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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지운 Sep 16. 2022

알아듣는 귀

수용과 변화

고민이 있거나 잘못을 했을 때, 엄마와 이야기를 자주 나누었다.

그렇게 답을 찾았고, 변화했다.

어릴 적부터 좋고 싫음이 분명하고 고집도 세지만, 수용과 적응이 빠르다는 게 나의 강점이기도 했다.

엄마는 그런 나를 두고, ‘알아듣는 귀'가 있다고 칭찬하시곤 했는데, 어린 마음에도 그 말의 의미를 심정으로 잘 알고 있었다.

결과적으로 변화는 긍정의 방향으로 길을 터주었다.


하지만 이제와 생각하면, 30퍼센트의 알아듣는 귀와 함께 그 나머지 원천은 신뢰와 사랑 아니었나 싶다. 내가 엄마를 믿고 사랑해서. 엄마가 나를 더 많이 믿고 사랑해주어서.

그게 아니었다면, 이상한 변주로 지독히 말을 안 들었을지 모른다.


반면, 내 신체의 두 가지는 옛 어른들의 말씀대로라면 말을 지독히 안 들을 생김을 가지고 태어났다.


우선 ‘직모의 머리칼’은 숱이 많은 만큼 힘도 세다.

친구들이 나를 부러워할 때, 나는 컬을 가지고 태어난 곱슬의 친구들을 부러워했는데, 내 생머리의 수준이 도가 지나친 탓이었다.

예로, 공을 들여 드라이를 하고 집을 나서면 신데렐라의 12시처럼 자동 복구되었기 때문이다.

형태를 유지하려면, 왁스나 헤어젤 같은 고정제가 필수인데, 인위적인 끈적임을 싫어해 결국 나의 드라이는 수포로 돌아갔다.

“나 오늘 드라이했어 (찰랑)” 쓸어 넘기기도 전에 도로 생머리인 허무다.

대학 때는 긴 생머리가 지루해 볼륨 매직 같은 펌을 즐겼는데, 미용실에 오래 앉아있기 힘들어하는 성격임에도 수고로움을 자처했다.

길던 머리를 자르고 펌을 한 뒤 떠났던 오래 전 여행

나의 머리칼은 새로 만난 디자이너들로부터도 다루기 어렵다는 말을 익히 들어왔다.

소위 말을 잘 안 듣는 머리카락인데, 힘이 좋은 직모라 펌이 아니면 커트로는 변화를 주기 어려운 머리라는 설명이었다. 나의 경험상 그 말이 무슨 말인지 단번에 이해할 수 있었다.


다른 또 하나의 생김은 바로 ‘귓구멍’.

자라는 동안 동생도 나도 어른들로부터 귀가 잘 생겼다는 말을 자주 들어왔다. 잘 살 복귀라고 말이다. 내가 봐도 내 귀는 제법 큰 편이다.

반면, 모순처럼 작은 귓구멍은 이어폰의 이어캡을 구겨 넣은지 얼마 안돼 ‘퉁’ 튕겨 나올 정도다.

옛날에 귓구멍이 작으면 남의 말을 잘 안 듣는 귀라 했다는데, 어린 시절을 비춰보면 틀리지 않다.


옛말 그른 데 없다는 옛말을 신뢰하는 나로서는 나의 두 가지가 나의 어린 시절에 적잖이 작용했으리라 짐작해본다.

그럼에도 부모님의 말씀처럼 잘 살아온 건 엄마가 늘 대견해하시던 ‘알아듣는 귀’의 힘 아닐까 생각하는 거다.

나의 고집을 희석시키고 방향을 바로 잡아준 변화의 힘.

어른이 다 되었지만 지금도 엄마의 칭찬을 받을 때면 으레 으쓱하며 써먹는 말,

엄마, 엄마 딸은 알아듣는 귀가 있잖아

라고 말이다.


#오늘의 추천 BGM

Hotaru (출처: Cotton vibe Youtub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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