거울 앞에서_3

by 명희

생각해 보면, 일각수만의 문제가 아니었다. 수민은 전공 분야 외의 세계에 거의 관심을 두지 않고 살아왔다. 10대와 20대 후반까지는 세계문학을 제법 읽었지만, 그 이후로는 교육학, 의학, 심리학 같은 실용적인 책들만 곁에 두었다. 문학은 점점 멀어졌다. 그래서 정년을 맞으면, 세계문학 권장 도서를 다시 읽겠다고 다짐했었다. 그녀가 그렇게 마음먹은 이유는 단순했다. 어릴 적 읽었던 책들을, 그때는 제대로 이해하지 못했다는 아쉬움이 마음 한편에 남아 있었기 때문이다.

수민은 영어를 잘했다. 그 덕분에 반에서 늘 상위권에 들 수 있었지만, 열심히 공부하는 학생은 아니었다. 그보다는 정란과 함께 책을 읽고, 수다를 떠는 시간이 훨씬 좋았다. 그 시절의 오후들—햇살이 창가에 머물던 교실, 낡은 책장을 넘기던 손끝, 그리고 웃음 섞인 대화들—그 모든 것이 지금의 그녀를 만든 조각들이었다.

정란은 문학소녀였다. 수민이 문학의 세계로 발을 들인 것도, 결국 정란 덕분이었다. 둘은 교실 한쪽 구석에 앉아 책을 펼치곤 했다. 책 속 인물들의 운명에 대해 토론하는 시간은, 시험보다 훨씬 진지하고 열정적이었다.

“정란아, 내 생각엔 그레첸이 테스보다 더 비극적인 여인이야.” 수민이 조심스럽게 말을 꺼냈다.

정란은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적어도 테스는 자신을 속인 알렉을 죽였잖아. 그레첸은 죄를 다 뒤집어쓰고 사형당했어. 파우스트가 나쁜 놈이지.”

“그래도 그는 그레첸을 구하러 갔잖아. 게다가 그레첸은 아기를 죽였잖아. 그건 너무 끔찍해.” 수민의 목소리에 망설임이 섞였다.

“그래도 불쌍해. 오빠도 죽고, 엄마도 자기가 준 수면제로 돌아가셨잖아.” 정란은 단호했다.

“그러니까, 결혼 전에 남자랑 함부로 자면 안 돼.” 수민이 말하자 정란이 눈을 동그랗게 떴다.

“그런데... 어떻게 자길래 아이가 생겨?” 그 말에 둘은 잠시 침묵했다.

그때는 그 말의 의미조차 제대로 몰랐다. 수민은 얼굴이 화끈거려 고개를 돌렸다. 창밖으로 햇살이 교실 바닥에 길게 드리워져 있었다. 그 순간, 문학은 단순한 글이 아니라 삶의 복잡함을 품은 거울처럼 느껴졌다.

수민에게 사랑은 언제나 이야기 속에서 배운 것이었다. 그 시작은 초등학교 5학년 가을, 반에서 열린 장기자랑 시간이었다. 수민은 로미오와 줄리엣을 각색해 들려주었고, 아이들은 환호했다. 그날 이후, 반장과 수민이 서로 좋아한다는 소문이 돌기 시작했다. 전날까지만 해도 함께 웃고 놀던 여자아이들이 하루아침에 등을 돌렸다.

알고 보니, 어떤 아이가 장난 삼아 ‘사랑 점’을 쳤고, 그 결과가 “서로 사랑한다”였다는 것이다. 그 오해는 곧 풀렸지만, 수민은 그날 이후 사랑 점에 빠져들었다. 좋아하는 아이의 이름과 자신의 이름을 나란히 적고, 자음과 모음을 지워가며 남은 글자로 상대의 마음을 점치는 놀이였다.

한 번은 부모님의 이름으로 점을 쳐보았다. 결과는 이랬다—아버지는 어머니를 원망하고, 어머니는 아버지를 사랑한다. 왠지 모르게, 그 점괘는 이상하리만치 정확해 보였다.

그 무렵, 수민은 사랑을 확신하고 싶었다. 방학 내내 반 남학생, 합주부 오빠, 옆반 친구 이름까지 써가며 점을 쳤다. 반장보다 더 마음에 들던 한 학년 위 오빠가 자신을 “따라온다”는 점괘가 나오자, 수민은 그 아이와 결혼할 거라고 믿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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