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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토보이 Dec 13. 2023

단발병 치료(?)해주는 미용실

미용실 후기


사는 곳이 바뀌면 연이어 바뀌는 것들이 참 많다.

아프면 가는 병원, 즐겨찾는 맛집, 때 되면 가줘야 하는 미용실 등이 그런데…

이사 후 일년. 나의 경우 지금까지도 정착하지 못하고 떠도는 데가 미용실이다.

병원은 맘까페 서치로 알아내고, 맛집은 이곳저곳 다녀 보면서 나만의 단골집을 찾는 재미가 있어 나름 즐기는 중이지만, 미용실 찾기는 여전히 까다롭고 어렵다.  

머리카락은 한 번 손대면 최소 몇 달은 돌이킬 방법이 없는데다, 미용실에 간다는 건 단순히 머리카락을 자르는 걸 떠나 기분전환 겸 심기일전의 계기를 마련코자 함이니, 웬만하면 실패하고 싶지 않아서인데...

여기다 가격도 합리적이면서 친절하기까지 하면... 그런데 사실 그런 덴 없다.

그래서 그 전 살던 동네에서도 여기서도 나는 흔히들 말하는 "미용실 유목민"이다.

이렇게 찾다 내가 주로 가는 곳들은 오픈(혹은 첫 방문)할인 행사를 하는 미용실들.

혹여 펌이라도 하게 되면 터무니없는 가격을 지불할 확률이라도 좀 줄여보자는 차원에서인데.

그러다 보니 나는 오픈하는 미용실만 골라 다니는, 어디도 첫 방문만 하는 미용실 유목민이 됐다.  

그나마 다행인 건, 긴 머리에다 어차피 펌을 해봐야 잘 나오는 머리도 아니고 해서 요 몇 년은 그닥 머리에 신경쓸 일이 없었다는 건데...

 

그런데 이사를 오고, 한 살 더 먹고, 별안간 몹쓸 단발병이 도졌다.

송혜교, 고준희, 아이유 등 단발병 유발 연예인들 때문이라면 최양락, 정형돈 등 단발병 퇴치 연예인들로 물리치면 되지만, 내가 단발병이 도진 건 순전히 나이 탓이다.

40대가 되고부터 부쩍 심해진 탈모에 긴머리가 도저히 감당이 안된다.   

짧은 머리카락보다 두 배는 더 많아 보이는 긴 머리카락들. 온 집안 사방팔방이 내 머리카락들 천지다.

줍고 돌아서면 또 보인다. 샤워 후 수챗구멍을 꽉 메운 머리카락들을 집어낼 때마다 허리도 아프고 한 숨도 절로 나온다.

그리고 왠지 모르게 40대가 되고부턴 긴머리, 그것도 생머리는 어쩐지 중년 여성에겐 좀 어울리지 않는다는 생각도 하게 됐는데... (이래서 엄마들이 뽀글이 파마를 하는 건가)

어디선가 보니 머리가 길고 무거우면 탈모도 더 심해진다고.

그래서 이참에 나도 뽀글이 파마까진 아니지만, 겸사겸사 40대 송혜교가 되어 볼까 하고 미용실을 찾게 됐는데...


내가 찾은 곳은 맘카페에서 커트 잘 하기로 유명한 동네 어느 미용실.

예약을 하고 시간에 맞춰 가니, 50대 초반쯤으로 보이는 웬 아저씨가 반갑게 나를 맞았다.

물론 젊은 사람만 최신 트렌드에 밝고 스타일링을 잘 하란 법은 없지만, 나도 모르게 의구심이 드는 건 어쩔 수 없었다. '과연 50대 아저씨 손에서 송혜교 단발이 나올까?'

그런데 이걸 알아차리기라도 한 듯, 애초에 싹부터 자르는 원장님.

“단발이요? 사실 그건 얼굴 작고 늘씬한 사람들이나 어울려요."

그 말인즉 나는 얼굴 크고 안 늘씬한 사람이란 말이지? 그러니 미용사한테 바라지 말고, 니 얼굴 탓을 해라?

“저 그럼, 웨이브 펌을 하면 어떨까요?“

“하, 그럼 더 뚱뚱하고 나이 들어보이죠.“

 뚱뚱하고... 윽,  이건 누가 봐도 확인 사살이다.

“그러면 저는 어떤 스타일이…"

“그냥 저한테 맡겨 보세요. 잘 해드릴게요!“

그 직후 좀 전의 이발소 아저씨는 온데간데 없고 가위손이 접신한 것마냥 가위를 휘날리며 머리를 자르기 시작한 원장님.  

중간중간 디자이너의 영감이 어쩌고 저쩌고... 스몰토크도 잊지 않고 하면서, 약 40여 분을 작업에 몰두한 끝에 나의 머리를 완성했다.

한 눈에 봐도 딱 보이는 저 흰머리와 어좁이. 뒤통수에 눈이 안달린 게 얼마나 다행인지 모르겠다.

짜잔!!!

이건 분명 뒷모습 사진이지만, 앞모습 같기도 한 이 느낌!

눈, 코, 입 뭐 하나도 안 보이는 뒷모습이지만, 어쩐지 뒤통수만 봐도 얼굴이 그려지는 머리스타일이랄까?!

이렇게 말하면 좀 웃기겠지만, 나는 이게 그저 나 같아서 마음에 들었다. (이 뒷모습을 보고 송혜교를 떠올릴 사람은 세상 천지 한 명도 없겠지. 푸하하하)

"마음에 들어요. 펌을 안했는데도 이런 머리가 되네요."

사실 그랬다. 오늘 한정일만정, 머리가 멋대로 나대지 않는 것만으로도 나는 너무 만족했다.

그런데 이 원장님, 느닷없이...

"고객님 미모가 받쳐주니까, 머리도 이뻐 보이는 거죠."

갑자기 낯 뜨겁게???  

"어머 원장님 영업을 참 잘 하시네요.

영업인줄 알면서도 괜히 기분이 좋았다. 그런데,

"하하하, 들켰나요?"  

“아… 네…“

흑, 영업인줄 알면 그냥 듣고 말 걸. 왜 그걸 굳이 말로 해서 나는 절반도 못건졌을까!


원장님 애초에 미모 언급을 하지 말던가요. 안하느니만 못합니다!!!

  

말투는 상냥하기 그지 없으나, 워딩 자체만 놓고 보면 직설화법, 팩트폭격으로 나를 두 번 세 번 죽인 원장님.

덕분에 단발병은 무사히 완치 됐습니다.

그런데 주제 넘게 한 말씀만 좀 드리자면요, 커트는 잘 하시지만 말씀 하시는 건 좀 더 배우셔야 할 것 같아요;;;


이상 미용실 유목민이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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