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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지운 Mar 31. 2022

여지를 남기는 여운

내가 일러스트를 사랑하는 이유

일러스트의 매력은 결벽에 가깝도록 완벽한 짜임이 아니라 여지를 남기는 여운에 있다.

그래픽과는 결이 다른 손맛의 힘이다.

아날로그적 감성이 주는 포근함이기도 하다.

그 맛에 일러스트를 좋아한다. 보고 있으면 바다를 바라보듯 조건 없이 빠져든다.

 

좋아하는 일러스트는 많지만 대표적으로 세 명의 국내 작가가 있다.

이정호, 김영준, 이규태.

그림은 아름답고 고요하나, 서정적 서사가 살아 흐르는 공통점이 있다.


#이정호

이정호 작가

책이 사고 싶을 땐 오프라인 서점을 선호한다.        

사고 싶던 책 말고도 초면이지만 표지나 제목에 오롯이 의지해 느낌대로 고르는 재미도 좋아해서다.

새 책 특유의 종이 냄새도 좋다. 잡지 VS 일반도서처럼 재질에 따라 냄새도 다르다.


이정호의 <산책>이 그러했다. 보는 순간 커버에 매료되었다.

그는 직접 쓰고 그린 첫 작품으로 영국 일러스트레이터 협회(AOI)가 주관한 2016 월드 일러스트레이션 어워즈에서 최고 영예상을 수상했다.  

하지만 내게 그게 중요한 건 아니다.

이정호의 그림은 미지의 세계로 가는 꿈길 같다. 몽환적이나 졸음 없이 연신 반짝인다.

무언의 신호는 호감과 상상을 자극한다.

말없이 호롱불을 들고 앞장서는 꿈속의 집사 같다.

이정호 작가의 <산책(Promenade)>
어린이들이 봐도 좋지만,
그들이 성인이 되고 나서 보면
더 좋을 책을 꾸준히 만들고 싶습니다.
모든 어린이는 어른이 될 테니까요.  
_ 어디로 가게 될지 아는 사람은 없어
_ 시간이 새겨놓은 지혜들
_ 멀리 가려면 천천히 조금씩 가야 해
_ 그냥 내버려 두는 게 좋을 때도 있어
_ 미래에 나는 지금의 나에게 무슨 말을 하게 될까?

지금을 살아가는 어른의 마음으로 혹은 어린이의 마음으로 살고 싶은 어른이로서 공감하게 되는 글들이 많다. 각각의 깊은 말들이 더 깊은 그림과 짝을 이루고 있다.

생각이 쉼을 주는 특별한 경험이다.

출처: 이정호 작가 인스타그램 (@jungho.el)
유행을 따르기보다
고유한 목소리를 낼 수 있어야
좋은 일러스트레이션이라고 생각합니다.
제가 추구하는 작업도 마찬가지인데요.
좀 더 욕심을 내자면,
각자의 내면에서
의미를 발견할 수 있게 하는
작업으로 이어지길
저 스스로에게 바랍니다.


#김영준

김영준 작가

사색을 즐기며 움직이는 그림에 관심이 많은 김영준 작가는 애니메이션 아티스트다.

김동률 오라버니의 동화 같은 뮤직비디오 <Fairy Tale>의 사랑스러운 그림도 그의 것이다.

영상은 그의 그림이 지닌 포근함과 서정적 서사, 고운 색채가 집약되어 드러난다.

눈을 뗄 수 없이 모든 장면이 마음을 붙잡는다.  

 Fairy Tale by 김동률 (Feat. 아이유) animated MV (출처: 1theK Youtube)

기본적으로 색에 대한 활용도 눈부시게 멋지다.

색과 감성을 잘 알고 다루는 작가 같다.   

오늘은 우리 둘만 있는 것 같았어.
나, 그리고 햇살 가득한 날씨 말이야


출처: 김영준 작가 인스타그램 (@youngjun_kim__)

디자인에서 시작해 애니메이션으로 장르를 이동해왔지만 여러 편의 일러스트가 바람에 일렁이는 듯한 그의 애니메이션은 장르를 뛰어넘어 정지한 화면 자체로도 한 폭의 그림이 된다.  

각각의 그림들은 흐르는 서사를 껴안고 한 편의 아름다운 애니메이션이 된다.


저는 시간을 다루는 작업을 하고 있어요.
현실에서는 흐르는 시간에 부대껴
항상 막차를 타는 기분이지만,
애니메이션이나
시퀀스 개념의 레이아웃을 설계하고
시간에 따른 변화를 보여줄 때면
하나의 살아있는 세상을 만든 것 같아서
잠깐 우쭐댈 수 있어요
10초 뒤에 어떤 일이 벌어질지 결정하거나 알 수 있는 사람은
저밖에 없거든요...
빵 시리즈 中 <bread bed>. 귀여운 아기 들꽃이 위트있고 사랑스럽게 자리한다. 맨 마지막은 <Sleepless Night>.

서정과는 다른 각도의 위트에도 재치가 넘친다. 그 대표적 예가 빵 시리즈다. 볼처럼 손등도 빵빵한 소녀의 어딘가에 늘 함께 하는 작은 들꽃이 앙증맞다. 사랑스럽다.

<잠 못 이루는 밤>은 '잠 못 드는 버터'에게 이불을 씌워주고 토닥토닥 잠을 재워주는 엄마 같은 손이 등장한다. 이 역시 위트와 서정이 함께 한다.

보고 있으면 솔솔 내가 잠이 올 거 같다.  


#이규태

이규태 작가

이규태 애니메이션 감독이 서정적 일러스트를 그리는 kokooma_ 와 동일 인물이라는 것을 나중에야 알았다. 그도 그럴 것이 그의 애니메이션과 일러스트는 마음을 움직이는 공통점이 있으나 시각적 분위기는 사뭇 다르다.

단조로운 선과 심플한 전개로 조용히 감정을 증폭시키는 것이 애니메이션이라면, 그림은 색연필 특유의 곱고 풍부한 컬러로 따뜻하게 마음을 움직인다.

색연필로 빛을 구현해 서정적 무드를 만든다.


그는 한예종에서 애니메이션을 전공한 감독답게 애니메이션으로 시작했다.

심플하지만 여운이 긴 애니메이션으로 양면의 사회와 모순을 돌아보게 한다.


일러스트레이션은 현실의 현상을
주로 다루고 있고요.
하지만 현실에서 마주한 상상의 범주를
넘어가는 순간들이
제 상상 속에 스며들어 두 장르가 조화롭게
결합되었으면 하는 바람이 있습니다.


- 다르기 때문에 할 수 있는 것들로 도움을 주려 하지만 보이는 것이 다르다는 이유로 사람들에게서 점점 멀어지는 빅 보이의 이야기 <더 빅 보이>


- <Here Winter>는 차가움과 따뜻함에 관한 이야기다. 시린 겨울을 떠나 따스한 곳을 찾지만 시리고 추운 겨울은 매 한 가지다. 아픔의 끝을 지나 결국에는 겨울에서 따스함을 만나게 되는…

시리고 차가운 겨울 이면에 위로가 되는 따뜻한 겨울로 전환이 되기까지 안식과 안도는 다가왔다가 밀당하듯 달아나 버린다.

무엇보다 Here Winter의 감성을 살리는 데 큰 공헌을 하는 것은 기타 선율이다.

신현모 감독의 음악은 마음의 현을 켜듯 지켜보는 심정을 쥐었다 폈다 하며 공감각적 감동을 만든다.

음악이 인상적인 '여기의 겨울(Here Winter)' - TRAILER (출처: 애니씨어터 Youtube)

- 울타리에서 보호받던 소년이 치열한 사회로 들어오며 변화해가는 이야기인 <Each Other>


반면, 그림에 있어 그는 '시간을 담는 일러스트레이터'다.

그림의 곁을 지키는 도구는 소박하게도 펜과 색연필뿐이다. 타지에서 무료한 시간을 그림으로 달래려는데 필통에 든 두 자루의 색연필이 전부라 단출하니 그림을 그렸고, 그 그림이 마음에 들어 이후로도 동일하게 그려왔다고 했다.

그게 이규태 작가의 시그니처가 되었다.

공간에서 영감 받은 다채로운 시간을 색연필로 심는 작가. 그는 그 시간을 빛으로 구현하며, 기억을 두드린다. 메모하듯 그림으로 순간을 기록한다.

후에 펜과 색연필의 혼합으로 도구를 확장했다고 하나, 이 역시 소박하다(진정한 장인은 도구 탓을 하지 않는 것이다).  

그는 공간에서 일어나는 현상들에 눈이 많이 가는 이유로 상상력을 자극을 들었다.

사진으로 순간을 남긴 후 종이로 옮겨 그림으로 완성하는 방식으로 기록을 구현한다.


특정 장소를 떠올렸을 때,
자동적으로 그려지는 것들이 있어요.
예를 들어 교실을 떠올리면
책상, 의자, 칠판, 창문 등이
자연스럽게 생각나죠.
그런데 실제 그 장소에 가보면
누군가의 호기심으로 놓인 사물들 때문에
상상하지 못했던 요소들로 가득해요.
특히 빛으로 인한 현상과 바람으로 인한
변화는 우리가 상상하지 못한 순간들을
만들어냅니다.
그러다 보니 자연현상들이
그림에 자주 등장하는 편이에요.


우리가 무심히 지나 보냈던 일상의 시선을 건져 올려 이미지화하고, 그를 통해 그것이 소중한 기억임을 생각하게 하는 것이 그의 특기인 거 같다.

그리고 그 공간에서의 시간을 이미지로 새긴다. 그래서 그의 작품에는 공간명이 자주 제목으로 함께 한다. 잊지 않기 위함일 수도 있고, 기억하기 위함일 수도 있다. 또 그림을 보는 이들에게 열린 공감을 만들어 주기 위함일 수도 있다.  


알부스 갤러리에서 했던 <The Memory of a Moment 순간의 기억>을 봤을 때의 잔잔한 감동과 여운도 잊을 수 없다. 그림과 함께 공간을 메우던 음악도 인상적이었다.

그의 그림은 그 시간이 어떠한 이야기가 있을지 생각하게 만드는 힘이 있다.

내가 마치 거기에 있는 거 같다. 그림 속 서사에 당사자가 된 기분처럼 분위기에 동화된다.

꿉꿉했던 마음이 건조기에서 갓 꺼낸 수건처럼 뽀송뽀송해지는 기분도 든다.

그때의 음악이 함께 기억에 남아 공감각적 감동을 만들어준다.


가장 눈이 가던 작품은 그림 속 두 남녀의 모습 때문이었다.

둘이 어떠한 사이일지 지금 어떠한 상황일지 그들의 감정과 이야기가 그림 속 두 사람의 팔, 손 모양과 서 있는 자세 등 미묘하고도 온전히 전달되었다.

그리고 그때 생각나던 음악이 있었다.

진용의 '그때들엔'.

무언가 계속 바라보게 되던 그림
엄마, 나는 잊지 말아요_제주
출처: 이규태 작가 인스타그램 (@kokooma_ )

어딘가를 응시하고 있는 그림 속 주인공을 응시하는 나는 어렴풋하게나마 그들의 생각을 읽어본다.

그러면 그림에 더 가까이 닿아있는 기분이다.


이처럼 그림이 주는 서사의 힘을 일러스트에서 만난다.

영상으로 모든 게 설명되는 것과는 또 다른 매력이다. 정지되어 있는 이미지에 오롯이 집중해 생각하게 된다. 그리고 그 생각은 묘하게도 편안한 쉼이다. 음악처럼...

Last Carnival  by Norihiro Tsuru (출처: Akash Nikitha  Akash Nikitha Youtube)
C'mon through by Lasse Lindh (출처:    Lasse Lindh-Topic Youtub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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