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직 해가 뜨지 않은 6시.
차 두대가 나란히 겨우 지나갈 수 있는 작은 골목은 외숙모와 사촌 여동생의 울음 소리로 가득찼다. 외숙모를 부축하고 있는 어머니의 눈에서도 끊임없이 눈물이 흘렀다. 내 볼을 타고 흐르는 눈물때문에 그들의 눈물을 닦아줄 여유가 없었다.
삼촌을 영원히 떠나 보내기 위해 화장장으로 향했다. 문막에 살 때 길이 확장되어, 추모공원의 입구가 생기는 것을 본 적이 있었는데, 그곳에 삼촌이 잠들게 될 줄은 몰랐다. 화장을 위해 운구차에서 관을 꺼냈다. 끝까지 삼촌의 시신이 있는 관을 잡고 눈물 흘리는 외숙모를 보니, 또 눈물이 흘렀다.
유족의 감정과는 별개로 화장장의 일은 신속하게 진행되었다. 불속으로 관은 들어가고 두 시간 가까운 시간 동안 시신은 재로 바뀔 것이었다. 하얀 가운을 입고, 재바르게 자신의 일을 하고 있는 젊은 남자가 원망스럽다가도 이 일이 그의 일상이라는 생각에 마음을 고쳐 먹는다.
시간이 흘러 삼촌의 이름이 호명되는 것을 듣고 내려갔다. 건장하던 신체가 한 줌의 재로 변한 것을 보니, 인생이 무상하다는 말이 허튼 말이 아니었음을 비로소 실감하였다.
삼촌이 세상에 남긴 흔적을 유골함에 담고 납골당으로 걸어갔다. 이미 앞선 많은 죽음들이 있었다. 자세히 보지는 못했지만 나보다도 어려 보이는 죽음들이 더러 보였다. 세상에 남겨진 사람들의 슬픔과는 무관하게 사진 속의 그들은 환하게 웃고 있었다.
전동 드라이버가 삼촌이 잠들 공간의 문을 열어 주었다. 모터가 회전하는 경박한 소음이 이별의 시간을 재촉하는 것 같았다. 네 귀퉁이의 나사가 고정되고 다시 문이 닫혔다. 이제 아프지 말고 편히 쉬라는 외숙모의 말이 다시 나를 울렸다. 나와 동생 둘다 말로 인사를 하지는 않았다. 입을 열면 더 많은 눈물이 나올 것 같아서였을 것이다. 그저 두손 모아 마음속으로 삼촌의 명복을 빌었다.
사촌 동생들, 외숙모와 인사를 나누고, 셋째 외삼촌이 자주 들르신다는 식당으로 갔다. 얼큰한 닭개장을 파는 곳이었다. 논 옆 외딴 곳의 식당, 맛이 있을 것이라고는 예상하기 힘든 가게의 외관과 간판을 지닌 곳이었다.
그러나 최근에 먹은 닭개장이라고는 ’청정원 호밍스 밀키트 닭개장‘ 밖에 없던 내게 기대 이상의 훌륭한 닭개장 맛을 보여준 곳이었다. 엄마도 한 술 뜨시더니 ”이 집 맛있게 잘하네. 내가 끓이는 것처럼 끓이잖아“ 하셨다. 이 집 음식맛 칭찬과 본인 셀프 칭찬을 동시에 하시는 솜씨 ㅎㅎ 고작 몇 번 눈물 쏟았다고, 진이 빠진 느낌이 들었는데, 밥 한 그릇을 비우니 다시 정신이 들었다. 떠난 사람을 생각하면 슬프고 안타깝지만, 남아있는 우리는 살아야 하니 어쩔 수 없었다.
입관할 때 사촌 여동생이 삼촌을 보내며 ”아빠, 나한테 너무 잘해줘서 고마웠어“라고 했다고, 엄마가 이야기했다. 사촌 동생의 마음을 알 것 같았다. 조카들에게도 이렇게 많은 정을 줬는데, 딸한테는 얼마나 애틋하게 잘 해줬을까. 내가 떠나면 나의 아이들은, 사람들은 어떤 이야기를 할까? 차를 몰고 집으로 가며 드는 생각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