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울 브라더

어두운 이야기는 싫다.

by 명희

형제보다 더 친한 친구가 총을 맞고 내장이 튀어나온 채 고통스럽게 애원한다. "제발 나를 죽여줘" 형제보다 더 친한 친구를 죽일 수 없다. 아버지 어머니를 생각했다. 내 안에 목소리가 명령했다. 형제보다 더 친한 친구를 죽이지 마라. 너는 신이 아니다. “복수할 거야. 너를 이렇게 만든 자식이 어떻게 생겼어?” “제발 내 목을 베어줘." “키가 커? 작아?” 새벽에 총에 맞고 저녁이 됐다. 친구는 아직도 살아 있다. 친구를 내 손으로 보내면 어떻게 그의 부모를 볼 수 있겠어? "네가 내 친구라면 제발 죽여줘." 세 번이나 부탁했는데 끝내 할 수 없었다. 마뎀바가 죽고 알파는 후회한다. 친구 말을 들어줄 걸. 인간이면 지켜야 할 보편적인 법을 따랐는데 친구에게 비인간적이었다. 친구 시체를 둘러업고 참호로 돌아온다. 이상하다. 알파가 영웅이란다. 용감하고 강하단다. 메달을 받을 자격이 있단다.


첫 장부터 너무 끔찍하다. 나라면 친구의 고통을 덜어주기 위해 친구를 죽일 수 있을까? 못한다. 사람을 죽이면 안 된다. 적군을 죽일 수 있을까? 사람을 죽이면 안 된다. 적군이 나를 죽이려고 하면 그를 죽일 수 있을까? 상상하기조차 힘들지만 내 목숨이 위태롭다면 본능적으로 살려고 무엇이든 할 거다. 그러면 사람을 죽이는 것도 할 수 있을까? 실제로 경험하지 않고는 모르겠다. 이렇게 생각조차 하기 힘든 일을 사람들은 수 천년 동안 했었고 지금도 하고 있다. 민간인이 사람을 죽이면 살인이지만 전쟁에서 적군을 죽이면 훈장을 받는다. 이중적이다. 모순이다.


1차 세계대전 프랑스를 위해 싸우는 세네갈 병사. 그들이 투입된 이유는 독일군을 위협하기 위한 거다. 프랑스 지휘관은 독일인이 흑인을 두려워한다고 했다. 흑인 병사는 충실하다. 지휘관이 원하는 만행을 수행한다. 칼로 베고 참수하고 내장을 끄집어낸다. 지휘관이 호루라기를 불면 흑인병사가 참호에서 소리를 지르며 미친 듯이 뛰쳐나간다. 왼손에는 소총을 들고 오른손에는 마체테(machete)를 들고. "너희들은 용감한 전사야! 나가서 너희들의 용맹을 보여줘!" 누가 더 미쳤는지 경쟁이라도 하듯 총알받이가 된다. 미치지 않고서는 전쟁을 할 수 없다. 프랑스인도 호루라기 소리에 나가야 한다. 일시적 광기는 총알의 위력을 잊게 한다. 일시적 광기는 사람을 용감하게 한다. 그러나 50명이 7명밖에 안 남았을 때 호루라기 소리에 불복종하다. 그러자 지휘관은 상상하기 힘든 일을 한다. 알파는 자기가 세상에서 본 가장 불쾌한 일이라고 한다. 반면 반역자는 용감하다고 생각한다. “이제 내가 왜 죽어야 하는지 알겠어… 나는 너의 연금을 위해 죽는 거야 오데뜨. 사랑해 오데뜨.” 프랑스인도 세네갈 인도 독일인도 20살 안팎의 젊은이들이다. 이들은 누구를 위해서 죽이고 죽나? 알파는 서서히 넋이 나간다. 그러나 어쩌면 미친 사람은 알파가 아닐지도 모른다.


이런 소설은 내 취향이 전혀 아닌데 독서 모임 때문에 할 수 없이 읽었다. 처음 76페이지는 전쟁터에서 일어난 일이고 나머지 69페이지는 어린 시절, 전쟁에 가기 전, 제대 후에 일어난 일을 빠르게 전개하다 마지막에는 무언가 석연치 않고 이해하기 힘든 결말로 끝난다. 2018년 프랑스 작가 다비드 디옵(David Diop)이 쓴 프레르 담(Frère d'ame). 독서 모임에서는 2021년 국제 부커상을 받은 영어 번역본 "저녁에 모든 피는 검다 (At night all blood is black)"을 읽었다. 줌에서 8명이 모였다. 백인 여성 2명, 백인 남성 1명, 인도계 미국인 1명, 세네갈인 1명 그리고 한국인 3명.

“강렬해요. 끝은 어떻게 된 거죠? 잘 알려진 이야기는 다른 이야기를 숨기고 있다는 말을 하잖아요. 그리고 여러분이라면 친구를 죽일 수 있나요?”

“왜 알파가 이렇게까지 보복을 해야 했는지 이해가 잘 안 가요. 그리고 마지막 부분은 세네갈이 프랑스를 식민지화해서 프랑스에게 보복한 걸 비유한 건가요?”

“알파는 왜 손을 잘랐을까요? 손에 무슨 의미가 있나요?”

“글쎄요. 이런 것과 연관이 있는지 모르지만 콩고가 벨기에 식민지였을 때 흑인들이 할당량의 고무를 가져오지 않으면 벨기에 사람이 흑인 손목을 잘랐다고 들었어요.”

“했던 이야기를 하고 또 하고 “하늘에 “맹세코(God’s truth)”라는 말은 수없이 반복하고. 그래서 마치 최면을 거는 것 같았어요. 자기를 이해해 달라고. 또 아프리카 구전 동화에서도 이렇게 말할 것 같아요. 반복해서 앞 이야기를 정리하고 거기에 또 더해서 말하고. 그런데 미국 분들 언제 “맹세코(God’s truth)”란 말을 쓰나요?”

“영어에서는 안 하는데 프랑스 식 아닐까요? 교회에서 이렇게 말하는 걸 들었어요. 그러나 일상에서는 잘 말하지 않아요. 여기서는 자기 이야기가 사실이라고 하는데 이 사람 미친 사람 아닌가요? 어디까지가 사실인가요? 그런데 자기가 미쳤다고 해요. 미친 사람이 자기가 미쳤다고 말하나요?"

“저는 107페이지에서 108페이지에 나온 내용을 보면 작가의 철학이 담겨 있다는 생각을 했어요. <<우리는 마을 어른에 의해 성인의 비밀에 입문했다. 그는 우리에게 어떻게 행동해야 하는지 설명했다. 그가 우리에게 가르쳐준 가장 큰 비밀은 사람이 사건을 주관하는 것이 아니라 사건이 사람을 주관한다는 거다. […] 우리에게 일어날 수 있는 일이 아무리 끔찍하거나 경사스러운 일일지라도 새로운 것은 아니다. 그러나 우리는 모두 한 사람 한 사람 유일한 존재이기 때문에 우리가 경험하는 것은 항상 새롭다. 왜냐하면 모든 사람은 독특하기 때문이다. […] 인생에서 자신을 찾고 길을 잃지 않으려면 의무의 목소리에 귀 기울여야 한다. 자신에 대해 너무 생각하는 것은 흔들리는 것이다. 이 비밀을 이해하는 사람은 누구나 평화롭게 살 수 있다. 그러나 말처럼 쉽지 않다.>>”

“저는 그렇지 않다고 생각해요. 의무가 무엇을 말하나요? 나라? 가족? 종교?”

“그 모든 걸 포함하지 않을까요? 우리의 정체성은 결국 우리가 살고 있는 환경에서 형성되니까 가정 학교 나라 종교 등에서 우리에게 요구하고 주입된 의무를 저버릴 수 없겠죠. 그런데 자신에 대해 너무 생각하는 것은 흔들리는 것이라고 한 것으로 봐서 세네갈 문화도 동양처럼 집단주의 문화 같네요. 그런가요?”

“그렇죠. 부모님 말씀을 따르고 부모님이 우리를 위해 희생하셨으니까 우리도 열심히 공부해서 좋은 직업 갖고 잘 살고 부모님이 자랑스럽게 생각할 사람이 되어야겠다고 생각하죠.”

“그럼 프랑스와의 관계는 어떤가요? 역사는 어떻게 배웠나요?

학교에서는 프랑스가 세네갈에 와서 더 잘 살게 되었다는 식이죠. 사실 세네갈에는 여러 부족이 있었기 때문에 탄압을 받았던 부족은 프랑스가 와서 구해줬다고 생각하죠. 그리고 세네갈에는 20개가 넘는 언어가 있어서 프랑스어가 공식 언어가 되어 편리한 점도 있죠. 그러나 1차 대전 당시 전쟁에 나갔던 증조할아버지 이야기를 들었어요. 그래서 차별받고 제대로 보상도 못 받은 걸 알지만 프랑스하고 좋은 관계를 유지하는 게 경제적으로 유리하기 때문에 그냥 좋게 지내고 있어요. 그러나 그건 부모님 세대고 젊은 세대는 생각이 좀 다르죠. 역사를 바로 잡아야 한다는 목소리도 내고 있어요.”


두 시간 동안 이어진 토론을 마치고도 계속 책이 머리를 맴돈다. 군대에 안 가봐서 모르겠다. 군대에서 훈련을 받으면 사람을 죽일 수 있을까? 남편에게 물어봤다.

“군대에서 가르쳐 주는 게 아니라 사람은 함께 있으면 할 수 있게 돼. 혼자서는 못하는 걸 함께 있으면 하는 거지. 일종의 메스 히스테리아라고 할 수 있지.”

“맞아. 혼자서 못하지만 함께라면 할 수 있지. 내가 읽은 책에서는 미쳐야 할 수 있다고 했어요.”

“그렇지. 미친 짓이지.”

"그런데 여보 당신은 전쟁 영화 싸우는 영화 좋아하잖아. 난 무서운데. 그래서 난 공격성은 남자가 더 많다고 생각해요. 수렵 사회에서 남자가 사냥을 한 이유도 남자가 생리적으로 여자보다 동물을 죽일 수 있는 공격성이 더 있어서 그런 게 아닐까?"

"그런데 난 당신이 더 무서운데. 하하"

테스토스테론과 공격성이 상관관계가 있다고 한다. 호르몬이 공격성의 원인이라기보다 공격성을 유발하는 상황에 놓였을 때 호르몬이 올라간다는 거다. 예를 들어 모욕을 느끼거나 스트레스를 받았을 때 테스토스테론과 공격성이 높아진단다. 그런데 이런 분노나 좌절감을 느낄 때 카타르시스를 한다고 소리를 지르거나 펀칭 같은 걸 하면 오히려 공격성이 더 높아진단다. 공격성이 공격성을 더 강화한다. 그래서 전쟁 중이거나 전쟁이 끝난 후에 조사했더니 이긴 나라나 진 나라나 살인이 크게 증가했단다. 그래서 화가 날 때 혼자서 소리를 지르는 것보다 차분한 음악을 듣는다든지 마음 따뜻한 영화를 보는 게 더 좋다고 한다.


이렇게 말하고 나니 내가 왜 이런 잔인함을 다룬 소설을 좋아하지 않는지 알겠다. 기분이 안 좋기 때문이다. 전쟁 범죄 착취 빈곤과 같은 사회의 어두운 면을 모른 체할 수 없다. 그러나 그런 부정적 면만을 본다면 부정적 생각에 사로잡혀 늘 우울할 것 같다. 내가 해결할 수도 없는데 나만 잘 살고 있는 것 같아서 죄의식만 쌓인다. 그게 싫다. 그러나 이 소설을 통해 묻게 된 건 인간이 배웠다고 더 윤리적이고 도덕적인가 하는 문제다. 미개하다고 생각하는 아프리카 부족도 인간으로서 지켜야 할 기본적인 상식을 지키며 사는 것 같다. 오히려 수백 년 동안 윤리와 도덕에 대해 고민하고 학습하고 전파한 문명국이 더 교묘하고 지능적으로 비인간적인 만행을 하는 것 같은데 그럼 교육은 무엇 때문에 필요한가? 머리가 복잡하다. 내가 좋아하는 제인 오스틴의 <<이성과 감성>>을 읽으며 마음을 달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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