한다

이스라엘이나 팔레스타인 국민 모두 소중하고 양쪽 다 사연이 많다. 그래서 어느 쪽 편도 들 수없다. 다만 분명한 건 더 이상 사람이 죽어서는 안 된다. 누가 봐도 하마스를 일망타진하겠다는 이스라엘의 포부는 무모하다. 설사 하마스에 속한 모든 사람을 사살한다 해도 이념은 이어질 거다. 그래서 이스라엘은 지금 멈춰야 한다. 10월 7일 하마스의 예상치 못한 공격으로 무고한 이스라엘 시민이 죽고 납치돼서 이스라엘 정부에서 보복을 감행할 수밖에 없었다는 건 이해한다. 이스라엘의 포위 속에서 평생 이등 시민으로 사는 팔레스타인이 이스라엘을 공격하는 하마스를 지지할 수도 있다는 걸  이해한다. 그러나 결국 양쪽 모두 너무 많은 사람이 피폐하고 목숨을 잃었다. 특히 아이들이 다치고 죽는 게 경악스럽고 어이없다. 이는 전쟁이 일어나고 있는 나라만의 문제가 아니다. 전쟁을 지켜보고 있는 사람도 '인간애'라는 관점에서 인간이 왜 이렇게 서로를 죽이는 전쟁을 끊임없이 이어오고 있는지 고민하지 않을 수 없다.


전쟁을 일으키는 인간의 이념이 원망스럽다. 도대체 인간은 왜 민족 종교 이념에 그렇게 목숨을 거는 걸까? 우리 민족끼리 잘 살고 너네 민족은 우리 민족이 아니니까 너네 끼리 알아서 살든지 말든지 우리는 알 바 아니고 우리가 힘이 세면 너희 것을 뺏는 게 당연하다는 식이었다. 같은 종교끼리 뭉치고 다른 종교를 믿는 사람은 같은 사람이 아니라고도 생각했다. 인간의 역사를 계급 간의 갈등으로 해석하고 종국에 지배 계급을 종식하면 살기 좋은 사회를 만들 거라는 이론을 액면 그대로 기존 사회에 적용하여 수많은 사람을 처형하며 정당하다고 생각했다. 결국 이 모든 생각은 사람이 '무엇을 믿으며 사는가'라는 문제와 무관하지 않다.


조나탄 글로버(Jonathan Glover)의 <<인간애(Humanity)>>를 읽어보면 20세기에 들어서도 민족적, 종교적, 이념적인 이유로 많은 사람이 많은 사람을 죽였다. 1900년에서 1989년 사이 전쟁으로 8천6백만 명이 사망했는데 이는 90년간 매일 한 시간에 100명씩 죽은 셈이라고 했다. 세계 1차 대전, 티토 사망 후 유고슬라비아, 나치 독일, 세계 2차 대전, 원자 폭탄 투하, 스탈린, 마오쩌둥, 폴 폴트, 베트남 전쟁, 르완다 등 수많은 사람이 죽은 현장에서 인간이 과연 이성적인 사고를 하고 도덕적 인성을 가졌는지 의문이 간다. 아니 나만 해도 그렇다. 돌이켜보니 '한국인'이란 정체성이 때로 '인간애'를 고려할 수 없게 해서 다른 사람의 아픔은 보이지 않고 내편만 보였다.  


뚜렷한 대의명분이 있는 전쟁이 있었을까? 많은 사람은 세계 2차 대전이 명분 있는 전쟁이었다고 생각할지도 모르겠다. 궁극적으로 나치도 일본도 항복했고 많은 나라가 영국, 미국, 프랑스로부터 독립했고 한국도 독립했으니 좋은 일이다. 나도 그랬다. 특히 일본은 한국을 식민지로 삼고 한국어와 문화를 말살하려 했으니 원자 폭탄으로 벌을 받아도 싸다고 생각했다. 다만 일본에 살던 한국인도 원폭 피해를 입었다고 해서 그들만 불쌍하다고 느꼈다. 어떻게 한국인 피해자만 보이고 일본인은 무시했을까? 아마도 학교에서 일본과 갈등의 역사를 배우며 , 광화문에 서 있는 이순신 장군을 보며, 3월 1일이면 티브이에서 방송하던 유관순 영화를 보며 애국심을 고취시킨 덕분일 거다. 되돌아보니 나는 민족애만 있었고 인간애는 생각하지 못했다.  


글로버는 우리의 신념이 고립된 것이 아니라 시스템의 일부라고 했다. 세상에 대한 우리의 믿음은 마치 다 알 수 없는 큰 도시의 지도를 머릿속에 갖고 있는 것 같아서 어떤 부분은 구체적이고 또 어떤 부분은 명확하지 않지만 분명한 건 하나의 믿음이 다른 믿음으로 이어진다는 거다. 예를 들어 의사가 처방한 약이 질병을 치유할 거라고 믿는다면 그건 의사가 실력이 있고 최신 정보도 갖고 있다고 믿어서 그런 거다. 물론 약이 효과가 없다면 신념도 수정될 거다. 이때 사람은 여러 방법으로 상황을 해석하는데 약이 문제가 아니라 의사가 실력이 없다든지 자신이 약에 반응하지 않는 소수에 속한다든지... 그런데 이런 해석은 절대로 바꿀 수 없는 신념을 보존하기 위해 믿음의 시스템을 변형한단다.  어떤 사람은 과학이나 경제의 권위에 매료되어 자신의 견해를 종교처럼 신봉하는데 실제 종교처럼 정치적 종교도 존재한다.


스탈린 정권에서 사람들은 자신의 가치를 부정해야 했다. 정권의 이념을 따르지 않는 사람은 고발당하고 처형됐다. 조지 오웰의 <<1984>>에 나왔던 끊임없는 감시, 무조건적인 권력, 엄격한 사회 제어, 지속적인 사실 왜곡이 실제로 일어났다. 스탈린은 과학과 법도 정권의 이념에 맞게 변형했다.  멘델의 유전학보다 후천적 특성이 유전될 수 있다는 라마르크(Lamarck)의 이론이 더 마르크스주의적이라고 생각해서 중앙위원회를 통해 멘델의 유전학을 비난하고 라마르크의 정통성을 따르게 했다. 그 결과 농사가 엉망이 되었지만 정부의 논리에 따르지 않으면 처형되거나 투옥됐다. 법도 마찬가지였다. 스탈린 상을 받은 비쉰스키는 객관적 진실은 없고 상대적 진리만이 존재한다고 주장했다. 따라서 국가범죄에서 피고인의 진술이 가장 중요한 증거지만, 그것 또한 상대적이고 대략적이기 때문에 심문자는 자신의 지성뿐만 아니라 당의 감수성을 바탕으로 결론을 내릴 수 있다고 주장했다. 결국 객관적 진실에 대한 공격은 많은 많은 사람의 목숨을 앗아갔다.


인간애의 핵심은 다른 사람을 존중하고 동정하는 거다. 나치 독일은 구조적으로 유대인을 인간 사회에서 퇴출시켰다. 처음에는 다윗의 별이 달린 옷을 입게 하고 혐오스러운 동물에 비유하고 급기야 동물을 실어 나르는 가축차에 실어서 수용소로 옮겨졌다. 생체 실험 대상이 된 유대인은 실험용 동물로 간주되었고 안락사를 시키기 위해 실려온 유대인은 손목에 적힌 숫자로 불렸다. 끊임없는 굴욕과 섬뜩한 농담이 이어졌다. 1941년 비아리스토크에 들어간 군인은 유대인 수염에 불을 붙이고 유대인 종교 지도자가 장군에게 가서 보호를 요청하자 소변을 퍼부었다. 급기야 700명이 넘는 유대인을 시나고그에 넣고 불을 질렀다. 1943년 마즈다네크 수용소에서는 유대인 대량 학살을 '추수감사절'이라고 했고, 트레브린카에서 가스실을 '천국으로 가는 길'이라고 했다. 죽은 시체조차 그냥 내버려 두지 않았다. 여자의 머리는 매트리스를 만들기 위해 팔렸고 인간의 재는 나무벽의 단열재나 비료로 쓰였다. 인간이 어떻게 이렇게까지 잔인할 수 있을까? 냉담함은 나치의 가치였다. 히틀러는 자신이 독일에서 가장 냉담한 사람이라고 자처하며 인도주의를 연약함으로 비하했다. 나치스 친위대(SS) 훈련의 핵심은 동정심 극복 능력이었다.  


그렇다면 우리는 반대로 동정심을 기르는 훈련을 해야 할 것 같다. 그러나 동정심만으론 충분하지 않다. 동정심은 집단 심리에 취약학고 위급한 상황에서 사라질 수 있다. 그래서 사회 전체에서 인간애를 장려해야 한다. 작은 일이라도 생활에서 다른 사람을 배려하는 마음을 상상하고 실천해야 한다. 예를 들어 장애인 자리에 차를 세우지 않는 건 그곳에 차를 세우지 못해 힘들어할 장애인을 상상할 수 있기 때문이다. 약한 친구를 괴롭히거나 집단 따돌림을 당하도록 내버려 둔다면 마음이 결코 편하지 않을 거다. 행동하지 않는다면 동정심 극복 능력을 키우는 거다. 사기를 치거나 갈취하는 행위도 다른 사람이 고통받는다는 걸 상상 못 하는 냉담함이다. 아무리 다수가 옳다고 외쳐도 '인간애'에 어긋나는 일이면 하지 않는 용기가 절실하다. 나치 독일 시대에도 그런 사람이 있었다. 로타르 키스시그 판사는 히틀러의 승인으로 살인이 합법화되었다는 사실을 거부하고 안락사를 주도한 감독을 살인 혐의로 기소했다. 뮌헨 대학교의 인류학자 칼 살러(Karl Saller)는 현대 독일인들이 인종적으로 혼합되어 있다고 말했다가 학교에서 쫓겨나고 동료에게 외면을 당했다. 네덜라드에서는 25,000 정도의 유대인을 숨겨줬고 프랑스의 한 마을에서는 마을 전체가 약 5,000명의 유대인을 숨겨줬다.


어떻게 보면 '인간애'는 앞서 말한 프랑스 마을 사람들처럼 모두가 실천해야 자연스럽게 배양할 수 있다. 그렇지 않으면 쉽게 상황을 핑계 삼아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살인에 동참할 수 있다. 핵폭탄을 개발한 과학자와 사용한 정치인은 자신의 결정이 어떤 결과를 초래할지 상상할 수 있었을까? 어떤 독일 군인은 유대인 아이와 엄마를 죽일 때 고향에 있는 자식과 아내가 생각났지만 명령을 따랐단다. 얼굴을 보고도 죽일 수 있는데 미사일이나 폭탄을 쏘는 건 더 쉬운 일일 거다. 이제 인류는 더 많은 무기로 더 많은 사람을 멀리 떨어져서 죽일 수 있다. 지금도 우크라이나와 팔레스타인에서 사람이 죽어간다. 어떻게 멈출 수 있을까? 글로버는 책 말미에 이런 상상을 했다. 세르비아 민족주의 청년이 프란츠 페르디난트를 암살하지 않았다면 세계 1차 대전이 일어나지 않았을 거고, 1차 대전이 일어나지 않았다면 러시아 혁명이 일어나지 않고 스탈린도 없었을 거고, 독일이 패배하지 않았다면 히틀러도 없었을 거고 나치의 대량 학살도 없었을 거고 세계 2차 대전도 없었을 거고 핵폭탄도 개발되지 않고 히로시마도 없고, 마오쩌둥이나 폴포트도 없었을 거고... 그러나 그 모든 일은 일어났고 우리는 인간이 얼마나 잔인할 수 있는지 목격해서 더 이상 전쟁을 안 할 줄 알았는데 계속되고 있다. 제발 총성이 멈추고 많은 사람이 나라와 종교와 문화를 지키는 것만큼 '인간애'를 실천했으면 좋겠다.


<참고자료>

Glover, J. (2001). Humanity: A Moral History of the Twintieth Century. Yale University Pres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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