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거진 살기 시로

[마른 화분] 생기 있는 삶의 조건

시들어가는 것이 식물만의 숙명은 아닌 것만 같다

by 아마추어리

마른 화분


말라서 죽은 것들을 오랫동안 살펴본다

그가 필요했던 것을 기다린 만큼

깊고 찬찬히


생각날 때마다 물을 주었을 테고

때가 되면 해가 들기도 했을 게다


봄바람만 불어도 깨질 듯한 잎과

가벼운 손길에도 무너지는 줄기


기대어 살기엔 속이 깊고

혼자서 살기엔 너무 연약했던

너를 보면서


미안하다는 말 대신

어떤 말이 너에게 필요할지

아니면 애도 따위는 필요 없을지


어쩌면 침묵이 나을지도 모르는

마지막 말을

나는 아주 천천히 생각한다




자가진단키트 살균 면봉으로 코를 후비다 코피가 조금 났다. 아직 잃지 못한 뜨끈한 보일러와 창틈 새로 쌩쌩 불어오는 바람에 온 집안이 건조해진 탓이다. 그러고 보니 바깥은 겨울에서 봄으로 넘어가는 길목이렸다. 창밖으로 햇볕이 쨍해서 나가보면 날카로운 바람이 분다. 보이는 대로만 판단하면 큰코다칠 계절이다.


요새는 퇴근길에 봄 소식이 오는지 세심히 살피며 걷는다. 회사 뒷길의 벚꽃이 피기까지는 아직 멀었고, 또 조금 먼저 오는 개나리도 아직 소식이 없지만 몇 개월 내내 헐벗은 나목만 찍어댔으니 새로운 변화라도 있는지 구석구석 궁금하다. 크리스마스 무늬 겨울옷을 입은 나무는 없어졌지만 이렇다 할 노란 새싹은 보이지 않는다. 날씨는 변했어도 식물이 기온을 받아들이는 데에는 꽤나 시간이 걸리나보다. 생각보다 봄은 천천히 온다.



그 대신 회사 테라스에 놓인 화분이 눈에 들어왔다. 지난가을에 전 직원이 온몸에 흙을 묻히며 새로 들여다 놓은 꽃이다. 봄을 맞아 화사한 꽃을 피워내면 좋으련만 파삭하게 말라 있다. 새로 들여놨을 때는 아침저녁으로 당번을 정해서 물을 주기도 하고, 지나가던 행인들이 멈춰 서서 사진을 찍기도 했는데 이번 겨울을 지나면서 모르는 새 죽어버린 것이다. 알록달록 꽃을 피우고, 잎이 떨어질 때까지는 어떻게든 눈이 갔는데 색을 잃은 후에는 누구도 관심을 가지지 않는다. 눈이 안 가다 보니 치워질 기미가 없다.


화분에 심었던 꽃이 어떤 종인지도 기억이 나지 않는다. 덧붙여 회사 1층에 자리 잡은 포인세티아는 붉은 잎을 떨어뜨리며 초록색으로 다시 잎을 물들이고 있다. 화려한 제 기능을 뽐낸 후에는 너무나 평범한 그저 '식물'의 모습으로 돌아간다. 테라스 화분의 꽃이 시든 이유를 생각해본다. 겨울에도 부지런하게 물을 주고, 회사 건물에서 가장 볕이 잘 드는 테라스도 내어주었건만, 꽃은 무엇이 더 필요했을까? 찬바람을 막을 창문? 아니면 주사기 꽂듯 영양제를 넣었어야 했을까?


문득 제때 채우지 못한 갈증에 건조하게 시들어가는 것이 식물만의 숙명은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다. 실은 동물도 인간도 마찬가지 아니었던가. 이론상으로는 최소한의 의식주만 있으면 존재할 수는 있다지만, 그저 눈을 깜빡이고 숨을 쉰다고 모두 '살아있다'라고 할 수 없지 않을까. 출근 시간 지하철에서 동태눈을 하고 선 사람들에게서, 제 몸만 한 닭장에서 기계적으로 사료를 쪼아 먹는 닭에게서 생명력이 느껴지지 않듯이. 오히려 역사에 강렬한 인상을 남기고 떠난 이들이 아직 살아있는 것처럼 생생하게 느껴질 때가 있듯이. 그래서 달걀에도 닭의 사육환경을 알 수 있는 난각 번호를 찍고, 우리도 퇴근 후에 지루한 삶의 갈증을 채울 재미있는 무언가를 늘 찾아다니지 않던가.


지지난주부터는 원고를 차곡차곡 모아서 출판사 몇 곳에 시집을 내겠노라하고 투고를 했다. 평일 낮밤으로 반려 메일이 날아들지만 '작가님의 옥고를 투고해주셔서 감사합니다'라는 형식적인 한 문장에 마음이 이유 모르게 촉촉해진다. 지난주에는 난각 번호가 2로 끝나는 계란을 한 판 샀다. 유기농은 아니지만 방사해서 키운 닭이 낳은 달걀이다. 그러고 주말 아침에 모처럼 계란 프라이를 해서 먹었다. 배달 주문 후 빈둥거리며 누워있지 않고, 라디오를 켜고 주방 앞에 선 내 모습이 왠지 모르게 흐뭇했다. 의식주의 '식'을 뛰어넘는 무언가가 충족되면서 잠시 행복감을 느꼈다. 비좁은 닭장이 아닌 맑은 햇살 아래서 사료를 먹는 닭의 기분도 이러했을까.


어제저녁에는 그것도 모자라서 부크크 출판을 기웃거렸다. 출판사의 운영 사정을 어느 정도 파악하니 미등단 작가의 시집을 찍어내는 건 거의 불가능에 가깝다고 판단했기 때문이다. 아마 지금 내 삶에서 가장 신경 쓰고 있는 부분이 출판이기 때문이겠다. 어떤 방식으로든 내 책을 받아 손으로 쥐기 전까지는 이 갈증이 해소되지 않을 것이다.


한 친구가 물은 적이 있다. 이미 여러군데 글을 쓰고 있으면 됐지 왜 그렇게 메이저 출판사 투고와 책 만들기에 열을 올리는지. 나의 대답은 '그게 다른 아무 이유 없이, 내가 하고 싶은 거니까'였다. 이게 내게는 직장생활, 사회생활처럼 먹고 사는 문제가 아닌 순수한 목적으로 열심히 할 단 한가지였다. 다른 사람들에게도 모두 '살아있다'라고 느끼게 하는 생명의 포인트가 있을 거다. 단순 존재를 뛰어넘을 수 있는, 보이지 않는 목적을 달성했을 때 느껴지는 양질의 존재감. 어쩌면 그게 진짜 한 생명을 살게 하는 것 아닐까.


말라버린 화분을 다시 들여다본다. 어쩌면 그냥 눈을 맞고 얼었다 녹았다거나, 단순히 수명이 다했을 수도 있겠다. 그래도 조심스레 그의 마지막 역할에 애도해본다. 한 철 예쁘게 피어나는 것을 넘어, 생명력에 대한 예쁜 생각을 한번 더 하게 해준 화분에게 감사하며. 이파리는 말랐지만 네가 전해준 생기있는 삶에 대한 생각은 아주 오래 남겨두겠다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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