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회
영숙의 딸은 시댁과 가까운 곳에 살며 시부모와 사이가 좋았다. 고위 공직자였던 그레이스의 시아버지는 은퇴 후 일 년에 한두 번씩 아내가 가고 싶은 해외로 여행을 가고 국내 여행도 자주 간다고 했다. 사위도 아버지를 닮아 그레이스에게 자상했다. 수입이 줄더라도 아이를 돌보는 건 두 부모가 함께 해야 한다며 6개월 육아 휴직을 받아 시간 강사인 그레이스가 일을 계속할 수 있도록 도왔다. 덕분에 그레이스는 아이를 낳고도 2편의 논문을 쓸 수 있었다.
엄마, 우리 시아버지는 이번에 어머니와 함께 스웨덴에 가신대요. 엄마도 저번에 북유럽에 가고 싶다고 하셨잖아요. 아빠랑 언제 갈 거예요?
너희 아빠는 레지던트들이 파업을 해서 시간을 낼 수 없단다. 그래서 엄마보고 혼자 갔다 오라고 하지만 엄마는 혼자 가기 싫거든.
어떡해요. 이현이만 아니면 나라도 시간 내서 같이 갈 텐데…
아니다. 너는 일도 있고. 결혼 안 한 후배 교수가 같이 가자고 했어. 걱정하지 마라.
영숙은 딸이 시부모 이야기를 하면 괜히 만수에게 불만이 쌓였다. 전에는 그렇지 않았다. 남편이 세상에서 가장 자상하고 가장 성실한 사람이라고 생각했다. 그것으로 족했다. 워낙 어머니에게 서슴없이 손찌검까지 하던 아버지를 보고 자라서 영숙은 잘생긴 남자도 싫었고, 목소리가 큰 사람은 무서웠다. 평소에는 탈무드에 나온 좋은 이야기를 재미있게 한 시간씩 들려주던 아버지가 돈 문제로 어머니와 다툴 때는 마치 지킬 박사가 하이드 씨로 변하는 모습을 직접 목격하는 것 같았다. 그래서 장래 남편은 무조건 말이 없고, 돈 걱정을 하지 않아도 되는 직업을 가진 사람이어야 한다고 생각했다. 아니, 남편과 헤어질 걸 대비하여 자신이 직접 경제활동을 할 수 있는 직업을 가져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영숙의 어머니가 간호학과를 가라고 했을 때 순수하게 복종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