좋아하는 것이 분명하지 않은 사회에선 좋은 것을 만드는 일도, 좋은 것을 알아보는 일도 점점 더 어려울 수밖에 없다. 중대형 아파트 개발과 마이카 붐을 이끈 베이비 부머들이 은퇴한다. 한국 근대화와 소비문화를 이끈 주역들이 '끼인 세대', '우울한 세대'라는 불명예스러운 이름으로 불리는 것은, 공동의 목표, 공공의 이익(설령 사기업의 이윤뿐이었을지라도)을 위해 열심히 부역한 탓에 개인의 목표와 사적인 취향은 잊고 살았기 때문이다. '나는 무엇을 좋아하는 가' 하는 내면의 질문보다 '무엇이 더 좋다더라' 하는 선전에 귀를 기울였다. 친절한 설명도 없이 4차 산업혁명 시대는 이미 도래했다. 차세대는 다양한 개성과 재능을 소유한 인재가 필요하다고 입을 모은다. 그랬기 때문에,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더욱 취향껏, 정말이지 취향껏 살아야 한다.
그러나 너도 옳고 (네가 옳든지 말든지) 나도 옳다고 하는 '취존(취향입니다. 존중해주세요)'의 논리 앞에 역설적으로 점점 더 모호해진 좋고 나쁨의 기준은, 탈근대주의를 넘어 탈기준 주위를 선언하는 듯하다. 소비자들 눈에 아른거리는 제 멋에 취한 수많은 상품들이 힙한 탈을 쓰고서는 총천연색 개성의 꼬리를 흔들어대지만, 빠르게 소비되다가도 어느 날 흔적도 없이 사라져 버리는 이 속 빈 강정들은, 뒤돌아서면 기억나는 것 하나 없는 무미건조하기만 한 곳. 맛을 상실한(tasteless) 시대를 지키는 파수꾼들이다. 우리 사회에서 맛과 영양소보다 크기를 중요시하는 건 단순히 먹거리만의 이야기는 아니다. 좋은 집을 대변하는 것이 아파트 브랜드나 평수일 수 없고, 좋은 옷을 대변하는 것이 유명인이 입고 나온 그 어떤 브랜드 일수만은 없다.
취향도 개발과 노력이 필요하다면 너무 사치스러운 말일까? 프랑수아 트뤼포는 영화를 사랑하는 방법에 세 가지 단계가 있다고 말했다. 첫 번째로 영화를 두 번 보는 것. 두 번째 단계는 영화에 대한 글을 쓰는 것. 그리고 마지막 단계에는 영화를 직접 만드는 것. 두 번 본다는 것은 적극적인 관심을 갖는 것이고, 글을 쓰는 것은 비평하는 일이다. 그렇게 알게 된 더 나은 것, 혹 그렇다고 믿는 것을 직접 만들지 않고는 못 배기는 상태가 되면, 조금은 선명해진 스스로를 발견할 수 있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