거울 앞에서_6

by 명희

수민은 고개를 들었다. 존재하지 않는 짐승, 은거울, 내면의 사랑— 교수의 말들이 마치 그녀에게 직접 묻는 듯했다. 그녀는 한때 사랑을 이야기 속에서만 배웠다. 순정만화 속에서, 고전 소설 속에서, 그리고 정란과 나눈 대화 속에서. 그 사랑은 늘 아프고, 불완전했지만, 그래서 더 순수하게 느껴졌던 시절이 있었다. 지금 그녀는 거울을 들여다보는 여인처럼, 자신의 내면을 바라보고 있었다. 그 안에 있는 일각수는, 어쩌면 그녀가 잊고 지낸 어떤 감정, 혹은 아직도 믿고 싶은 어떤 순수함일지도 몰랐다.

“사랑하는 대상이 없는데, 마음속으로 사랑해서 그 존재가 생긴 것 같아요. 짝사랑인가요?” 수민은 자신도 모르게 생각을 입 밖으로 흘렸다.

교수는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비슷해요. 자동사적 사랑이라고 합니다.”

“자동사가 뭐죠?”

“목적어가 없어요.”

교수는 말을 이었다. “말테는 여성들이 짝사랑, 즉 자동사적 사랑의 기술을 완성함으로써 내면의 힘과 자립심을 획득했다고 봅니다. 그래서 ‘위대한 영웅적 여인’이라고도 하죠. 외부의 인정이나 보답이 필요 없는 사랑— 그것이 자동사적 사랑입니다. 릴케는 가장 진보적이고 성숙한 사랑을 ‘두 개의 고독이 서로를 보호하고, 경계를 이루며, 경의를 표하는 관계’라고 했어요. 자동사적 사랑은 ‘사랑해’라고 말할 대상이 필요한 타동사적 사랑과 달리, 특정한 사람이나 사물 없이도 독립적으로 존재하는 자급자족적인 애정 상태죠.”

잠시 침묵이 흐른 뒤, 한 여인이 짓궂게 물었다. “그렇다면 릴케는 혼자서 사랑의 감정만 느끼며 살았나요?”

교수는 웃으며 말했다. “뭐, 여러분도 아시다시피 그의 문학과 사생활은 별개였죠.”

이래서 수민은 문학하는 사람과는 사귈 수 없다고 생각했다. 명문대 영문과를 졸업한 아버지는 외교관으로 일하면서도 소설책을 낼 정도로 글도 잘 쓰고 말솜씨도 좋았다. 그러나 어머니와 다투며 손지검을 하는 모습을 보면, 그 모든 교양과 학식이 거짓말처럼 느껴졌다.

아버지는 칠십이 넘어서도 주변에 여자가 많았다. 팔십이 되어 중풍으로 쓰러진 뒤에야 어머니의 손에 맡겨졌다. 어머니는 늘 “나는 너희를 보며 살았다”라고 말했지만, 수민에게 그런 어머니는 때때로 부담스러웠다.

그래서 수민은 공부가 썩 좋지 않으면서도 계속했다. 부모로부터 경제적으로 독립해야 비로소 자신의 목소리를 낼 수 있을 것 같았다. 그러나 아버지는 그런 수민을 못마땅하게 여겼다.

“여자는 남편이 벌어다 주는 걸로 집에서 살림하는 게 제일 좋은 거야. 밖에 나가 돈 번다고 돌아다니면 쓸데없는 말 많이 듣게 돼.”

이상하게도, 그 점에 있어서는 아버지와 어머니의 생각이 같았다. 어머니 역시 수민이 집안일을 돕지 않고 늦게까지 도서관에 있는 걸 못마땅해했다. 수민의 부모는 그녀의 남편도 탐탁지 않아 했다. 봉사 동아리에서 만난 학교 선배는 키도 작고 집안도 넉넉하지 않았다. 그러나 수민은 똑똑하고 겸손하며 착실한 그 선배가 자신의 운명이라고 믿었다. 그리고 그녀의 판단은 틀리지 않았다. 결혼한 지 마흔 해가 넘었지만, 남편은 여전히 성실했고, 다툴 일이 없었다. 수민은 하늘에 감사했다. 어릴 적 부모의 불화로 마음고생을 너무 많이 한 덕분에, 좋은 사람을 알아보는 눈이 생겼다고 믿었다.

하지만 정란은 수민처럼 운이 좋지 않았다. 정란의 아버지는 말수가 적고 다정한 사람이었다. 수민은 그런 정란의 부모를 늘 부러워했다. 그러나 정작 정란은 아버지 같은 남편을 만나지 못했다. 창작 동아리에서 만난 잘생긴 선배는 첫 아이를 낳을 때까지만 남편 역할을 했다.

수민이 정란과 마지막으로 연락을 주고받은 건 35년 전, 그녀가 미국에 유학 중이던 때였다. 수민과 남편은 박사학위를 마친 뒤, 남편이 미국 대학에서 조교수로 일하게 되면서 첫 아이를 낳았다.

그 무렵, 은행에 다니던 정란은 다섯 살 된 딸을 키우고 있었다. 그녀는 수민에게 아기 옷을 보내왔다. 편지에는 딸이 말도 잘하고 똑똑하다는 이야기, 반포의 작은 전셋집에서 상계동의 큰 아파트로 이사 간다는 소식, 은행에서 승진했다는 자랑이 담겨 있었다.

보낸 옷은 한국 면이 좋아서인지, 미국 아기 옷보다 훨씬 부드럽고 따뜻했다. 수민은 곧장 정란에게 전화를 걸었다. 공부를 마친 이야기며, 아기가 얼마나 순하고 예쁜지, 자신의 근황을 한참 늘어놓았다. 그러느라 정란의 목소리에 담긴 미묘한 우울함은 눈치채지 못했다.

그 후 정란은 은행에서 지방으로 발령이 나 서울을 떠나 춘천으로 이사 간다고 했다. 그것이 마지막이었다. 그날 이후, 두 사람은 서로의 삶에서 멀어졌다. 편지도, 전화도, 소식도 더는 오지 않았다.

한국에 돌아와 한동안 수소문도 해봤지만, 소용없었다.

내가 조금만 더 현명한 사람이었다면, 그때 내 자랑을 그렇게 늘어놓지는 않았을 텐데.

네가 이혼한 사실을 말하지 않아서, 나도 모른 척했어.

지금처럼 인터넷으로 쉽게 연락하고, 화상채팅도 할 수 있는 시대였다면 네 말을 더 들어줬을까?

아니야. 그때도 나는 공부하기 바쁘다고, 아마 듣지 못했을 거야.

정말 미안해. 정란아.

수업이 끝난 뒤, 수민은 도서관 앞 벤치에 앉아 있었다. 가을 햇살이 낮게 깔리고, 단풍잎은 바람결에 흩날렸다. 그녀는 강의실에서처럼 휴대폰을 꺼내 <여인과 일각수>가 실린 위키피디아 페이지를 다시 열었다. 그리고 여섯 번째 태피스트리에 새겨진 문장을 조용히 중얼거렸다. “내 유일한 욕망을 위하여.” 평생, 자신은 욕망과는 거리가 먼 사람이라 믿어왔다. 가르치고, 연구하고, 남편과 아이들을 위해 살아온 시간들. 하지만 누군가에게 인정받고, 이해받고 싶었던 순간들—그 모든 것이 어쩌면 다른 형태의 욕망이었는지도 몰랐다. 햇살이 눈꺼풀 위로 번졌다. 수민은 천천히 눈을 뜨고, 가방에서 손거울을 꺼내 들었다. 그 속에는 주름진 이마, 굳어진 입술, 그리고 아직은 사라지지 않은 눈빛 하나가 있었다. 학교 다닐 때, 아이들은 수민이와 정란이가 자매인 줄 알았다고 했다. 그들은 눈매가 닮아 있었다. 정란아, 어디에 있든 잘 살아. 나도 잘 살아볼게.

keyword
작가의 이전글거울 앞에서_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