엄마를 생각하며 여행을 계획하다 보니 문득 엄마의 엄마인 외할머니가 떠올랐다. 그러고 보니 최근 엄마는 외할머니와 함께 서울 결혼식에 다녀왔다. 그곳에서 엄마는 예상치 못한 만남들로 할머니의 80세 생신을 고민했다.
예상치 못한 만남이라는 건 그렇다. 그 결혼식에서 마침 할머니와 똑같이 올해 80세를 맞이한 사람이 있었고, 자녀들이 해외여행을 보내주었고, 그 여행은 오랜만에 만나는 지인들이 있는 결혼식에서 할만한 자랑이자 이야기였다. 그리고 마침 그 자리에는 올해 80세를 맞이한 외할머니가 있었고, 하필이면 집안의 장녀인 엄마가 함께 그 자리에 있었다.
그 만남은 엄마에게 고민거리를 던져주었다. 그렇게 결혼식 일주일 뒤, 엄마는 비장하게 가족들에게 10월 휴가를 선언했다. 엄마의 선언은 무려 7월. 10월의 휴가 일정을 7월부터 이야기 한 엄마의 단호함에 항상 일정을 알 수 없다 버릇처럼 말하는 아빠조차 ‘휴가를 신청해야겠네’ 라며 혼잣말을 중얼거렸다. 아빠의 혼잣말에 순간 머릿속을 스쳐 가는 생각.
‘할머니와 같이 갈까?’
나는 작년 사촌언니와 이모가 함께 간 남해 여행을 복기했다. 엄마는 덤덤한 척했지만 그 여행을 참 좋아했다. 물론 사촌언니와 내가 할머니와 함께 여행을 준비하고 계획했다는 것에 대해 딸에 대한 자랑스러움도 있었겠지만, 사실 엄마는 엄마의 엄마와 약간 먼 곳으로 여행을 간다는 사실을 더 기뻐했었다.
그 사실을 눈으로 확인하는 방법은 간단했다. 엄마는 여행 전날 마트에 가 할머니가 좋아하는 과일과 과자들을 정말 한가득 사 왔기 때문이다. 장바구니에서 엄마의 즐거움과 외할머니에 대한 마음이 읽혔다. 하지만 나는 엄마의 장바구니의 마음을 애써 모르는 척 이마를 짚으며 사촌언니에게 이 소식을 전했고, 언니 또한 이모와 같이 나랑 같은 상황이라는 대답에 우리는 깔깔 웃을 수밖에 없었다.
웃음과는 별개로 사촌언니와 나는 이모와 엄마의 장바구니를 최대한 반려시켰다. 언니와 내가 엄마들의 장바구니를 반려한 이유는 너무 당연했다. 우리의 여행기간 동안 엄마가 가족인 ‘엄마’로서 노동하는 시간이 없기를 바랐기 때문이다. 언니도 나도 지금까지 엄마의 역할로 살아온 할머니와 우리의 엄마들이 이 여행만큼은 그냥 여행을 즐기는 여자이길 바랐 던 것 같다. 그게 언니와 내가 펜션이 아닌 호텔을 예약한 이유기도 했다. 우리는 우리가 사랑하는 사람들이 여행 내내 편하고 그날만큼은 여유를 즐기고 누릴 수 있기를 바랐기 때문이다.
그렇게 우린 엄마들의 장바구니를 멈추는 것에 성공했음에도 여행당일 할머니의 장바구니는 막지 못했다. 그 이유도 간단했다. 우리의 엄마들이 할머니의 장바구니만큼은 반려를 완강히 거부했기 때문이다. 그래서 우리는 결국 과일과 떡, 에너지 음료수까지 들어있는 할머니의 장바구니와 함께 여행을 시작했다.
그리고 그 여행 중 내가 엄마의 흘러간 시간을 깨달았듯이, 엄마들도 여행 내내 엄마의 엄마인 할머니의 흘러간 시간을 신경 쓰고 있었다. 엄마는 나처럼 엄마의 엄마에게 있던 시간들이 그냥 흘러간 것에 속이 쓰렸을 테지. 그렇게 내가 엄마를 사랑한다고 생각하듯 엄마들도 엄마인 외할머니를 사랑하고 있는 건 너무나 당연한 이치였다.
물론, 그렇다고 내가 할머니를 사랑하지 않는 것은 아니지만 엄마와 딸은 다르니 분명 나와 같지만 다른 감정일 것이다. 명확하게 말로 설명할 수는 없지만 나는 알 수 있다.
그게 31년간 딸로 살아온 사람의 입장에서 이야기할 수 있는 딸과 엄마의 사이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