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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지운 Mar 08. 2022

꿈이라도 좋을 하루

[영화 #2.] 제주에서 어멍으로 남는 영화 <그녀의 전설>

내가 빠져드는 영화의 포인트는 '스토리, 영상미, 삼합(三合)'이다. 여기에서 삼합은 내가 좋아하는 '노래와 춤, 스토리'가 한 데 잘 버무려진 진미를 말하는데, 따뜻한 스토리에 노래, 춤까지 가세하면 기본이 별 다섯이다.

  

진심을 다해 사랑하는 별 다섯 ★★★★★ 영화 중 대표적 진미에는 <그녀의 전설>과 <세 얼간이>가 있다.

두 영화 모두 너무 좋아 앙코르로 가족과 다시 또 보았다. 그 중에서 '그녀의 전설'.


#1. 그녀의 전설  

세상은 그를 <만추>로 기억하나, 내겐 <가족의 탄생> 시나리오/작품상의 히어로인 김태용 감독의 단편영화다. 엄마랑 함께 보는 중에도 엄마와 외할머니 생각이 나는 영화이기도 했다.


<그녀의 전설>은 제주도 전설(물질하다 바닷에서 사라진 해녀들은 곰이 되어 한라산에 살고 있다)을 차용해 만든 영화로 '제주'로 시작해 '어멍('엄마'를 뜻하는 제주 방언)’으로 끝난다.

제주와 엄마, 둘 모두 내가 너무 사랑하는 대상인 만큼 ‘제주’가 좋아 열어보았다가 ‘엄마’ 이야기에 결국 울어버렸다.


서울에서 약사이자 워킹맘으로 살고 있는 유진은 엄마가 실종되었다는 전화를 받고 급히 고향으로 내려오지만, 있어야 할 엄마는 어디에도 없다.

그러다 어디선가 나타난 엄마 아니 '곰'이다.

엄마가 곰이 되어 돌아왔다.


유진은 곰이 된 엄마가 먹고살기 바빠 아껴두었던 일상의 소소한 행복을 엄마와 함께 채워간다.

그리고 엄마가 들려주는 한 편의 내레이션 같은 이야기가 가슴 찡하다.


그런 그들에게 영락없는 이별이 기다리고 있다.

이 모두가 가벼운 꿈을 꾼 듯 하루 동안 일어나는 일이다. 엄마와 딸의 처음이자 마지막 여행이다.

이 곡의 OST인 '꿈속의 사랑'에 한 구절처럼 '꿈이라도 좋을 하루'다.  

탕웨이 - 꿈속의 사랑 (그녀의 전설 OST) _출처: 가을나그네 Youtube

엄마가 정말 돌아왔다 믿어서일까? 아님 그리워 찾아오면 만날 수 있는 곳에 엄마가 잠시 쉬고 있다 생각해서일까?  

꿈인 듯 현실인 듯한 세계에서 유진은 오열하는 법 없이 덤덤하다. 일상의 얼굴이다. 그리고 엄마와의 시간을 즐기며 흥에 빠지기도 한다. 그마저도 자꾸 난 먹먹하다.


전에 본 다큐에서 물질로 평생을 직업병에 시달리는 제주 해녀들이 그럼에도 매일 바다를 찾는 것은 가족을 먹여 살리고 자녀들을 키워내기 위함이라 했다. 나고 자라 배운 게 물질이라 바다를 못 버리는 게 아니라 그 보람 때문이라고 말이다.

살아갈 힘을 살아있음을 증명하는 바다에서 한 순간 생을 잃는 것도 해녀의 삶이다.

유진이 상경해 약사가 되고 가정을 꾸리는 순간까지도 어김없이 해녀 어멍의 사랑과 뒷바라지가 있었다.


그런 엄마는 정작 일상의 소소한 행복이 무언지 모르고 평생을 바다에서 살았다. 그 바다에서 사라지고서야 비로소 곰이 되어 안식이 주는 삶의 행복을 맛볼 수 있었다. 그립던 딸과 이제야 함께 말이다.   

산으로 떠나야 하는 엄마와 이별여행이 시작되며, 모녀는 바다를 찾는다. 짠내 나는 바다에 앉아 엄마는 유진에게 그저 고맙다는 한 마디가 듣고 싶다.

공부시키고 그녀를 약사로 만들어준 이 어멍에게 말이다.  

바닷길을 달리며 좋으냐 묻자 물질 안 가니 너무 좋다고 하는 어멍
어릴 적 어멍은 학교에 다니고 싶었다. 평생 물질로 밥을 벌어 딸만큼은 학교를 보내고 약사로 만들어준 어멍은 고맙단 말 한 마디가 그저 듣고싶다. 그 말 한 마디면 되었다.
인어가 될 줄 알았던 엄마는 곰이 되어 산으로 떠난다 한다. 이별을 앞두고 단 하루뿐인 준비 여행은 생각해 본 일도 없고 짧디짧다

영화는 많은 준비를 통해 배려를 보여주는데, 곰의 탈이 자칫 방해할 수 있는 엄마의 감정 선을 애니 매트로닉스 기술로 잘 살려내었다. 캐릭터 모형에 기계장치를 넣고 전자기술의 힘으로 움직이게 하는 특수효과 기법인데, 곰탈의 눈/입/귀에 여러 모터를 달아 어멍이 대사나 표정을 지을 때마다 감정이 살아나게 도왔다. 고로 곰의 연기가 집중을 방해하는 불편은 전혀 볼 수 없다.   


이 영화의 진정한 백미는 곰의 등장과 함께 영화 곳곳 발동하는 춤과 노래다. 고된 노동을 잊게 했던 노동요처럼 슬픔을 아름답고 유쾌하게 승화시킨 열쇠다. 어멍의 또 다른 자신이다.

삶의 모든 짐을 던진 듯 춤을 추는 엄마와 엄마가 가는 길에 쓸쓸 따윈 덤비지 않도록 흥겹게 춤추며 지켜주는 분신 같은 해녀들의 군무는 웃음과 정감을 준다.

그리고 엄마와 딸의 흥겹지만 환상이라 더 슬픈 또 하나의 춤이 있다.

이 춤은 엄마의 아름답고 슬픈 판타지다. 딸과의 꿈 같은 시간이다.

엄마의 판타지이자 딸의 꿈 속 일수도 있을 어멍과 딸의 춤

슬프도록 아름다운 판타지. 그리고 이제는 사라져 버린 엄마와 세상에 남은 딸.

유진이 만난 엄마는 산 자가 아닌 환상이다. 엄마의 꿈이다. 아니 유진 자신의 꿈 속일지도 모른다.


엄마는 그들을 떠나 유유히 산으로 사라진다.

유진과 어멍의 손자는 엄마를 따라갈 수 없다. 그녀를 따라 살 수 없다.

유진이 끝내 속 깊은 곳까지 이해할 듯 이해할 수 없을 엄마의 깊고도 슬픈 세계로 엄마는 떠났다.

하지만 유진은 엄마가 되었으므로 이심전심, 두고두고 엄마를, 그리고 엄마의 세계를 헤아리고 감사해 할 것 같다. 그리고 내 귀에는 유진인듯 어멍인듯 목소리가 들리는 거 같다.  

엄마 하고 싶던 거 나랑 하고 싶던 거 다해. 나랑 다해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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