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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지운 Sep 14. 2022

어른의 영역 정복기

결국은 일상

궁금해 마음이 들썩거리던 것들이 있었다.

어른의 영역이므로 대체로 기다림이 필요했다.   

하지만 정작 어른이 되고 나니 시간을 재촉하던 미지의 세계는 너무도 흔한 것이었다.

막상 해보니 별 게 아니란 정복감 뒤로 허탈함이 뒤따랐다.

기다림에 비해 시들기는 너무 쉬우니 들썩거림은 온데간데없고 석고가 굳듯 덤덤한 과정만 남곤 했다.

이 역시 어른이 되어가는 걸까 싶지만 왠지 조금은 다른 듯한 기분은 왜 일까.


#1. 뾰족구두

어린 나는 엄마의 스타킹과 하이힐을 신고 온 집안을 누비고 다녔다.

신었다기보다 구두가 나를 태우고 다녔다는 표현이 맞을 것이다.

엄마의 치마, 스카프...

엄마의 모든 멋이 나의 놀이였다.

무엇보다 또각또각 나는 구두굽 소리를 좋아했다.

외국 고전 영화나 만화에서 주인공이 구두를 신고 나무 바닥을 디딜 때 나는 굽 소리가 특히 좋았다.

빨간 머리 앤이 가죽 구두를 신고 걷거나 뛰는 소리처럼.

둔탁한 듯 똑부러진 소리가 고소하고 달콤했다.

나중에야 그 소리들이 폴리 아티스트(Foley Artist)가 만든 전문적 효과음이라는 걸 알고 빠져들기도 했다(눈 위를 걸을 때 나는 뽀득뽀득 소리는 내가 설레는 또 다른 포인트다. 녹말로 채운 베개를 사용한다).


엄마의 구두는 외출용이었으므로 나는 고양이 발자국 같은 흔적을 남기곤 했다.

결국 나의 구두 사랑에 손을 든 엄마는 초등학교 4학년 무렵엔가 내 발에 맞춘 중간 굽 높이의 구두를 선물로 주셨다. 나는 엄마의 선물이 헛되지 않을 만큼 원 없이 신고 집 안을 다녔다.


자연히 어른이 되면 하이힐만 고집할 것 같던 내가 막상 대학생이 되었을 때, 뾰족구두는 찾지 않게 되었다. 마치 멍석을 깔아주니 춤을 추지 않는 것처럼.

하이힐과의 외출은 발바닥에 불이 나거나 굽에 적응을 못하고 삐걱대는 나로 인해 내 길이 아님을 금세 알게 되었다. 그저 뾰족구두는 갖지 못하던 시절의 막연한 동경이었다.

나의 여러 구두에서 나는 구두굽 소리도 더는 특별하지 않게 되었다.

오히려 또각거리는 소리가 소란하지 않도록 조심했을 뿐 말이다.

신발을 살 때면, 어느새 내가 들고 있는 건 언제나 '플랫슈즈'였다.

그때도 지금도 하이힐은 중요한 날이나 기분을 내고픈 소수의 날에만 함께 할 뿐이다.

더불어 그때도 지금도 나의 신발장에는 친숙한 플랫 슈즈들이 자리를 차지하고 있다.


#2. 화장

엄마는 늘 스타일리시했다. 옷도 화장도 세련된 사람이었다.

그런 엄마의 옆에 앉아 맨손으로 화장을 따라 하곤 했다. 분첩을 두드리거나 립스틱을 바르는 과정이 특히 흥미로웠다.     

어느 날 나란 어린이는 주인이 없는 틈을 타 이것저것 얼굴에 바르기 시작했는데, 용도를 모르고 오용한 결과, 얼굴이 폭소 클럽이 되고 말았다.

이미지 출처: Pexels.com

그런 내가 성인이 되고, 나의 화장품을 갖게 되었음에도 '옷'과 달리 도통 흥미가 일지 않았다.

단적으로 관심사가 아니었다. 더욱이 화장에 능숙한 미적 감각을 가진 것도 아닌 만큼 선크림과 립글로스만 바르고 다니는 일이 다반사였다.

대신 소개팅이나 친구들과 약속이 있던 날은 엄마가 직접 화장을 해주곤 했다. 화장을 하고픈 날에는 엄마에게 묻지도 않고 으레 얼굴을 내밀고 마주 앉곤 했다.

언젠가 저녁 약속을 앞두고 우리 집에 왔던 단짝 친구는 그런 엄마와 나를 보며 가졌던 인상을 지금도 추억 삼아 이야기하곤 한다. 나에겐 익숙해도 친구에겐 적잖이 신선한 광경이었나 보다.

사회생활을 하면서부터 여차저차 화장이란 걸 하고 다니지만 오십보백보 실력에, 그마저도 십 분을 넘기지 않는다. 대신 모자란 아쉬움을 액세서리가 채울 뿐이다.


#3. 운전

아빠 차를 타면 동생과 나는 인형이나 쿠션을 핸들 삼아 아빠의 손동작을 따라 하곤 했다.

그도 성에 차지 않은 나는 집에 돌아와서는 침대에 앉아 동생을 뒤에 태우고 훌라후프를 핸들 삼아 운전을 했다. 드라이브를 시켜주기도 하고, 어떤 날은 버스 기사가 되어 동생과 동네 한 바퀴를 돌았다.

어릴 때는 긴 차를 운전하는 버스 기사분들의 직업을 동경하기도 했다.

운전의 고단함 따윈 모를 어린이였다.

때를 기다렸다 대학에 들어가자마자 면허를 딴 나는 한동안 들떠서 여기저기 다니곤 했다.

지금도 음악을 들으며 즐기는 가벼운 드라이브는 좋아한대도, 장시간 운전은 여행과 별개로 설렘보다 부담이 먼저인지 오래다. 솔직히 언젠부턴가 운전석보단 보조석이 더 재미난 게 사실이기도 하고.




그때는 빨리 누리고 많이 해보고 싶어 기다림도 간지러웠다. 해도 해도 질리지 않을 것처럼 말이다.

어른이라 누릴 수 있는 특권이라 생각했던 것들이 인이 박히듯 근거리로 스며들고, 새로울 게 없는 경험에 불과한 지금.

어른의 영역을 정복하면 그다음은 일상이 기다릴 뿐이다.

그럼에도 들썩이는 마음과 경험을 기다리는 시간이 좋아지고 있다.

막연한 환상은 휘발된대도 그 공백을 친근한 일상이 포근히 메워줄 테니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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