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초초 Apr 13. 2023

차갑게 식은 닭가슴살 야채찜

냉랭한 분위기의 저녁식사

 나의 하루는 엄마를 기준으로 움직인다. 아침부터 시작해서 점심식사 시간과 산책시간, 저녁식사 시간, 발 마사지 시간까지. 건강한 음식을 먹는 것만큼 규칙적으로 생활하는 것도 중요하다. 그래서 되도록 식사시간과 산책시간을 정해놓고 움직인다. 하루의 마무리는 발 마사지로 끝난다. 항암치료는 말초신경을 무디게 만들기 때문에 손끝과 발끝의 감각이 떨어진다. 손끝은 지압봉으로도 충분하지만 발끝은 지압발판만으로는 부족해서 매일 10분씩 양쪽 발을 주물러준다. 게다가 최근에는 왼쪽 발이 붓기 시작해서 더 열심히 주무르고 있다. 다리가 붓는 것 또한 항암치료의 부작용이라고 한다.

 

 요즘은 전보다 엄마의 기상시간이 빨라져 아침은 아빠가 준비한다. 덕분에 아침잠을 좀 더 잘 수 있다. 그런데도 유난히 피곤할 때가 있다. 오늘이 그런 날이었다. 물을 잔뜩 먹은 솜처럼 몸이 무거웠다. 어제 너무 늦게 잔 탓이라고 여겼다. 점심을 먹고 뒷정리를 마친 다음 침대에 다시 누웠다. 저녁식사 시간은 5시 반에서 6시 사이로, 그 시간에 맞춰 먹으려면 늦어도 2시 반에는 산책을 나가야 하는데. 시계가 2시를 가리키는데도 움직일 생각이 들지 않았다. 그렇게 늦장을 부리다가 결국 3시 반이 되어서야 산책을 나가게 되었다.


 가기 싫은걸 억지로 나가는 사람 마냥 표정이 좋지 않았는지 엄마가 내 눈치를 봤다. 그게 느껴지는데도 표정이 풀어지지가 않았다. 이미 머릿속에서는 시간을 계산 중이었다. 2시간 정도 산책을 하면 5시 반은 될 테고 준비하는 시간을 생각하면 저녁시간이 6시를 넘게 된다. 배고프면 급격히 기력이 떨어지는 엄마인데 벌써부터 걱정되기 시작했다. 내 머릿속을 읽기라도 한 듯, 엄마가 말했다.


"저녁에는 간단하게 닭가슴살이랑 야채 쪄서 먹자."


 알겠다고 대답하며 집에 남아있는 야채를 얼른 떠올렸다. 집에 뭐가 있더라. 양배추, 당근, 가지, 감자, 양파. 여러 가지를 떠올렸다. 양배추, 가지, 당근이 닭가슴살과 제일 잘 어울릴 것 같았다.


  산책이 끝나고 집으로 돌아와서 옷도 갈아입지 않고 야채부터 손질했다. 마음이 급해져서 그런 건지 손이 자꾸 헛돌았다. 당근도 몇 번이나 떨어뜨리고 그릇도 떨어뜨렸다. 닭가슴살은 포장이 잘 안 벗겨졌다. 시계가 6시를 넘어가고 있었다. 오늘따라 굼뜬 손이 원망스러웠다. 생각보다 시간이 오래 걸리는 것 같았는지, 엄마가 부엌으로 왔다. 


"왜 이렇게 오래 걸려? 뭐 도와줘?"

"지금 너무 피곤해요. 거실에서 기다리세요."


 엄마가 재촉한다는 생각에 쏘아붙이듯 말을 뱉어 버렸다. 바로 후회할 거면서. 엄마는 가만히 나를 쳐다보다가 거실로 돌아갔다. 특별히 짜증이 날만한 말도 아니었는데 왜 그랬을까. 딴생각을 하며 칼질을 하다가 왼쪽 검지를 같이 썰어 버렸다. 다행히 피는 나지 않았지만, 검지 손톱이 잘렸다. 작은 조각으로 떨어져 나온 손톱이 나의 마음 같았다.

 


 6시 반이나 되어서야 음식이 완성되었다. 늦어서 죄송하다고 말하며 엄마와 함께 저녁을 먹었다. 저녁을 먹는 내내 엄마의 표정이 굳어 있었다. 아까 내가 했던 말 때문이겠지. 일부러 더 말을 걸었지만 단답의 대답만 돌아왔다. 엄마는 한마디 말도 하지 않았다. 분위기도 좋지 않은데 음식의 상태도 좋지 않았다. 당근은 너무 덜 익었고 가지는 물렀다. 요리에는 마음이 반영된다더니 진짜였구나. 엄마는 몇 입 먹더니 말없이 자리를 떴다. 안방으로 들어가는 뒷모습을 보며 한숨이 터져 나왔다. 근데 엄마, 오늘은 저도 좀 힘들어요. 머릿속의 푸념은 말이 되어 나오지 못했다.  


 저녁식사 뒷정리를 마치고 안방 앞에 섰다. 엄마의 발을 주물러주러 가야 하나 말아야 하나. 잠시 고민하다가 문을 열고 들어갔다. 들어가자마자 오늘은 발을 주물러주지 않아도 된다는 엄마의 말이 날아왔다. 그래도 침대에 걸터앉았다. 말없이 발을 주무르기 시작하고 몇 분이 지나자 엄마가 말을 꺼냈다.


"미안해. 엄마가 해야 되는데 몸이 잘 안 움직여."


 아니에요, 엄마. 제가 더 죄송해요. 아까 짜증 내는 게 아니었는데. 오늘따라 피곤해서 그랬어요. 하고 싶은 말이 이렇게나 많았는데 입에서 나오는 말은 한마디뿐이었다. '괜찮아요.' 피곤이 입까지 옮아버린 걸까. 발을 마저 주무르고 안방을 나섰다. 그래도 안녕히 주무시라는 말은 잊지 않았다.


 나도 알고 있다. 그래서 엄마의 몸을 대신해 끼니를 챙기고 필요한 것을 챙겨주기로 마음을 먹지 않았던가. 엄마는 나에게 항상 미안해하고 있고 고마워하고 있는데. 내일부터는 정신 차려야지. 엄마한테 퉁명스럽게 말하지 말아야지. 다짐을 하며 침대에 누웠지만 늦도록 잠이 오지를 않았다. 

작가의 이전글 봄나물 대잔치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