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기 호랑이는 열두 살
다리털은 왜 이리 바지런하고 정확한 것인가.
주기적으로 찾아오는 제모는 정말이지 번거롭다.
누구도 강요한 적 없는 개인의 숙제는 자발적이지만 결코 영혼은 없다.
익숙한 숙제를 하다 가끔 한 번씩 그날의 욱이를 만난다. 욱이와 만난다.
학기 중 전학 온 욱이는 일본에서 나고 자란 아이였다.
일본어로 자신을 소개하며 동글동글 웃던 욱이를 기억한다. 동그랗고 큰 눈망울에 옆으로 긴 타원형 얼굴을 가진 욱이는 자신의 별명을 ET라 소개했다.
말할 때마다 배시시 웃는 욱이의 앞니가 토끼 같았다.
한국말은 서툴러도 본체 유한 성격에 잘 웃는 욱이는 금세 친구를 사귀었다.
나와도 죽이 잘 맞아 자주 놀곤 했는데, 대체 어린이들에게 '메롱'은 무엇인가.
수업시간이면 눈이 마주치기 무섭게 먼저 ‘메롱’을 하기 바빴다. 그러고는 서로 좋다고 키드득거렸다.
선생님이 판서하시는 틈을 타 뒷자리에 앉은 내 책에 대고 꼬물꼬물 손장난을 하거나 이유 없이 돌아보곤 배시시 웃던 욱이가 싫지 않던 걸 보면 난 욱이가 좋았나 보다.
계절이 바뀌어 여름 하고도 어느 날의 체육 시간.
가벼워진 차림으로 운동장에 모였다.
욱이가 평소처럼 내 옆으로 와 장난치며 웃었다.
“잠깐, 나 운동화 끈 좀 매고”
욱이는 그런 나를 가만 기다려주었다. 다 마치고 일어서는데 욱이의 동그랗고 큰 눈이 어딘가 고정되어 있다. 내 다리였다.
내 다리에 한 번, 내 얼굴에 한 번 욱이의 눈이 바빠졌다.
욱이가 왜 그런 반응을 보이는 지 나는 알고 있었다.
내겐 보통의 열두 살 어린이에게는 찾아보기 힘든 다리털이 있었기 때문이다. 또래 친구들과 달리 내 다리는 가늘고 검은 털이 있었다.
그것은 기본적으로 드물고, 귀엽기보단 터프했다.
가늘다고 부러워하는 내 다리가 나는 싫었다. 털이 많으면 미녀라는 어른들의 위안도 아무 소용없이 가끔은 그냥 부정하고 싶었다.
그런 나의 다리를 처음 본 욱이가 무심코 내뱉은 한 마디.
오, 아기 호랑이다...
'어흥' 하는 포즈로 욱이에게 겁을 줬지만 사실 속마음은 달랐다.
웃어야 할지 울어야 할지 모를 마음으로 집에 와서도 욱이의 말이 맴돌았다.
그게 욱이의 말이어서였을지 아님 욱이가 너무 해맑게 그 말을 해서였을지 나도 몰라 울고 싶었다.
'아기 호랑이.. 아기 호랑이.. 아기 아니 호랑이. 호랑이.. 호랑이 그냥 호. 랑. 이.'
아기고 뭐고 152 센티미터 20 킬로그램의 호랑이가 이불 킥 하는 밤이 지나갔다.
다행히도 나의 억울함에 대한 하늘의 보상인지 내 키는 쑤욱 자라 170이 되었다.
하지만 무슨 조화인지 공평하게 털도 함께 자랐다.
말이 씨가 되어 진짜 호랑이가 되었다.
물론 어느 정도 철이 들고 나서부터 다리털은 다리털일 뿐 창피함의 문제가 아니었다.
그럼에도 귀찮음은 어쩔 도리가 없었다.
사회적 인간으로서 제모를 지속하며, 숙적인 털과의 영원한 전쟁을 이어가고 있다.
누구도 시키지 않은 일을 제 스스로 하고 있다.
현재까지도 명명백백 몹쓸 승자는 내가 아니라 털인 것이다.
어흥
욱이와 나는 육 학년 때 다른 반이 되었다.
중학교 배정표를 받던 날, 욱이가 우리 반에 나를 찾아왔었다. 서로 다른 학교란 사실을 확인하고 말없이 서로 아쉬워만 하다 또 보자는 인사로 우린 헤어졌다. 그게 마지막이었다.
욱이와 이웃에 살던 친구에게 전해 듣기로 욱이는 중학교 입학과 동시에 일본으로 돌아갔다.
욱이네 가족은 한국에 계신 할아버지의 건강 문제로 한국에 들어왔던 거였다.
기약 없이 한국에 왔던 욱이네는 또다시 기약 없이 돌아갔다. 갑작스레 떠난 통에 우리는 제대로 된 인사조차 나누지 못했다.
결국 내 친구 욱이는 짧은 우정의 선물로 ‘아기 호랑이’만 남기고 가버렸다.
그때를 가끔씩 생각한다. 때는 ET와 아기 호랑이가 친구가 되던 조금 먼 옛날이었다, 어흥.
★오늘의 추천 BGM
스웨덴 출신의 혼성 재즈 아카펠라 그룹 The Real Group의 곡 중 특히 좋아하는 'Run Run Run'