재래시장에서

참기름 짜기

by 명희

어릴 때 할머니를 따라 종종 시장에 갔던 기억이 나지만 아이들을 키우면서 재래시장에 간 적은 없다. 외국에서 오래 살아서 그러기도 했지만 한국에 돌아와서도 재래시장은 가깝지도 않고 가격도 정찰제가 아니고 카드도 반가워하지 않는 것 같아 불편했다. 그러다가 몇 년 전부터 일 년에 서너 번 재래시장에 가기 시작했다. 장을 보러 간다기보다 시장 구경하고 포장마차에서 전도 먹고 빈대떡도 먹고 도넛도 먹었다. 그리고 무말랭이 가자미식해 등 밑반찬을 사기도 했다. 확실히 마트보다 저렴하고 맛도 좋았다. 그러나 오가는데 시간이 너무 걸려 여전히 큰 마음먹고 가야 했다.


그런데 작년에 묵은쌀이 너무 많아 떡집을 찾아봤더니 집에서 비교적 가까운 곳에 재래시장이 있었다. 묵은쌀로 백설기를 해 먹고 싶었으나 가래떡만 해준다고 해서 아쉬웠지만 가래떡을 만들어 잘 나눠 먹었다. 버스로 다리 하나만 건너면 되는 멀지 않은 곳에 있지만 아직 직장에 묶여 있어서 특별히 볼 일이 없으면 안 가게 된다. 그런데 지난주 지인 덕분에 재래시장에 갈 일이 생겼다. 깨를 많이 보내줘서 참기름을 짜기로 했다. 사실 그전에도 깨를 보내줬는데 참기름을 짜야한다고 생각만 하고 냉동실에 방치한 상태였다. 그래서 이번에는 기필코 참기름을 짜야했다. 떡을 뽑았던 집에 갔더니 그곳은 참기름을 짜지 않는다고 다른 가게를 알려줬다. 부부 방앗간. 가게 이름처럼 노부부가 가게 입구 밴치에 나란히 앉아 있었다. 참기름을 짤 수 있냐고 물었더니 저울을 가져왔다. 7.2kg. 한 말이 좀 넘는데… 벽에 손으로 쓴 가격표가 보였다. 한 말에 2만 5천 원. 그러면 더 받으시면 되죠. 3만 원 줘요. 주인 남자가 말했다. 네 좋습니다.


가격이 정해지자 주인 여자가 벌떡 일어나 한 손으로 봉지 2개를 들고 가게 안쪽으로 사라졌다. 허리가 심하게 굽었다. “무거워요…”라고 말하려는데 벌써 사라지고 없었다. 새로 받은 깨와 냉장고에 있던 깨를 20리터 재활용 봉지에 넣었더니 너무 무거워 봉지 두 개로 나눠 왔는데 주인 여자는 가볍게 들고나갔다. 얼마나 기다렸을까? 여자가 다시 밴치로 돌아왔다. 부부가 대화한다. “돌 많았어?” “아니 별로 없어요.” “국산인 같은데 별로 없어?” “없어...” 깨를 씻고 말려서 볶고 짜는데 약 한 시간 반이 걸린다고 했다. 오디오붘을 들으려고 귀에 이어폰을 끼웠다. 밴치 정면에 보이는 벽 모퉁이에 드레스를 입은 소녀가 피아노를 치는 흑백사진이 보였다. 여주인에게 물었다. "저기 사진을 보니 피아노를 잘 치는 분이 있나 봐요.""우리 손녀딸이 어릴 때 찍은 거지. 지금은 중학생... 아니 고등학생이지. 아마 고등학교 1학년일 거예요." 여주인의 옆모습을 찬찬히 보니 얼굴선이 곱고 눈이 맑았다. 놀랍게도 처음 볼 때보다 나이가 덜 들어 보였다. 벽에는 손녀딸 사진 말고도 많은 게 붙어 있었다. 그중 천정 바로 밑에 부친 "개업 50주년. 1970년 9월 9일~ 2020. 9.9"라는 현수막이 인상적이었다. "가게를 여신지 50년이나 되셨어요?" "저건 몇 년 전 거지. 지금은 52년 됐어. 전에는 가게가 더 컸지. 그런데 저기 길이 나서 좀 줄었지." "안쪽으로 길이 있다고요?" "가봐요." 여주인이 가리키는 대로 가게 안쪽으로 들어갔다. 마치 가운데가 불룩한 호리병 모양으로 가게 입구는 길고 좁은데 한쪽에 떡 만드는 기계와 반대편에 참기름 짜는 기계를 지나가면 중간에 꽤 넓은 공간이 나오고 다시 입구만큼 좁은 공간을 지나면 큰길과 연결됐다. 중간 넓은 공간에는 대형 냉동고와 여러 가지 물건이 쌓여있고 가운데 상이 보이고 그 위에 반찬통 여러 개가 보였다. 주인 남자는 식사를 하다 나를 보며 어리둥절한 표정을 지었다. “가게가 안쪽으로 더 넓고 50년이 넘었다고 해서 구경하고 있어요.” “시장이 처음 생길 때부터 있었지. 그때 함께 시작한 사람 중에 나 말고 남아 있는 사람은 한 사람밖에 없어.” "어릴 때 할머니 따라 시장에 갔던 기억이 좋아서 재래시장에 오면 왠지 정다워요." 내가 오래된 가게에 감탄하고 있다는 걸 알았는지 주인아저씨는 곡식을 저장한다는 거대한 냉장고도 열어서 보여줬다. 커다란 마대자루가 벽을 따라 놓여 있었고 투명한 자루에는 마른 고추가 보였다. 떡 만드는 기계와 참기름 짜는 기계를 찍어도 되냐고 물었더니 가게를 열 때부터 있었던 기계라며 자랑스럽게 바라봤다.


가게 구경을 마치고 밴치로 돌아오니 주인 여자보다 조금 젊어 보이는 아주머니가 밴치 한쪽 끝을 차지하고 주인 여자에게 "언니"라고 불렀다. 다른 가게 주인이 잠시 놀러 왔다고 생각했다. 주인 여자는 나를 보자 자리에 앉으라며 놀러 온 여자에게서 떨어져 앉았다. 그래서 우리는 좁은 밴치에 나란히 앉았다. 미닫이 유리문 바로 옆에 놓인 밴치는 유리문을 열면 찬 바람이 들어왔지만 전기장판 덕분에 엉덩이가 따뜻한 게 좋았다. 다시 오디오붘을 들으려고 이어폰을 끼려 하는데 놀러 온 여자가 말을 시작했다. "우리 언니 참 곱죠? 염색도 안 했는데 흰머리가 하나도 없어." "네 그렇네요." 아닌 게 아니라 주인아주머니는 정수리 부분에만 흰머리가 조금 보이고 머릿결은 자연스러운 광택이 났다. 놀러 온 여자는 본인 머리도 염색을 안 했다고 했지만 그건 사실이 아닌 것 같았다. "아가씨 염색했죠?" 놀러 온 여자가 물었다. 처음 보는 사람에게 듣기 좋으라고 그렇게 부른 것 같다. "네. 그런데 저 나이 많아요. 손자도 있어요." 그러자 주인아주머니가 물었다. "일해요?" "네. 학교에서 가르쳐요.” 다시 놀러 온 여자가 물었다. "신랑은 뭐해요?" "신랑도 대학에서 가르쳐요." 그러자 놀러 온 여자가 자신의 이야기를 시작했다. 46세에 과부가 되어 온갖 고생을 다하며 3자녀를 키웠고 지금은 자식들이 서울로 데리고 와서 함께 사는데 언니 가게가 가까워 놀러 올 수 있어서 좋다고 했다. "아들은 엄마 고생했다고 용돈을 잘 챙겨 주는데 딸은 가끔 줘." "모두 효자 효녀네요. 저와 제 친구들은 용돈은 고사하고 부모에게 용돈을 달라고 하지 않는 것만 해도 다행이라고 생각하는데." "그런데 몇 살이에요?" 내가 머뭇거리자 주인아주머니는 "말 안 해주면 저 사람 궁금해서 오늘 잠 못 자요."라고 했다. "저 xx생이예요.” “그렇게 말하면 저 사람 몰라요. 그냥 나이를 말해야지." "xx세입니다.” 놀러 온 여자는 마스크를 내려 화장기 없는 얼굴을 내밀었다. "우리 아이들이 40인데 나도 고생한 것치곤 얼굴이 괜찮죠?” “네. 피부 좋으세요.”


30분 정도 앉아 있던 여인이 떠나고 주인아주머니에게 동생도 가게를 운영하냐고 물었더니 친동생이 아니라고 했다. 나도 처음에는 친동생이 아니라고 생각했지만 주인아주머니에 대해 이야기하는 거나 주인아저씨를 대하는 태도가 마치 가족 같아 그렇게 생각하게 된 것 같다. 주인아주머니는 9남매의 장녀라고 했다. 잠깐 동안 아주머니와 티브이를 보며 친해진 느낌이 들었다. 가게에 놓인 13인치 티브이는 20년은 족히 넘은 것 같았다. 주인아저씨는 화면이 잘 나온다며 교육방송 여행 프로그램이 볼만하다고 틀어줬다. 생각보다 가게에 손님도 제법 왔다. 고춧가루도 사고 팥도 사고 참기름도 사갔다. 주인아주머니는 티브이를 보면서도 팥을 골랐다. 그리고 손님이 올 때마다 자리에서 일어나 손님을 맞았다. 가게를 지나며 인사하는 사람도 있었다. 좌식용 바퀴 달린 장바구니에 의지해 천천히 걸어가는 어르신들. 아마도 매일 운동삼아 시장에 나올 것 같았다. 손님 중 한 사람이 5000천 원어치 참깨를 구매하며 간이 영수증을 요구했다. 주인아주머니는 내게 빈 영수증 한 장과 펜을 줬다. “써드릴까요?” 아주머니가 고개를 끄떡였다.


드디어 참기름이 나왔다. 아저씨는 참기름병 아래쪽 반을 신문지로 감싸았다. 총 10병 반이 나왔다. 참기름이 따뜻했다. 부부는 다음에 참기름 짤 일이 있으면 꼭 전화하고 오라며 명함을 건네주었다. 내년에도 참깨가 생기면 짜러 오겠다고 약속했다. 참기름을 들고 뒷문으로 나오니 벌써 해가 저물었다. 남편 차를 타고 집으로 돌아오며 저녁 메뉴를 정했다. "오늘 저녁은 비빔밥 먹지?" "좋아요. 참기름을 짰으니까 집에 있는 채소 넣고 비빔밥 해 먹죠." 보통 때 외출을 하고 오면 피곤해서 아무것도 하기 싫은데 참기름 먹을 생각에 후다닥 집에 있던 콩나물을 데쳐서 나물을 만들고 호박과 파프리카를 볶았다. 그리고 달걀 프라이를 만들어 뚝딱 간단 비빔밥을 만들었다. 참기름을 듬뿍 넣은 비빔밥으로 만족스럽게 배를 채우고 지인들에게 고소한 참기름을 나눠줄 생각에 마음이 즐거워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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