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녕하세요. 그 동안 잘 지내셨지요?”
정부가 운영하는 일자리 센터를 찾았다.
이번이 두 번째 방문이다. 첫 방문은 실업급여 관련하여 상담을 하러 왔다. J는 당연히 실업급여가 가능한 것으로 생각했는데, B와 이야기 도중 수급 대상에 ‘자발적인 퇴직’은 해당되지 않는다는 것을 알았다.
그래서 부랴부랴 이곳에 와서 다급하게 물었다. 실업이면 똑같은 실업이지 자발적인 퇴사는 무엇이고 비자발적인 퇴사는 무엇인가? 퇴사를 하면 받는 게 실업급여려니 했는데 이 나이가 되도록 자발적인 퇴사나 비자발적인 퇴사에 대한 개념조차 모르고 있었다니 스스로가 한심했다.
먼저 자신이 퇴직의사를 전달했고 사직서도 제출했으니 원칙대로 한다면 구제 방법은 없었다. 예전처럼 그냥 회사에서 알아서 해주는 것으로 생각한 것이 오산이었다. 이것저것 설명을 듣다 보니 이해가 되었다. 차분한 퇴사준비에 대해 조언을 들었었고 다시 한 번 찾아 이야기를 나누고 싶었다.
사무실은 조용했다. 문을 열어 자리에 앉자 인사를 건넨다.
“가족하고 이야기는 해보셨는지요?”
“네. 조언해주신 대로 이것저것 정리하고 있어요. 제가 빨리 마음을 추스르고 퇴사 후 설계에 남은 시간을 활용하는 게 현재로서는 최선인 듯합니다. 아무 준비 없는 퇴사를 결정한 것 같아 힘들긴 해요. 아내가 이번 달 관리비나 이런 것들을 물어보니까 눈치를 챘는지 왜 그러냐고 묻더군요. 아내도 예상은 했었나 봐요. 저도 모르게 티를 내고 있었나 보지요.”
“책임감이 강하신 분들이 더 조심스럽죠. 물론 가족이 도와서 문제를 풀어나가면 좋겠지요. 도움이 필요한 시기가 있는데 무엇이 필요한지를 모르기도 합니다.”
“네에. 현재 상황이 새롭기도 하고 조바심도 나서 일단 겁이 납니다. 하지만 병은 알리는 게 중요하다고 주위의 사람과 털어놓고 친한 친구들에게 취직자리도 이야기하고 있어요.”
“뭐라고 하시던가요?”
“뭐, 각자 처한 사항에 따라 다르더군요. 아직 직장생활을 하는 친구는 ‘스트레스받는데 잘됐다. 좋은 일이 생길 거야’라고 위로하고, 일찍 퇴직한 친구들은 심각하게 걱정해주고 그러더군요.”
“네에. 결국 자신이 처한 맥락으로 해석하는 거죠. 그리고, 퇴사노트는 잘 쓰고 계신가요?”
“네. 말씀해 주신 그 물음에 대해 매일 아침마다 생각하고 고민하고 있어요. 많은 것들과 연결되어 고민거리를 던져주는 질문이더군요. 이런 고민을 예전에 했어야 하는데…”
“늦었다고 자책하지 마세요. 늦은 건 상대적인 기준에서 보는 거고, 준비가 없었다는 걸 뒤돌아보는 게 중요합니다. 재출발에서 늦고 빠른 건 결국 고민의 양만 조금 다를 뿐입니다. 직장에서도 자신에게 주어진 업무량의 많고 적음은 결국 자신이 그걸 어떻게 처리하느냐에 따라 결과는 달라지잖아요. 골인 지점이 같은 경주도 아니니까 늦었을 때 시작점에서 본질적인 고민을 하는 게 중요하다고 봅니다.”
J는 새로 구입한 신년도 다이어리를 펼쳐 덕지덕지 붙은 포스트잇과 일정표 그리고, 4가지 질문에 대해서 고민한 흔적을 보여주었다.
“선생님이 조언해주신 10년 후의 내 모습과 4가지 질문에 대해 지속적으로 스스로 답변하는 동안 많은 근본적인 고민이 집약되더군요. 결국 모든 사람이 고민하고 있는 범주인 돈과 일, 꿈을 포괄하더군요. 이 3가지가 잘 연결되어 생활한다면 행복하겠다는 생각이 들어요. 그러나 돈의 방향과 일에 대한 방향, 그리고 내가 진정 원하는 게 각자 따로 놀더라고요.”
“네, 잘 보셨습니다. 말씀하신 대로 그 질문은 돈, 일, 꿈에 대한 질문이죠. 처음에는 알지 못하더라도 그 3가지가 말씀하신 대로 궁극적으로 통합되고 적절할 때 그 상태가 궁극적으로 행복을 지향합니다. 먼저 돈 걱정이 가장 앞서죠. 일과 꿈 사이에는 현실적으로 돈이라는 게 있습니다. 하고 싶은 일을 하면서 돈 걱정 없이 살고 싶죠. 돈을 많이 벌어도 싫은 일을 해야 한다면 좋은 삶이 아닌 것 같구요. 꿈과 연결된 일을 찾는 일이 쉽지 않습니다. 이런 일을 하는 저조차도 개인적으로 이상과 현실은 괴리가 커요. 왜 많은 사람들이 모두 자신의 직업이나 직장에 불만을 갖고 있는지 보면 알 수 있죠. 현실적으로 월급에 의존하던 생활이 멈추면 어떻게 될지 걱정되죠. 혹시 그 이전에 가계부 같은 건 써보신 적 있으신지요?”
“가계부요? 결혼하기 전에는 혼자 썼지요. 결혼 후에는 전적으로 아내에게 맡기고 있습니다. 뭐, 카드 값은 대충 제한이 있으니까 그 안에서 많거나 적게 쓸 때도 있고요.”
“음, 일전에 만난 은행 퇴직자는 퇴직 직후 퇴직금으로 회사 근처에 작은 오피스텔을 얻고 가족에게 퇴직을 숨겼다고 합니다. 당시에는 퇴직금이 떨어지기 전에 재취업이 가능할 거라고 생각했답니다. 자신이나 가족의 생활비 구조도 그대로 유지했었죠. 이런저런 준비를 하고나서 재취업에 도전했지만 현실의 벽을 느끼고 6개월 정도 걸려 취업했다고 합니다. 나름 많았던 퇴직금 대부분을 1년 동안 모두 쓰고 어쩔 수 없이 가족에게 말했답니다. 가계의 소비 구조가 곧바로 위축되었죠.”
“그 이후 그 분은 어떻게 되었는지요?”
“얼마 전 그 분을 담당하는 취업 컨설턴트를 통해 얘기를 들었는데, 금융컨설팅 회사에 합류했다고 합니다. 그 분은 아마도 퇴직을 인정하고 싶지 않았던 것 같아요. 퇴직했을 때 제일 먼저 생활비 구조를 조정해야 합니다. 당분간 급여 생활자에서 실업급여 생활자로 시간을 벌어야 하는데 그걸 못한 거죠. 실업 급여와 퇴직금에서 일정부분 분할해서 현실 가능한 생활비를 잡아서 최소의 고정비를 잡았어야 했죠. 그리고 어느 정도 기간을 잡고 준비를 하시고 퇴직금을 시드머니(Seed Money)로 남겨놨어야 했었어요. 현재 전직/취업/창업 프로그램들이 많이 있어요. 지역 고용센터도 그렇고. 그 중에서 집단상담을 한 번 정도는 받아보시길 권합니다.”
“여러 사람이 모여서 하는 거요? 노는 것 같기도 하고 글쎄요. 그게 도움이 될까요? 괜히 우울할 것 같아요.”
“같은 처지에 있는 사람들끼리 소통하는 것만으로도 불안이나 조바심 등의 감정적인 문제에 도움이 되요. 또 다른 사람들이 같은 문제를 어떤 방식으로 풀어가는지 보는 것도 자신의 결정에 도움이 될 수 있습니다. 하지만 그런 프로그램에 너무 빠지는 건 추천하지 않습니다. 아까 말씀드린 그 분은 처음에는 여러 가지 퇴직자 교육프로그램에 대해 열심히 경청하셨습니다. 마치 대학신입생처럼 새로운 걸 배우는 게 굉장히 재미있다고 하시더군요. 거의 6개월 정도 회사생활처럼 퇴직교육을 이리저리 쫓아 다니셨어요. 하지만 그런 활동의 한계는 누구든 자신에게 맞는 뾰족한 수를 제시받는 건 아니라는 겁니다. 나 자신을 찾는 과정으로 봐야 합니다. 결국 뾰족한 수는 나라는 사람과 정면으로 마주하는 일이라는 것이죠.”
나를 찾기 위한 빅 퀘스쳔
‘다른 어느 곳도 아닌 바로 그곳에서 난 떠나야 했다’
– 빠삐용, 앙리 샤리에르 –
최근에 ‘빅(Big)’이라는 단어와 함께 사용되는 용어들이 자주 보인다. 빅 퀘스쳔(Big Question), 빅 픽처(Big Picture), 빅 씽크(Big Think), 빅 데이터(Big Data) 등등…
빅(Big)이라는 단어는 기존에 보던 시선에서 벗어나 좀 더 큰 스케일에서 바라보는 시각이라고 할 수 있다. 당장 해야 할 구체적이고 긴급한 문제들이 있음에도 한 걸음 물러나 더 큰 시각에서 바라보는 것은 아마 좀 더 멀리 바라보기 위함일 것이다. 그런 점에서 퇴사(退社)의 退는 물러날 퇴가 아닌 더 큰 길을 가기 위해 ‘한발 물러서’라는 뜻이라고 생각하고 싶다.
처음 퇴사를 받아들이기 위해서는 그 이유를 어디선가 찾아야 할 듯하다. 본인이 아니라 회사에서 원인을 찾아 그럴듯한 명분을 만들어야 자신이 떳떳할 것 같다. 자신을 추스르고 나서야 그때쯤 ‘나는 이놈의 회사에서 행복했었나?’라고 자신에게 질문을 던져보게 된다.
목요일 오전에 주간 실적을 보고하고 저녁에 친구와 만나 한 잔 하고, 금요일은 그런대로 시간이 빨리 지나가길 기도하며 일찍 퇴근해 TV를 보고, 주말은 가족과 외식 한 번, 산행 한 번 하고, 지겨운 월요일에 시작되고 수요일까지 정신 없이 시간을 보낸다.
이런 일주일의 패턴이 한 달에 4번에서 5번 정도 이어질 뿐이다. 1년? 명절과 휴가 등 굵직굵직한 연휴 등으로 계절이 바뀌면서 쏜살같이 지나간다. 남들의 시선에 맞춰 적당히 경쟁하고 발맞춰 뒤쳐지지 않고자 노력한다. 가족과 상사, 회사가 부여해준 기준대로 살아간다. 그 결과 행복했었나?
자기계발서나 유명한 강연을 보면 자신이 정말 좋아하는 일을 찾으라고 한다. 그러기 위해 내면의 목소리에 귀를 기울여야 한다고도 한다. 결국 ‘지금 행복한가?’라는 질문에 대답할 수 없다. 답이 떠오르지 않으니 질문을 외면하기 시작했고 현재를 유지하며 살아왔을 뿐이었다. 자유를 주면 누릴 수 있을까?
“이 234호에서 미치지 않도록 조심해야 해, 2년이면 730일이야, ‘사람 잡는 섬’ 이라는 이 격리소의 별명이 틀렸다는 걸 증명하는 건 너 하기 나름이야, 빠삐용. 하나, 둘, 셋, 넷, 다섯, 돌고, 하나, 둘, 셋, 넷, 다섯, 다시 돌고,”
그는 무거운 침묵만이 감도는 격리된 수용소에 갇힌 채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는 무덤 속 같은 이 침묵 속에서 미치지 않으려고 어쨌든 살아남아야 한다는 일념으로 계획을 했다.
“1년은 365일, 2년은 730일이다. 윤년만 끼지 않는다면…… 730일이나 731일이나 무슨 차이가 있겠는가? 아니 분명 차이는 있다. 하루가 더 있다는 건 스물 네 시간이 더 있다는 얘기니까. 그리고 스물 네 시간이면 긴 시간이다. 고로 스물 네 시간씩 31일은 30일보다 훨씬 더 긴 시간이다. 그럼 시간으로 따져보면…… 100일이면 2,400시간이다. …………………………………. 빠삐용 선생, 당신은 밋밋한 벽이 둘러쳐진 이 특수 제작된 우리에서 짐승처럼 1만7520시간을 죽여야 하는 거야….”
– 빠삐용, 앙리 샤리에르 –
생각해보면 알 수 있다. 하루 종일 누군가의 시간을 따르다가 하루 온종일을 스스로 주도해야 한다는 것은 상당히 어려운 일이라는 것을.
일단 하루를 시작하는 알람 소리의 변경이 필요한 것을 알게 될 것이다. 직장인이라면 누구나 아침을 시작하는 의례와 같은 출근준비를 위해서 무거운 몸을 일으켜 세우지 않아도 된다는 점을 깨닫고 다시 잠을 청하게 될 것인가? 매일 아침 집에서 직장을 오가는 힘들었던 출근시간의 버스와 지하철로의 이동이 없다고 그는 푹 잘 수 있을까?
적어도 J는 그렇지 못할 것이다. 아마 오늘 알람을 변경하지 못했을 것이다. 퇴직하고 첫날은 분주하게 스케줄을 짜 놓았을 수도 있다. J는 제일 먼저 출근을 위해 구조화되었던 일을 온전히 나만의 일로 채워야 한다. 아침에 힘든 출근시간을 보내고 상으로 주어지는 따뜻한 모닝커피와 직원과의 밤사이의 안녕인사는 어제로 끝났다.
다음의 질문은 궁극적으로 당신이 인생을 살아가는 데 있어 이유가 될 만한 내용이다. 물론 이 물음에 제대로 대답할 준비가 되지 않았을 것이다. 나를 찾기 위해서는 내가 어떤 이유로 자발적으로 움직이는지에 대해 해답을 얻어야 한다.
사람이 움직이는 기본적인 이유로서 돈, 일, 꿈이라는 3가지가 있다고 생각한다. 돈은 인생의 목적이 아니라 수단에 가까우니 이 3가지는 다시 일과 꿈으로 압축할 수 있고, 일은 결국 꿈이라는 목적의 수단으로 꿈에 포괄된다. 가령 돈을 버는 이유를 ‘폼 나게 살기 위해서’라고 답했다고 하자. 그렇다면 돈이 없으면 폼 나게 살지 못하는가? 이에 대한 반박에 답변이 궁색해질 수 있다. 스스로에게 던지는 질문과 대답은 자신이 처한 상황에 대한 자기인식과 태도가 담겨 있다.
가족의 부양 등 현실적인 대답에서부터 시작할지도 모른다. 자신이 왜 돈을 벌려고 하는지에 대하여 궁극의 목적을 정의(定義)내릴 때까지 자신에게 계속 물어보자. 궁극적으로 혹은 당장 10년 후의 자신에 대해서 상상력을 발휘해보자.
빠삐용을 다시 인용한다면 바다 너머 자유는 궁극적으로 바라는 자신의 인생 목표이고 10년 후의 모습은 바다라고 볼 수 있다. 지금의 퇴사라는 낭떠러지에서 뛰어내리고 있으나 바다 너머의 자유를 상상하지 못하면 당신은 무엇도 확신하지 못할 것이다. 준비한 공책에 매일 이 다섯 가지 질문을 해보자. 그 질문은 다음과 같다.
* 나는 왜 돈을 벌려고 하는 것인가?
* 그렇다면 얼마나 벌어야만 하는가?
* 일을 통해 내가 바라는 것이 무엇인가?
* 궁극적으로 내가 이 생(生)에서 바라는 것은 무엇인가?
* 10년 후 모습은 어떨까?
처음에는 피상적이고 궁색한 답변밖에 할 수 없고 어쩌면 질문에 말문이 막힐지도 모른다. 일정 기간 같은 질문에 반복해서 대답을 하다 보면 최종적으로 질문에 대해 깊이 이해하고 제대로 된 답을 찾기 마련이다.
당신은 이 질문 자체에 ‘그걸 물어봐야 아냐’ 는 식의 퉁명스러움을 보일지도 모른다. 하지만 지금은 어디로 가야 할지 길을 잃어버리고 도로 위에 멈춰 서 있는 상황이다. 믿을 만한 내비게이션(Navigation)이 없는 이상 자신이 스스로 나침반이 되어야 한다.
탈출에 성공한 빠삐용이 작은 코코넛 포대에 의지해 낭떠러지 아래 파도에 몸을 던졌던 것은 격리소(隔離所) 너머 바다의 자유를 상상하기를 멈추지 않았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