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거진 살기 시로

(06. 슬리퍼) 대충 살고 싶은 마음

대충 살고 싶은 마음이 또 하루를 살게 한다

by 아마추어리


슬리퍼


더러운 바닥에

삶의 무게와 중력의 가운데

들썩들썩 끌려간다


종일 밟히고 기가 눌려

코가 납작해진 그는


익숙한 현관에 도착하자마자

냅다 온몸을 집어던지고

그대로 잠이 든다


그 어떤 미동도 불빛도 없이

이제 오롯이 그가 되는 시간


깊은 잠에 빠지고 나서야

자신의 이름이 되는 시간


어느 아침 꾸역꾸역

누군가 자신을 밟아줄 때에야 일어난 그는

누구보다 잘 안다


대충 살고 싶은 마음이

또 하루를 살게 한다는 것을



연간 프로젝트를 맡다 보면 자연스레 쉬는 텀이 없어진다. 연초에는 제안서를 작성하느라 머리를 싸매고, 사업이 시작되면 꿈처럼 계획했던 일들이 덜컥 현실로 다가와 어깨가 무거워진다. 그렇다면 연말에는? 의전이 반 이상인 연말 행사 준비와 동시에 허겁지겁 쳐냈던 일들을 파헤쳐 사업보고서를 작성하고, 정산 파일도 만들어야 한다.


최악인 건 '연말에 더 바쁜' 분야가 있다는 거다. 크리스마스를 기점으로 자선행사를 여는 기부단체나 성대한 송년회를 열어야 하는 사업들. 슬슬 마음이 말랑해지는 연말용 음악이 길거리에 들려오는데 나도 거래처도 캄캄한 저녁에 사무실 전화기로 통화를 한다. "퇴근 안 하셨지요?", "연말이니까요". 웃음소리를 한껏 섞으며 농담처럼 주고받은 말에 뼈가 시리다.


결국 12월이 오기도 전에 몸살이 났다. 그렇잖아도 어깨가 결려 마사지샵을 예약할까 말까 몇 주를 고민하고 있었는데, 타이밍을 놓쳐버린 거다. 머리는 무겁고 몸은 찌뿌둥한데, 유튜브에 검색해보니 몸살일 때는 아무것도 하지 말란다. 휴식을 취해달라는 몸의 신호인가 본데, 귀한 '일하지 않는 시간' 빼앗기는 느낌이라 왠지 못마땅하다.


아파야 쉬어지는 사람들이 있다.


굳이 일중독자라는 워딩을 쓰지 않아도, 특별한(아주 부러운) 경우가 아니라면 웬만한 한국인은 이런 기질을 가지고 있지 않을까 한다. 게으름에 대한 반감, 아무것도 하지 않는 것에 대한 죄책감. 모두 그놈의 '생산적인 시간'을 보내야 한다는 조급함에 얽매여 느끼는 감정들이다.


그런데 돌이켜보면 쉬는 건 너무 당연한 일이다. '엔진'이나 '과열'이라는 단어를, 우리는 직장인 대상 자기 계발서에서 얼마나 많이 마주쳤던가. 번아웃이니 마인드풀니스니 이제는 지겨울 지경이다.


못마땅한 표정을 하고서 극세사 이불에 누우니 몸이 사르르 녹았다. 평소 같으면 '빨래라도 개야지'하며 어떻게든 몸을 움직였을 텐데, 주말에 몰아서 하는 방 청소도 모두 미뤄버리고 이틀을 내내 누워있었다. 수면바지에 슬리퍼를 끌고 일주일째 미뤄뒀던 세탁소를 가는 일 빼고는.


슬리퍼의 슬립이 그 'sleep'은 아니지만, 편안함을 준다는 점에서 여러 공통점이 떠올랐다. 우리 모두 격식을 차리는 자리에는 아껴뒀던 구두를, 출근길에는 휘뚜루마뚜루 신을 수 있는 단화를 꺼낸다. 그 외에 동네 편의점이나 세탁소를 갈 때는 무조건 슬리퍼가 아닌가.


이렇게 조금은 편하게 살고자 하는 마음이 심신의 피로를 덜어주고, 그게 또 다른 하루를 살게 하는 건 아닐까. 매일매일 뾰족한 구두를 신고 살 순 없는 것처럼.


게으름. 신체가 알아서 드러눕는 이토록 완벽한 완급조절이 또 어디 있으랴. 앞으로는 죄책감을 좀 덜어내고, 마음껏 대자로 누워있는 시간을 즐겨야겠다. 그렇지 않으면 심신이 닳고 달아 어딘가 병이 나 못쓰게 되고야 말 테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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