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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토보이 Mar 13. 2024

폐경 진단 받고 D+5

폐경 까짓 거 뭐!

늦잠을 늘어지게 자도 모자란 휴일 아침. 이렇게나 일찍 컴퓨터 앞에 앉아 자판을 두드리고 있는 이유.

올 것이 와 버렸다.




지난 화요일. 작년 가을 이후 끊겨 버린 생리 걱정에 산부인과를 다녀왔다.

전 같으면 혹시나 임신일까 싶은 생각에 임신테스트기부터 해봤겠지만, 반반이던 폐경과 임신의 가능성이 최근 들어선 약 7:3으로 기운 것 같아 그조차 안하고 지낸 지 3,4개월...

그런데 웬걸! 10:0 폐경의 완승이었다.


"아오. 이 정도면 그냥 폐경이라고 봐야겠는데요?"


산부인과 진료를 보기 시작한 이래, 처음 마주한 남자 의사(선생님)가 이렇게 말했다.  


“곧 폐경도 아니고, 이미 폐경이 왔다구요?“


사실 이날 나는 굳이 이런 말을 듣지 않아도 됐다. 산부인과에 꼭 가려던 것도 아니요, 그러니 진료 예약 같은 건 처음부터 없었고, 굳이 내 발로 찾아가지 않았더라면 폐경 진단 같은 건 듣지 않았을지도 모른다. 그러면 지금도 여전히 나는 폐경 여성이 아닌 생리불순의 여성이었을텐데...  

대체 무슨 바람이 불어 나는 나의 폐경 진단을 앞당겨 확인하려 했던 걸까.


세탁과 청소를 마치고 부랴부랴 집을 나선 게 오후 5시 20분경이다. 진료 마감이 임박한 시간이라 다니던 병원에 전화부터 했는데 역시나 "죄송합니다. 오늘 진료 접수는 마감 됐구요. 내일 다시 내원해주세요."

그러면 그냥 어디 들러 커피나 한 잔 하고 집에나 갈 것이지, 굳이 나는 근처 다른 병원을 찾았다.

그런데 아뿔싸. 접수대에 서서 병원 내부를 둘러보는데 진료실 앞 선생님의 이름이 OO훈.

"저 혹시 선생님이 남자 분이세요? 여자 선생님은 안 계세요?"

"네. 남자 분만 계세요."

산부인과 진료를 본 이래 남자 선생님은 처음이라 나도 모르게 멈칫, 그렇지만 그걸 핑계로 진료를 안 보고 돌아나오기도 뭣해 일단 접수를 했다. 그런데,

"저 근데 지금 선생님이 자리에 안 계세요. 금방 오실 건데 잠시 기다리시겠어요?"

그렇다. 나에겐 폐경 진단을 피할 기회가 몇 번이고 있었다. 이때 이거라도 핑계 삼아 뒤도 안돌아보고 나왔더라면 지금쯤 나는 어땠을까.

그런데 내가 접수를 이어가는 사이, 키가 정우성만한 할아버지 한 분이 크록스 슬리퍼를 신고 양손을 호주머니에 꽂은 채 병원 안으로 들어왔다. 속으로 나는 산부인과에 뜬금없이 웬 할아버지인가 싶어 의아했는데…

"아오. 정원장 수다가 괴로워지려던 참인데 마침 잘 됐네. 들어오시라고 해요."

그렇다. 그 분은 아랫층 병원에 마실을 갔다 전화를 받고 서둘러 올라온 의사 선생님이었다. 그리고 나는 난생 처음 마주한 남자 산부인과 전문의에게 나의 폐경을 선고받았다.   




아무렇지도 않게 폐경을 말한 할아버지(선생님)덕에, 올 것이 오고야 말았지만 진짜 나는 아무렇지도 않았다. 아니 며칠은 정말 그런 줄만 알았다.

"전부터 조금씩 각오했던 일이라 그냥 덤덤해. 사실 어떤 면에선 좀 홀가분하기도 하고."

제일 먼저 전화를 해 이 소식을 알린 엄마에게 나는 이렇게 말했다. 이제 여행을 앞두고 생리가 터질까 걱정할 일도 없고, 생리양이 늘어 외출 중 난감할 일도, 생리대를 매달 살 일도 없다며, 애써 폐경이 돼 좋은 점만 늘어놨는데... 그러고 있자니 살짝 내 스스로도 한결 가벼워지는 느낌이 들었다.

그래서였을까. 심지어 나는 퇴근해 들어온 남편에게는 호기롭게 이렇게까지 말했다. (엄마는 결혼 2,30년 차면 모를까 고작 8년 된 남편에겐 이 사실을 말하지 않는 게 좋겠다고 했지만, 나는 엄마가 그렇게 말했단 사실까지 더해 남편에게 나의 폐경 사실을 알렸고)

"사람들이 왜 폐경을 완경이라고 하는지 알겠어. 끝났다 닫혔다는 느낌보다는 뭔가 완료, 완수했다는 느낌? 나한테 상이라도 좀 줘야겠어. 이제 이걸 계기로 운동도 더 열심히 하고 활기차게 살아야 하니까, 나 머리 스타일도 좀 바꾸고 옷도 싹 다 개비할까봐." 평소 진심도 농담처럼 말하고 진지하거나 심각한 걸 극도로 꺼리는 남편인지라, 그도 대수롭지 않게 넘겨주리리라 확신했기 때문인데...

"오 좋은 생각이네. 이번에 받은 연말정산 환급금으로 옷이고 화장품이고 잔뜩 사.“

“야호!!!”


그런데 네이버 쿠폰을 다운받아 동네 미용실에서 한 펌이 망이 되면서부터, 기분이 급변했다.

축 처지는 생머리 단발이 촌스럽고 생기도 없어 보여 발랄하면서 개성도 넘치는 히피펌에 도전했는데, 결과는 그냥 뽀글이 펌을 한 아줌마. 누가 봐도 앳돼 보이고픈 욕망만 보이고 전혀 앳돼 보이진 않는, 도리어 안하니만 못한 머리가 되어 버렸다. 마치 머리가 '너는 곧 반백, 폐경 여성이니까 현실 부정같은 거 하지 말고 그냥 순응해.'라고 말하는 것만 같았다. 그러니 누굴 만나는 것도, 심지어 거울 속 나를 보는 것도 싫을 지경인데…


'좋아. 그럼 옷으로 한 번 만회해 볼까? 새 옷이라도 잔뜩 사서 산뜻하게 변신하면 기분이 좀 달라지겠지' 그러면서 한 외출 준비.

그런데 이번엔 옷장을 여는 순간 눈에 보이는 죄다 무채색 계열 바지와 헐렁한 스웨터, 미쉐린 패딩들이 다시 한 번 기분을 잡채로 만들어놨다. 누가 시켜서 입은 것도 아니요, 내가 좋아서 사고 편해서 입은 옷들인데, 옷들이 무슨 죄인가 싶으면서도...  

사실 나는 옷이 아니라 내 자신에게 화가 났다. 어느 때부턴가 치마는 거들떠 보지도 않고 악세서리는 거추장스러워 안 하고 화장도 기초만 대충 바르는 내가 한심하기 짝이 없었다. 더 어이가 없는 건, 전에는 내심 그런 것들이 Simple is the best 꾸안꾸를 추구하는 나만의 스타일이라며, 착각하고 만족하며 살았단 건데...

꾸안꾸는 개뿔. 초라하고 초라하고 또 초라한 중년 여성였을 뿐이다.


그런가하면 남편은 왜 또 그 모양인지.(마음의 소리)

처음엔 사실 별 일 아닌 듯, 대수롭지 않게 받아주는 남편이 고마웠다. 그런데 기분이 급변하고부턴 도리어 그게 섭섭하고, 섭섭하고, 또 섭섭했다. 죽네 사네 하는 일은 아니지만, 아무 일도 아닌 건 또 아닌 건데. 남편은 어쩜 그렇게 평소처럼 나를 대할까.

내가 이 건으로 인해 살짝 가라앉거나 우울해 할라치면,

"뭐야. 왜 분위기 잡고 그래. 그럴 거 없어. 나도 늙고 다 늙어. 늙는 걸 어떻게 그럼."

'하. 이게 할 소린가...'

내가 병원에서 권유받은 호르몬 치료를 시간을 두고 고민해 보겠다고 하자,

"아 왜 그걸 늦춰. 병원에서 안 좋은 걸 권할리도 없고, 먹으면 좋아진다는데 뭐가 문제야?"

'하. 이게 그렇게 쉽나...'

한 번 비틀리고 꼬여버린 나는 남편이 하는 모든 말이 다 자기 일이 아니라 쉽게 내뱉는 성의없는 말로들렸다.

예전엔 웬만한 일엔 잘 동요하지 않고 늘 평점심을 유지하는 남편이 좋았다. 어떤 일이 발생하면 감정적으로 잘 흔들리는 나와 달리, 늘 냉정하게 상황에 대처하는 남편이 든든하기도 했다.

그런데 한 번씩 나는 내가 주저앉아 울고싶을 때 남편은 옆에 와 조용히 안아 주는 사람이 아니라, 나를 주저앉지 못하게 잡아끌어 올리는 사람 같다는 생각이 든다. 내가 필요한 건 함께 울어주거나 위로를 해 줄 사람인데, 그 지점이 한 번씩 아쉽다. 오죽하면 몇해 전 유산을 했을 땐, 유산 사실을 알고 아내보다 더 많이 울었다는 남의 집 남자랑 남편을 바꾸고싶기까지 했는데…


그런 옛생각까지 하다 자려고 누운 침대 위에서 결국 나는 폭발해 버렸다.


"내 일 아니라고 쉽게 말하지 마. 치료하면 좋아지는 거 누가 모른대? 근데 나한테도 시간을 좀 줘야 할 거 아냐. 왜 난 감정적으로 힘든 것도 하면 안되는데?

내 주변에 누구도 나처럼 폐경 온 애 없어. 나는 결혼도 남들보다 늦게 했는데, 폐경은 빨리 왔다고. 나는 애도 못 낳았는데, 폐경까지 빨리 왔다고. 그런 내 기분을 오빠가 알기나 해?" ...


울면서 마구 쏟아내는 나를 그저 말없이 지켜보던 남편,


"진짜 내 마음 같은 건 모르는구나, 너는..."


그리곤 말없이 등을 돌려버린 남편은 그대로 잠이 들어버렸다.

그리고 남편과 달리 밤새 한 숨도 자지 못하고 뒤척이던 나는 새벽 5시가 넘어 컴퓨터 앞에 앉았는데...




그로부터 또 며칠이 지났다.

나는 점점 좋아지고 있다. 남편에게 쏟아내고 나니 속이 좀 시원해진 건지, 여기에 글로 풀어내고 나니

정리가 좀 된 건지는 확실치 않지만, 슬슬 기분이 추스려지고 있는 건 맞다.

여전히 길을 가다 비슷한 연령대의 여자를 보면 속으로 저 여자는 폐경이 왔을까 안왔을까 생각하고, 한 번씩 자기 연민에 빠져 슬퍼지기도 하지만, 나를

위한 선물이라며 쇼핑도 하고 맛난 것도 먹고 새로운 계획들을 세우기도 했다.

앞으론 생리 대신 호르몬제를 복용해야 하고 근감소와 골감소를 걱정하며 이전과는 좀 다른 삶을 살게 되겠지만, 그것만 빼면 사실 크게 달라진 건 없다.

공감과 위로에 서툴긴 해도 남편이 늘 내 곁에 있고, 불편한 게 좀 늘긴 했지만 여전히 건강엔 별 문제가 없다. 그러니 따지고보면 별 일이 아닌 것도 맞다.

이렇게 생각하니 기분도 그 전보다 많이 나아졌다.

조만간 호르몬치료도 적극적으로 받아볼 생각이다. 그러고나면 불편한 것들이 줄면서, 이전보다 좋은 일들도 많이 생겨나리라 믿는다.

일단 하나는 확실하다. 갱년기가 오면서 감정이 널을 뛰어 부쩍 는 우리 부부 싸움 횟수, 그건 확 줄지 않을까 싶다.

이건 여담이지만, 자기 스타일 고수에 천재인 남편. 그 날 돌아누워 10분만에 코를 골아놓곤, 그 다음날 아침에 내가 자기에게 폭언을 퍼붓는 꿈을 꿨다나 뭐라나. 남편은 늘 어이없는 걸로 나를 웃게 만드는 남자다. 그리고 나는 그런 남편을 여전히 사랑한다. 이 남자를 위해서라도 하루 빨리 치료를 받고, 이 시기를 잘 극복하리라 다짐해본다.


폐경 까짓 거 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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