라떼는 말이야...
이름 대신 토보이라는 요원명(필명 아님 주의)을 달고 글을 쓰고 있는, 숨길 것도 많고 켕기는 것도 많은 여자 <토보이> 입니다.
좀처럼 어디 소개되거나 노출된 적 없고, 그러니 스스로 알리지 않으면 아무도 알 수 없는 글을 쓰면서도, 혹 남편이나 시댁 식구, 아는 사람들이 제 글을 볼까 저는 늘 조마조마 해요. 그래서 나는 토보이, 주변 사람들은 늘 A 아니면 B (이니셜도 안돼요)로 위장해 글을 쓰고 있는데...
아, 사실은 얼마 전에 제가 썼던 글 <그에게서 "잘 지내니?" 카톡이 왔다>도 당사자인 "그"가 어디선가 본 건 아닐까 심히 의심스러워요. 그런 게 아니라면, 다음 주초가 좋을 것 같다고 말했던 그가 연말이 다 되어가고 있는 지금까지도 연락이 없을리가 없는데...
하하하! 이건 그냥 제 마음 속 망상이구요,
참참참! 그런데 그 글 말미에 그에게서 연락이 와도 보지 않겠다고 했던 건 제가 아니라 요원 토보이 입니다.
저는 내심 그의 연락을 기다리고 있어요. 막상 연락이 오면 망설여질지도 모르겠지만, 다시 연락이 오고 약속을 잡는 상상을 요즘도 가끔 한 번씩 해봐요. 그러면 살짝 설레이기도 하구요. 버젓이 남편까지 둔 여자가 대체 이게 무슨 일이랍니까!!!
그런데 오늘 하려는 얘기는 그건 아니구요, 다시 본론으로 돌아오면...
이런저런 위장술에도 눈치가 좀 빠른 분들은 이미 아셨겠지만, 네 그래요. 저는 전직 영화판 종사자 입니다.
처음 시작은 촬영 현장의 스크립터였구요, 두 작품을 거친 후엔 시나리오 작가로 전향해, 약 이 십여 년을 영화판을 맴돌았어요.
이 십 년이라곤 해도 이중 절반 이상은 백수였고 현재도 백수... 그렇지만 저는 작품의뢰가 들어오거나 제 작품이 간택을 당하면 일을 안할 이유가 전혀 없기에, 여전히 스스로는 활동 중인 작가라고 생각... 만 해요. 어디 가서 말은 못해요;
그런데 요 얼마 전, 파트는 달랐지만 예전 영화 현장에서 함께 일했던 동료 한 명이 이런 말을 하더군요.
"언니, 요즘 진짜 한국 영화 어려워."
"왜? OTT 때문에?"
"그것도 그렇고, 예전처럼 되는 영화가 없잖아. 그러니 투자 줄어 제작 편수도 줄어, 들어가는 영화가 없어."
"그럼 점점 더 일자리 없는 스텝들이 자기 몸값 낮춰가며 작품 하겠구나."
"맞아. 제작사들도 판 쪼그라들면 제일 먼저 하는 게 스텝들 인건비 줄이는 거잖아. 그래도 들어가는 영화가 잘 없으니, 스텝들은 하겠다고 난리고. 아마 까딱 잘못하다간 예전처럼 되돌아갈지도 몰라. 기억 안 나? 우리 때 돈 못받고 일해도 경험이니 뭐니 그랬던 거"
그러니 예전으로 퇴행하지 않으려면 간만에 잘 되는 영화 <서울의 봄>을 우리같은 사람들이 두 번 세 번, N차 관람을 해줘야 한다는 게 동료의 결론이었는데...
그 바람에 전 느닷없이 경험 삼아 영화 현장 일에 뛰어 들었던 저의 20대 때가 떠올랐어요.
동료 말이 맞아요. 이 판은 신기한 게 돈보다 꿈을 쫓는 사람들이 많아서, 꿈을 담보로 돈을 흥정하는 사람들도 참 많아요. 지금은 한국 영화가 무시할 수 없는 산업으로 발전해 체계도 잡히고 스텝들의 처우도 많이 개선됐다곤 하지만, 적어도 그 시절엔 그랬어요.
작가나 감독이 되고 싶다고 하면 주로 하는 얘기가, "그래? 그럼 일단 내 밑에서 일해 볼래?" "계약? 곧 투자 될 거니까 조금만 기다려줘." 투자가 되고 나면, "이게 버젯이 워낙 작은 영화라 이것밖에 못 줘. 미안해. 이번엔 경험이다 생각하고, 다음에 할 때 제대로 줄게." 등등...
저 역시 마찬가지였답니다. 시나리오 작가를 꿈꿨으나, 우연한 기회에 학교 선배가 작가가 되려면 현장 경험부터 해보는 게 좋지 않겠냐고 해서, 현장 스크립터가 되었어요. 그리고 2000년 대 초반 첫 영화였던 작품을 저는 스물 세 살 1월에 시작해 스물 다섯 살 7월까지 했습니다. 군복무 마냥 꽉 채운 30개월 동안 제가 받은 돈은 총 600만원. 그것도 초반 2년은 무임금으로 지내다, 투자와 캐스팅이 이뤄지면서 촬영 임박 시점에 받은 돈이었구요.
지금 생각하면 말도 안되는 거죠. 그래도 번번이 작품이 엎어져 돈도 못받고 크레딧도 얻지 못하는 다른 동료들에 비하면, 햇수로 3년을 버틴 끝에 몸담았던 작품이 극장에도 걸리고 흥행에도 성공한 저는 (그 당시 기준으론) 꽤 운이 좋은 편이었어요.
그리고 저는 그 작품을 통해 뭣보다 값진 경험과 추억을 얻었습니다. 스텝으로 참여한 첫 작품이 잘 된 덕에 다음 작품도 이어서 할 수 있었고, 어쨌든 영화판이란 곳에 발을 딛을 수 있었으니까요.
그리고 지금도 한 번씩 되돌아보면, 저는 그 시절 영화를 찍었던 몇 개월이 제 인생에서 가장 즐거웠던 순간이었던 것 같아요. 그때만큼 제가 활발하고 유쾌하게 일했던 때가 또 없거든요.
그때는 현장 막내로 욕도 많이 먹었지만 이쁨도 많이 받았고, 밤낮 없이 일했지만 밤낮 없이 사람들이랑 어울리기도 해, 뭔가 일상이 북적북적 꽉꽉 채워진 느낌이었달까요. (아, 그립습니다!)
뭐 물론 땡볕에 촬영하느라 얼굴이 새까맣게 타거나, 추운 날 밤샘 촬영을 하느라 손발이 꽁꽁 얼기도 하고, 촬영 후 잦은 술자리에 살이 부쩍 찌기도 했지만... 얼굴이 도로 하얘지고 살이 쪘다 빠졌다를 몇 번이고 반복해도 지금껏 변하지 않는 것들은 역시 그때의 추억들 입니다. 지금도 한 번씩 떠올려 보면 입가에 미소가 지어져요.
몇 가지 이야기를 해 보자면...
저는 뭣 모르고 시작한 일이라 스크립터의 주된 임무가 현장 녹화란 걸 전혀 알지 못했어요. (프리 프로덕션을 2년 넘게 하면서도, 그걸 알려준 사람이 없었다는 게 지금 생각하면 더 신기하지만요)
지금이야 모든 게 다 디지털화 돼 필름에 담기는 건 모조리 노트북에 저장해 돌려볼 수 있지만, 당시엔 스크립터가 모니터와 비디오데크를 현장에 옮겨다 놓고 그걸 녹화해서 돌려봤거든요. 그러니 스크립터가 늘 휴대해야 할 필수품 중 하나는 VHS 공테잎.
그런데 저는 첫 작품 당시 이 사실을 모른채, 빈 손으로 테스트 촬영장에 갔어요. 말하자면 군인이 총도 챙기지 않고 전쟁터에 나간 셈이죠.
그리고 이 사실을 뒤늦게 안 저는 부랴부랴 제작부의 도움을 받아, 옆 세트 촬영장에 가 거기 계신 스크립터 분께 공테잎 하나를 빌려 테스트 촬영을 마무리했는데...
여담이지만 그때 제가 테잎을 빌리러 간 현장이 <살인의 추억> 현장이었습니다.
그런가 하면 촬영이 끝나갈 무렵엔 반대로 긴장이 풀리고 여유가 생겨 또 다른 실수를 한 번 더 저질렀는데요, 때는 그 해 겨울. 최강 한파가 몰려온 어느 날 야외 씬을 찍던 인천 어디였어요.
늦은 밤 발전차가 현장에 와 여러 대의 조명을 밝히고 촬영에 한창이었는데, 조금이라도 덜 추워보겠다고 백화점 사은품으로 받은 휴대용 난로를 들고 다니던 저는 그 난로를 남아도는 플러그에다 딱 꽂았어요.
그 순간 발전차가 퍼져버리면서 현장에 있던 모든 조명들이 죄다 OFF... 네. 제 탓에 잘 나가던 촬영이 갑자기 중단 됐습니다.
그리고 저는 안 그래도 욕을 찰지게 잘하기로 유명했던 조명 감독님께, 세상 욕이란 욕은 다 들어먹었어요. 그리고 라면도 먹었죠. 어차피 발전차가 다시 올 때까진 촬영도 할 수 없는 상태. 기왕 이렇게 된 거 야식 타임이라도 갖자고 해서, 전 스텝이 근처 분식집을 빌려 그곳에서 몸도 녹이고 배도 채웠거든요.
그때는 정말이지 등에 땀이 나고 눈물이 쏙 빠질만큼 아찔했건만, 지금은 그때 들었던 그 찰진 욕조차 눈물이 날만큼 그립기만 합니다. (조명감독님, 안녕하신가요?)
그리고 저는 또 한 번의 짝사랑을 했어요. 허리에 각종 장비가 든 힙색을 두르고 무거운 카메라를 어깨에 짊어진 채 현장을 누비는 촬영팀 세컨 오빠는 사실 누가 봐도 멋져요. 사랑에 빠지기 딱 좋죠.
그 때문일까 저는 힙색과 카메라를 짊어진 어깨에 홀려, 작품마다 촬영팀 세컨만 콕 찝어 짝사랑을 하기도 했는데...
촬영이 끝나면 이어지는 회식 자리. 일과 놀이의 경계가 모호하고, 짝사랑 하는 남자가 있었던 그곳. 어찌 즐겁지 않을 수가 있었겠어요!
현실에선 종종 소개팅이나 맞선 자리 (엄마의 성화에 20대 중반부터 종종 맞선 자리에 나갔거든요. 그런데도 결혼은 마흔이 다 돼서 했구요)에 나가면, "영화일 힘들지 않으세요? 돈도 못받고 힘들다던데..." 아니면 "연예인 많이 보시겠네요? 누구누구 봤어요?" 같은 시시한 질문이나 받았지만, 비현실... 아니 현장에서의 저는 남들이 그러거나 말거나, 높은 자존감과 행복감에 하루하루가 즐겁기만 했습니다.
돈은 없어도 영화 현장엔 꿈을 함께 나누는 동료가 있고, 그들과 함께 하는 협업의 보람은 다른 결핍을 채우기에 충분했거든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영화를 계속 할 수 없게 만드는 건, 결국 돈이긴 합니다)
그런데 현재도 현장에 남아있는 동료들에게 듣자하니, 요즘은 좀 예전같진 않은 모양이더라구요.
표준근로 계약을 하고, 정해진 시간 내에 촬영을 마치고, 회식은 고사와 쫑파티 딱 두 번. 출퇴근과 업무 분담도 확실해서 파트가 뒤섞여 노는 일 같은 건 그 전처럼은 잘 없다고 해요. (원래 있어선 절대 안되는 촬영 지연, 밤샘 촬영... 같은 게 스텝들을 좀 가까워지게 하긴 합니다)
그렇지만 그 덕에 한국 영화는 전 세계 어딜 가도 부끄럽지 않을만큼 성장했고, 스텝들은 합당한 대우를 받으며 전문가로 인정받기 시작했으니, 역시 모든 일엔 장단이 있기 마련인가봐요.
결론은...
저는 그저 그 시절 한국영화판에 약간의 추억이 남아있는 옛날 사람일 뿐이에요. 그리고 지금의 한국 영화 침체가 그 시절 주먹구구식 도제 시스템을 다시 불러올까, 사실은 후배들이 걱정스러운 선배이구요.
정당한 대우를 받지 못하고 키우는 꿈은 절대 오래가지 못해요. 꿈에 돈을 결부시키면 속물 취급하는 사람, 대개는 내 꿈을 담보로 나에게 노동을 착취할 사람이라고 보면 돼요. 돈을 벌어야 꿈도 꿉니다.
저는 부디 지금 영화 현장에서 일하는 후배들이 정당한 대우를 받으며 좋은 토대 위에서 자신의 능력을 맘껏 발휘할 수 있었으면 좋겠어요. 그런 가운데 성취감도 느끼고 협업의 즐거움도 맛보면, 영화는 당연히 좋아질 수 밖에 없겠죠. 이거야말로 훌륭한 선순환이 아니고 뭐겠어요!
그러기 위해선 뭐다?!
극장으로 가야 합니다. 잘 만든 영화는 반드시 극장에서 봐야 해요!
저 역시 두 번 세 번 후배들을 돈쭐 내어 주는 걸로 그들의 꿈을 응원하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