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억과 기록
신경과학자 키어런 폭스는 꿈이 '의식적인 마음의 흐름이 강화된 것'이라 주장한다.
초현실적인 꿈도 존재하겠지만, 대개의 꿈은 과거의 사건을 재현하거나 문제를 검토하는 현실 바탕에 더 가깝다는 것이다.
강박을 느끼는 가운데 꾸는 꿈들도 유사한 긴장을 연출한다. 중대한 프레젠테이션을 앞두고 자료가 통째로 날아간다거나 꿈의 꿈으로 반복 잠식해 고대하던 만남이 불발되는, 관중이 빽빽한 무대에서 목소리가 나오지 않아 손에 땀을 쥐게 하는 형태다.
마치 현실의 기억이 꿈에 기록되듯 혹은 현실의 기억을 꿈에 기록하듯.
반면, 의식의 흐름을 따라 영감이 문제를 해결하는 유용한 꿈도 있다.
꿈에서 원자들이 결합하며 춤추는 것을 보고 몇 년간 고민해온 분자 배열 문제를 해결한 '프리드리히 어거스트 케큘레', 꿈에서 보았던 시를 그대로 적어서 <쿠블라 칸>을 쓴 시인 '사무엘 테일러 콜리지'의 일화, 꿈에서 듣고 <예스터데이> 노래를 지었다는 '폴 매카트니'의 얘기는 꿈에서 완벽하게 문제를 해결한 사례들이다. 과학자, 작가, 예술가들은 대부분 간접적으로 꿈에서 영감을 얻는다.
- <일만 하지 않습니다> 중에서
한 물리학자는 잠을 자면서 하루 동안 고민한 연구 주제를 생각할 수 있도록 마음에 심어두었는데, 잠들 때까지 특정 주제를 계속 생각하는 방법이었다.
나의 경우, 영감까지는 아니어도 꾸준히 꿈을 꾼 덕에 양질의 기분 좋은 꿈을 많이 꿀 수 있었다.
다시 꾸고 싶은 꿈을 만나면 잠들기 전까지 부지런히 꿈을 기억했다.
대부분은 보고 싶은 이들을 다시 만나는 꿈이었다.
어릴 적 향수가 담긴 공간에 머물거나 지붕 위를 점프하며 날아다니는 꿈들이 이어졌다.
바닷속 유영은 단골 꿈이었고, 보고 싶은 할머니도 만났다.
할머니를 만나는 꿈에서 늘 나는 마음이 바빴는데, 가끔은 이게 꿈이란 걸 인지했기 때문이었다.
꿈인 걸 눈치챈 꿈속에서 행복하면서 슬펐다.
곧 흩어질 시간을 계산하듯 부지런히 행복을 쌓고, 아침의 상실감은 꿈의 후유증으로 남았다.
하나의 미스터리는 꿈에 매번 등장하는 집이다.
한 번도 본 적 없는 동네지만 늘 만나는 집이다.
하도 여러 번 꾸다 보니 이젠 그 집에서 일어났던 일들이 시리즈처럼 연결된다. 꿈에서 꿈의 과거를 기억하는 셈이다. 꿈속의 나는, 나고 자란 듯 익숙하게 집을 다루는 반면, 꿈에서 깨고 나면 기억은 사라진다.
내가 기억 못 하는 무의식이라 쳐도 어떠한 알고리즘도 없는 수수께끼다.
대체 그 집은 어디이고, 무엇에서 오는 것일까.
지난밤 꿈에는 H를 만났다.
H는 나의 첫사랑이자 이상형과 만난 특별한 역사다.
그날 저녁, 퇴근길 플레이리스트에서 롤러코스터의 음악을 듣다가 H 생각을 했었다.
롤러코스터는 H와 내가 공통으로 좋아한 뮤지션이었다.
롤러코스터 신보가 나온 날, 집 앞에 온 그의 차에서 우린 함께 앨범을 들었다.
꿈에서 우린 추억의 장소에 앉아있었다.
서로의 오랜 마음을 확인하고 손을 잡았던 장소였다. 그는 여전히 미국에 있다 했고, 학교에 남았다고 했다.
그 시절 모두와 연락을 끊고 잠수를 탄 H를 우리 모두 걱정하고 궁금해했었다.
H와 나란히 앉아 안부를 묻고 있는 사실이 신기해 꿈같았다.
왜 그렇게 소식이 없었는지 묻는 내 질문에 그는 좀 아팠다 했다.
전과 달리 많이 수척해진 옆모습을 가만히 바라보았다.
그가 나를 향해 고개를 돌리려는 순간, 어디선가 익숙한 알람이 울렸다.
우리가 헤어지고 나서도 그는 한국에 들어오면, 내게 연락을 해왔다.
그의 소식을 먼저 알았고, 멤버들을 모아 환영의 자리를 마련했다.
그가 다시 한국을 찾았을 당시 난 새로운 연애를 시작하고 있었다.
평소처럼 H를 위해 모인 자리에서 우리는 반갑게 그간의 안부를 나눴다.
분위기가 오를 무렵, 나를 데리러 온 남자 친구가 인사 차 합류했고, 술을 한 잔 마신 남자 친구는 나와 결혼을 할 거라고 말했다. 뜬금없는 말에 당황스러웠다.
H의 표정이 어색하게 굳었고, 그게 우리의 마지막이었다.
그로부터 많은 시간이 흘렀지만 우리는 지금도 고맙고 그리운 H를 기억한다.
H를 두고, 우리의 스무 살을 얘기할 수 없으므로.
꿈속 말처럼 그가 정말 아팠던 걸까 생각하다가 지난 만남에 우리끼리 나누었던 무의식이 반영된 것이리라 여기고 만다.
연인으로 지낸 시간보다 베스트 프렌드로 지낸 기간이 더 긴 만큼 그는 우리 이십 대의 한 테마이기도 했다. 우리가 연인이 아니라고 그 시간이 사라지진 않았다.
서로의 마음을 알았을 때 우리에게 시간이 많지 않았던 현실처럼 좋아하는 감정을 유예해온 미련한 배려도 아깝지 않았다. 함께 해 온 시간들로 행복했다.
H와 내가 끝까지 고백하지 않았다면, 우리 모두는 여전히 하나의 가족처럼 서로의 대소사를 축하하고 위로하고 있을까.
H는 우리 멤버들에게 오빠 이상으로 아빠 같고, 언니 같고, 때론 친구 같았다. 그리고 연인이었다.
결코 야위지 않는 추억과 고맙고 따뜻한 어제의 시간에 인사하듯 안부를 묻고 싶다.
가끔씩 꿈을 빌려서라도 반갑게 인사를 나누고, 고마웠다 말하고 싶다.
느리게 가는 시간처럼, 흩어지지 않는 친구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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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미지 출처: Pexels.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