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톤 체호프의 『개를 데리고 다니는 여인』은 흔히 고전이라는 이름으로 숭고한 사랑의 서사처럼 읽히곤 한다. 그러나 현대적 윤리관으로 이들을 해부해 보면, 그 실체는 ‘진실한 사랑’이라는 말로 포장된 뻔뻔한 기만과 책임 회피에 불과하다. 이 작품을 읽는 내내 든 생각은 구로프와 안나의 거짓말이 역겹다는 것뿐이었다.
가장 먼저 지적하고 싶은 점은 그들의 도덕적 나태함이다. 구로프는 은행원이라는 안정된 직업, 모스크바의 집 두 채, 그리고 남부러울 것 없는 사회적 지위를 누리는 인물이다. 그런 그가 매일 성실하게 반복되는 일상을 하찮게 여기며 '일탈'을 진실된 삶이라 주장하는 것은 그야말로 '배부른 소리'다. 사회를 지탱하는 성실한 노동과 가족에 대한 책임을 ‘권태’로 치부하는 오만함이 이 불륜의 시작이다.
특히 구로프가 안나를 바라보는 시선은 거북하기 짝이 없다. 자기 부인은 늙어 보인다고 비하하면서, 거의 딸뻘인 22살 안나를 보며 "얼마 전까지 여학생이었을 것"이라 상상하는 대목은 그의 천박한 욕망을 적나라하게 보여준다. 숙련된 카사노바인 구로프가 외로운 처지의 어린 여성을 심리적으로 파고든 것은 사랑이 아니라 명백한 기만이다.
그들은 자신들이 사회적 체면이라는 감옥에 갇힌 가련한 희생자인 척하지만, 실상은 다르다. 그들은 창살 없는 감옥에 갇힌 가련한 연인이 아니라, 감옥의 문을 열 용기가 없어 그 안에서 안락함을 탐하는 겁쟁이들이다. 진정으로 사랑했다면 사회적 매장을 각오하고서라도 이혼을 택했어야 한다. 모든 기득권과 경제적 여유를 유지한 채 뒤로 숨어서 속삭이는 사랑에 무슨 진실이 있단 말인가?
안나의 남편이 그녀의 모스크바 여행을 “반신반의” 했다고 한 걸로 봐서 이미 그녀의 변화를 눈치채고 있듯, 비밀 뒤에 숨은 평화는 곧 무너질 신기루일 뿐이다. 벌써 흰머리가 나기 시작한 구로프가 10년 뒤 할아버지가 되고 안나 또한 젊음을 잃었을 때, 오직 '외모와 설렘'에만 기댄 이들의 사랑이 과연 남아있을지 의문이다.
책임이 따르지 않는 사랑은 결코 아름다울 수 없다. 진실된 삶을 살고 싶다면 몰래 하는 밀회를 멈추고 떳떳하게 광장으로 나와야 한다. 구로프는 계속 “모스크바에서의 일을 아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라고 하지만, 안나의 남편처럼 그의 가족도 눈치챘을 거다. 가족의 희생 위에 세워진 감정의 성채는 결코 그들이 말하는 '진실'한 삶이 될 수 없을 거다.
체호프는 '예술가의 역할은 질문을 던지는 것이지 답을 제시하는 것이 아니다'라고 말했다. 그래서인지 소설 속 두 사람의 모호한 결말은 인간의 불완전함을 대변하는 것처럼 보이기도 한다. 하지만 문제가 무엇인지 아는 자가 이를 해결하려 하지 않는 것은 불완전함이 아니라 도덕적 직무유기일 뿐이다. 설사 10년 뒤 그들의 사랑이 시들지 않는다 해도, 그들이 계속해서 거짓된 혼인을 유지하며 이중생활을 이어간다면 그 끝에 마주할 것은 '진실한 삶'이 아니라 허물어진 거짓의 잔해뿐일 것이다. 진정한 삶은 달콤한 밀회 속이 아니라, 비겁함을 벗어던진 정직한 책임 위에 세워지는 법이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