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지가지해야 살아지는 세상
나무의 꿈
늘 같은 하늘색이 지겨워
내 세상만큼은
초록으로 물들여야지
나무는 그런 다짐으로
한 뼘씩 몸통을 밀어 올렸으리라
절벽을 오르는 등산가
살아남기 위한 처절한 손끝처럼
공중을 붙잡고 뻗어가는 가지, 가지
맥락도 없이 이리저리 넓혀야
더 피워낸다고
한두 잎이라도
초록으로 부푼 한 그루 살기 위해
뿌리부터 밑동으로
밑동에서 가지로
부지런히 모의했으리라
세상을 바꿀 생장을
초록으로 가득 찰 저만의 세상을
겨울이 끝나갈 때면 퇴근길이 한층 더 신난다. 어제의 6시와 오늘의 6시 하늘색이 다르다. 캄캄했던 하늘이 어스름해지더니 이젠 꽤나 밝아졌다. 노동 시간은 같았지만 왠지 일찍 회사를 나서는 느낌이 들어서일까. 현관문이 열리고 밝은 하늘을 마주해 신선한 바람을 맞는 순간, 마음으로 외친다. '오늘도 퇴근은 상쾌하구나.'
이런 날이면 길가의 나무를 찍는 재미는 배가 된다. 아무리 해가 짧아졌어도 일곱 시 반 정도면 또 한가득 어두워지기 때문에 발걸음을 재빨리 해야 한다. 정동길로 걸어가는 시간에만 가로등이 한두 개씩 켜졌다. 앞에서 찍은 사진을 뒤에서 찍으려는 그 잠깐 사이에 하늘색이 달라져있다. 이럴 때는 달라지는 하늘색을 배경으로 혈관처럼 쭉쭉 뻗어나가는 나뭇가지를 찍는다. 파란 종이에 먹붓으로 난을 친 듯 예쁜 사진이 찍힌다. 그래, 너무 늦은 시간엔 안된다. 가지도 선명히 안 보일뿐더러, 내 카메라는 겨우 가로등 빛 번짐 하나 못 잡는 아이폰이기 때문이다.
신나게 사진을 찍고 집에 돌아와도 왠지 기운이 팔팔하다. 아직은 3월. 신년에 계획해서 시작한 것들이 아직은 추진되고 있을 시기. 집에는 오픽 문제집과, 그림 공부를 하기 위해 결제한 온라인 강의와 판 타블렛, 그리고 한가득 사고 또 선물 받은 책들이 쌓여있다. 플스5를 좀 더 즐길 요량으로 결제한 철권 7 타이틀도 빼놓을 수 없다. 티브이 옆에는 작년에 취미용으로 사둔 건반과 직장인용 피아노 연주곡 책, 유화 그림 세트, 캘리그래피 세트, 요가매트, 짐볼이 비친다. 오늘 찍은 나뭇가지 사진이 오버랩처럼 겹친다.
'가지가지한다'. 어쩌면 나에게 이리 꼭 맞는 말이 있을까. 아니, 나 말고도 5~6년 차 직장인이라면 모두 공감할 게다. 퇴근 후에 뭐라도 해보려고 야심 차게 산 물건들이 집안 한 구석에 쌓여있다. 한때 내 퇴근 후 삶의 신조는 '취미란 돈 주고 사는 것'이었다. 집안에 쌓이지 않은 헬스장이나 요가학원 티켓, 마사지샵 이용권 등을 합치면 아마 나의 현재 예금잔고와 맞먹을 만한 돈이 들었을지도 모른다. 누구는 응원하고 누구는 돈 낭비라고 했다. 모르는 소리, 내가 모르고 있던 피아노 실력이나 그림 실력이 드러나면 몇백 배는 더 벌지도 모르는데. 잔소리하는 친구에게 마음속으로 말대꾸를 했다. 모두 근거 없는 자신감에서 비롯된 것이다.
평생직업은 물 건넌 지 오래, 이제는 살면서 2~3개의 직업도 모자라다. 아니, 얼마 전엔 주 5회 8시간씩 회사에 꼬박꼬박 나가서 일을 하는 것만큼 바보처럼 사는 사람이 없다고도 생각했다. 모니터 앞에서 키보드를 두들기고 양손으로 전화기를 받지도 않으며 돈을 버는 사람이 너무 많았다. 누구는 슬라임 가게를 열었대고, 누구는 인형 꾸며주는 일로 인기를 얻었단다. 쉽지 않은 길이었겠지만 유튜브로 꽤나 안정적인 수입을 얻는 사람도 몇 다리만 건너면 만날 수 있다.
"그림을 배우는 김에 카카오톡 이모티콘도 그려서 등록해볼까?"
아직 확신이 없는 직장인 1번인 나는 오늘도 집에 와서 곁다리 가지를 하나 더 놔본다. 이 가지가 선 하나만 긋고 말아 버릴 확률은 꽤 높다. 지금까지도 여러 번 그래 왔으니까. 그럼에도 불구하고 퇴근한 직장인이 피곤한 몸을 세우고 이런저런 취미를 하나라도 더 벌리는 이유는 나무의 생장과도 같을 것이다. 봄의 새순만이 생명의 탄생이 아니라, 살면서 만나는 잔가지같은 기회도 마치 다시 태어난 듯 새로운 인생을 선물해줄 수 있을 테니까. 굵직하고 단단하게도 버텨온 인생, 내게도 어쩌면 또 다른 길이 있지 않을까, 좀 더 삶의 재미를 찾아서 살 가능성이 있지 않을까. 아주 작은 희망과 에너지로, 간질간질한 마음으로 인생에 곁가지를 쳐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