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간의 굴레에서>>를 읽고
아들!
오늘 엄마가 오래전에 세일로 산 책을 다 읽었어. 가끔 들리는 서점 한쪽 구석에 외국 서적을 세일하길래 봤더니 서머셋몸(W. Somerset Maugham)의 『인간의 굴레에서(Of Human Bondage)』가 7,150원 밖에 아니지 뭐니. 엄마 세일 좋아하는 것 알지? 엄마는 세일 가격이 정가라고 생각해. 뭐, 인터넷에서 무료로 PDF파일로도 읽을 수 있지만, 종이책에는 여백에 떠오른 생각을 몇 마디 적을 수도 있고, 인상 깊은 구절이 나온 페이지에 인덱스 포스트잇도 붙일 수 있고… 물론 전자책에도 그런 기능이 있지만, 종이책은 만질 수 있어서 정다운 것 같아.
이 책을 읽고 네게 편지를 쓰듯이 내 느낌을 적는 것은 주인공 필립이 어쩐지 너를 닮은 것 같아서야. 아마도 684쪽이나 되는 긴 책이 지겹지 않았던 것도 그런 생각이 들어서 그랬을 거야. 아니면, 나를 닮았는지도 몰라. 그러나 필립은 우리와 전혀 다른 어린 시절을 보냈지. 우선 그는 한쪽 발이 만곡족이어서 마음고생을 많이 했지. 약점 하나 갖지 않은 사람은 드물지만 그것이 신체적으로 두드러지면 얼마나 힘들겠니? 더구나 9살에 부모를 잃고 큰아버지댁에 입양되어 살았는데 그때가 1885년이었으니 지금처럼 어릴 때 만곡족을 치료하는 방법도 없었을 거야. 그래서 학교에서 놀림을 받으며 마음이 거칠어져서, 남의 약점을 잡아내어 냉소적으로 말하는 능력(?)도 생기지.
큰아버지는 교구목사로 결혼한 지 30년이 넘었지만 아이가 없었지. 큰어머니는 필립과 가까워지고 싶었지만 아이를 키워본 경험이 없어서 50이 넘은 자신보다 35살 먹은 가정부를 더 따르는 필립을 보며 어쩔 줄 몰랐지. 이기적이고 고지식한 큰아버지는 필립이 원하는 만큼의 사랑을 주지 못했지만, 자신이 할 수 있는 만큼 부모의 역할은 했다고 생각해. 적어도 그는 필립의 부모가 남긴 돈을 허투루 쓰지 않고 필립이 제대로 교육받고 남은 유산도 21세에 상속받도록 해주지. 그러나 그 유산이 많지 않기 때문에 필립이 자신처럼 교구목사가 되어 안정된 수입이 있길 바랐을 거야. 재미있는 건 큰어머니는 당시 신사 계급이 택할 수 있는 직업에 대해 말하는데 그것이 엄마가 자랄 때까지도 품위를 지키면서도 안정적인 수입을 보장하는 직업이라고 생각했던 것 같아. 군인, 변호사, 목사, 회계사, 의사.
필립도 어릴 때는 큰아버지 말대로 목사가 될 수 있다고 생각했지. 어릴 때부터 책 읽기를 좋아해서 공부도 잘했고 옥스퍼드 신학교에 진학해 장학금도 받을 수 있었어. 그러나 큰아버지를 비롯하여 주변의 목사들이 그에게 큰 감동을 주지 못했지. 학교 공부도 뻔한 내용이 반복되는 게 지겨웠어. 그래서 독일에 가서 독어, 철학, 수학, 프랑스어를 배우고 파리에 가서 미술 공부도 하지. 아무리 큰아버지가 엄했다고 해도 필립이 원하는 대로 진로를 바꾼 건 큰어머니의 공이 컸지. 그녀는 필립이 독일에서 공부할 수 있도록 지인에게 연락하여 하이델베르크에서 홈스테이를 할 수 있게 도와주고, 파리에 갈 때는 비상금을 선뜻 내주어 필립을 감동시켰지. 필립의 부모가 생존했다면 필립은 더 행복했을까?
분명한 건 아버지가 잘 나가는 외과의사였으니 경제적으로 더 풍족했을 거야. 그러나 평생 일을 안 해도 먹고살 수 있을 만큼 유산이 있다는 게 과연 좋은 걸까? 헤이워드의 경우를 보면 꼭 그렇지 않은 것 같아. 그는 지방 판사의 아들로 아버지의 유산으로 이태리 독일 프랑스의 도시를 여행하며 살았어. 아주 넉넉한 액수가 아닌대도 고급스러운 취향 탓에 빚도 졌었지. 원래 목표는 변호사 시험에 합격하여 정치를 하는 거였어. 그러나 문학과 예술을 너무 좋아해서 법 공부는 뒷전이었지. 결국 “변호사 협회의 저속한 소란”이나 “고귀함이 부족한 현대 정치”는 자신과 어울리지 않는다며 자칭 시인으로 문학과 예술에 대한 깊은 조예를 웅변해서 처음 필립이 그에게 홀딱 반했어. 그러나 정작 자신의 작품은 하나도 쓰지 못해서 필립도 헤이워드가 말뿐인 사람이란 걸 알게 되지. 결국 그는 35세에 군인으로 보어 전쟁에 참전했다 장염으로 사망했지. 그때 필립은 처음으로 자신의 죽음을 상상하며 다시 한번 삶의 의미를 자문했어.
삶의 목적이 무엇일까? 필립은 사춘기 때부터 이 문제를 고민했어. 그는 시키는 대로 하는 것이 피곤했어. 불합리하지 않는 제약이라도 제약이 짜증 났지. 왜 자기는 발의 기형을 갖고 태어나 제약을 받고, 부모님이 일찍 돌아가셔서 애정 결핍을 느끼고, 왜 목사나 회계사가 되어야 하고 화가가 되면 안 될까? 그건 누가 정한 법인가? 그는 자신의 의지대로 자유롭게 살고 싶었어. 그러나 파리에서 재능 없는 프라이스 양의 자살을 목격하고 미술 선생에게 자신의 그림을 보여주며 솔직한 자문을 구하지. 포이네 선생은 필립이 손재주는 있지만 재능은 없는 것 같다고 하지. 그러자 필립은 과감히 그림을 포기해. 엄마는 이 대목에서 필립이 현명한 선택을 해서 마음이 후련했어. 그래도 자기가 해보고 싶었던 일을 2년이나 하며 여러 사람도 만나고 인생공부도 했으니 낭비한 시간은 아니었어. 특히 그곳에서 만난 시인 크론쇼는 페르시안 카펫에 삶의 의미가 있다고 하며, 답은 스스로 찾아보라고 해.
그러나 필립은 오랫동안 그 의미를 알지 못하지. 목사도, 회계사도, 화가도 자신의 길이 아니란 걸 깨달은 필립은 아버지처럼 의대에 진학하게 돼. 큰아버지와 처음으로 의견 일치를 본 셈이지. 의사는 필립에게 딱 어울리는 직업이었어. 독립적으로 일하며 안정된 수입을 보장하니까. 그런데 임상 경험을 하며 의사가 천직이란 생각까지 들었어. 얼굴과 걸음걸이 말하는 것을 관찰하고 분석하는 게 흥미로웠어. 그렇게 얻어진 정보로 직업을 맞출 수 있었고, 어떻게 질문해야 이해시킬 수 있고, 어떤 질문을 하면 진실을 끌어낼 수 있는지 알 수 있었어. 환자들은 그가 “부드러운 손길로 친절하고 화를 내는 법이 없어서” (p.625)) 좋아하지. 무엇보다 그가 극빈층의 삶을 알고 있어서 가난한 이가 건네는 차를 꺼리지 않았기에 기뻐했어. 어떻게 가난한 삶을 아냐고?
필립이 ‘밀드레드’라는 여자에게 홀려서 규모 없이 돈을 쓰다가 급기야 주식에 투자한 게 휴지조각이 됐어. 엄마가 제일 싫어하는 두 가지를 한 거지. 명품도 사고 고급 식당에 가고 해외여행을 하는 것 좋지. 그러나 예산 안에서 소비하고, 주식에 투자하더라도 만일을 위해 비상금을 남겨 놔야 했는데 필립은 한 바구니에 모든 알을 담았지. 결국 아버지에게 물려받은 재산을 탕진해서 의대 마지막 학기를 마칠 수 없게 되자 큰아버지에게 돈을 꿔달라고 하지만 거절당해. 이건 큰아버지가 좀 심했어. 조금만 도와주면 일해서 갚았을 텐데… 큰어머니가 살아계셨다면 그러지 않았겠지. 그러나 큰아버지는 홀아비가 되어 더욱 인색해졌어. 급기야 필립은 큰아버지가 빨리 돌아가시길 빌어. 그러면 큰아버지가 남겨주기로 한 유산으로 의대를 마칠 수 있으니까. 이 대목이 탐정 소설이었다면 살인이 일어났을 거야. 돈이 뭔지… 사실 필립이 밥을 굶을 지경이라고 했으면 도와줬을 거야. 그러나 필립은 잔소리 듣는 게 싫었어. 친구에게 빌린 오 실링(요즘 화폐로 치면 약 6만 원)은 오래가지 못했어. 꼬박 하루를 굶고 애썰니를 찾아가고, 포목상 직원이 되어 생전 처음 발에 불이 나게 일했는데 급여가 너무 적어 놀라지.
애썰니는 필립이 의대 학생이었을 때 만났던 환자인데 48세 먹은 기자였지. 그는 11년이나 스페인 털리도에 산 경험이 있어서 스페인 시도 번역하고 돈키호테도 원서로 읽은 게 필립의 관심을 끌어 친구가 되지. 그는 자식이 9명이나 있어서 겨우 먹고 살 정도였지만, 일요일엔 로스트비프를 먹는다며 필립을 초대했지. 그래서 필립은 일요일마다 애쎌니 집에 들러 식사를 같이 했어. 아이들은 밝고 상냥하고 부인은 부지런하고 요리도 잘하고, 필립은 그 집에서 처음으로 따뜻한 가정의 의미를 알게 돼. 전에는 필립이 케이크나 먹을 것을 사들고 갔었지만 무일푼이 되어 초라한 모습을 보이고 싶지 않아 몇 주 가지 않았어. 앙상한 모습으로 나타난 필립을 그 집 식구들은 따뜻하게 맞아주지. 그리고 조심스럽게 자기네 집에 와서 살라며 큰 아들 침대를 내줘. 필립은 어떤 경우에도 감정을 드러내지 않는다는 자부심이 있었지만 이날만큼은 눈물이 났어.
참, 밀드레드 이야기를 안 했네. 필립 인생에 전혀 도움이 안 되는 악연이었지만, 밀드레드도 어찌 보면 불쌍한 사람이야. 밀드레드는 찻집에서 일하던 종업원이었어. 그녀는 쌀쌀맞았지. 필립은 그런 그녀가 불쾌했어. 외모도 전혀 필립 타입이 아니었지. 마르고 건강해 보이지 않고. 그런데 이성적인 판단과 상관없이 그의 마음은 그녀에게 좌지우지됐어. 그녀를 사랑하는 자신을 혐오한다는 말까지 하지. 그녀는 필립에게 친절한 적이 거의 없었어. 그러나 필립은 다른 남자의 아이를 임신한 그녀에게 경제적 지원을 아끼지 않아. 이렇게 그녀가 원하는 걸 다 해주면 그녀를 얻을 수 있다고 생각하지. 그러나 그녀가 의대 선배와 바람이 나서 자기를 떠났을 때 필립은 알게 되지. 이성 간의 끌림은 노력으로 되는 게 아니란 걸. 자기도 지혜롭고 인자한 노라에게 이성으로 끌리지 않았듯이 밀드레드도 자기를 좋아할 수 없었다는 걸. 그리고 그녀를 완전히 혐오하게 돼. 그러나 그 후 밀드레드가 길거리 여자가 된 걸 보고 자기 집에 가정부로 고용하고 아기도 아빠처럼 예뻐하지. 그러나 밀드레드가 결혼하자고 유혹하자 완강히 거절해서 밀드레드와 완전히 갈라서지.
솔직히 엄마는 필립이 왜 밀드레드에게 빠졌는지 이해할 수 없었어. 친구들은 필립이 상식적이고 이성적인 사람이라고 평했는데 왜 그렇게 밀드레드에게 집착했는지 모르겠어. 문학과 철학 책을 섭렵하며 자신만의 신념을 독자적으로 형성하던 사람이 어째서 겉멋만 들고, 씀씀이도 헤프고, 자기 아이도 제대로 돌보지 않는 사람과 결혼하고 싶었을까? 그건 아마도 그가 세상이 부조리하고 삶이 무의미하다는 당시 허무주의의 영향을 받은 것 같아. 어차피 가치 있는 일은 없으니 내 기분대로 산다는 것. 엄마가 별로 좋아하지 않는 사상이지. 보기에 따라 세상은 부조리하지. 선하게 산 사람에게도 나쁜 일이 생길 수 있고, 악하게 돈을 벌어 잘 살 수도 있으니. 그러나 엄마가 경험한 세상에는 늘 내가 좀 더 성숙한 사람이 될 수 있도록 도와주는 손길이 있었어. 엄한 부모가 너무 두려워 소화도 잘 안 될 정도였지만, 부모님 덕분에 로마, 파리, 동경에서 살았어. 집에서는 싸움 소리가 일상이었지만 조부모님 댁에서는 내 세상이었어. 사람이든 환경이든 양면이 있어서 나쁜 건 잘 극복하고 좋은 건 감사하며 살다 보면 더 감사할 일이 생기더라.
이렇게 우리는 다양한 경험의 날실과 씨실을 엮어 인생의 양탄자를 짜는 것 같아. 필립도 크론쇼의 카펫을 회상하며 이런 생각을 해. “삶의 다양한 사건들, 행동들, 감정들, 생각들로부터 규칙적이든, 정교하든, 복잡하든, 아름다운 디자인을 만들어낼 수 있다… 가장 명백하고 완벽하며 아름다운 하나의 패턴... 인간은 태어나고, 성인이 되고, 결혼하고, 아이를 낳고, 생계를 위해 수고하고, 죽는다.” (p. 586) 이 책에 나온 많은 인물들은 각기 자기의 방식대로 카펫을 만들었지. 애썰니는 부인과 이혼하지 않는 상태에서 가정부와 9자녀를 낳아 잘 살고, 크론쇼는 사후 한 권의 시집을 내고, 필립은 가족도 아닌 크론쇼가 생을 마감할 때까지 자기 집에서 돌보지. 어떤 삶이 좋고 어떤 삶이 나쁜 건 없는 것 같아. 오로지 자신이 결정하고 판단하는 거니까. 엄마도 아직 인생을 다 산 건 아니어서 여전히 배울 게 많아. 그래서 내가 보기에 더 아름다운 양탄자를 만들기 위해 그동안 읽지 못한 책을 부지런히 읽고 있어. 너도 이 책 한 번 읽어봐. 유튜브에서 오디오북으로도 들을 수 있어.
<참고문헌>
Maugham, W. S. (2007). Of Human Bondage. Signet Classic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