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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아마추어리 Apr 05. 2022

[정동길] 퇴근, 그 슬프고 아름다운 역사

매일 정동길로 퇴근하는 광화문의 후예들

정동길


적색 벽돌

어둠에 바래지고


금색 가로등

인도를 수놓으면


먹색 가비

줄 서서 먹던 가게

하나둘 숨이 멎는다


실은 할머니인

황색 소녀 동상

이제야 한 숨 돌린다


터만 남은 프랑스 공사관과

주한 노르웨이 대사관 표지판 사이로

개나리 핀 예원학교

새싹 돋는 이화여고


허전하고 아름다운 그 길을

가방을 꼭 쥔 대머리 아저씨가

봄옷을 꺼내 입은 여직원이 걷는다


슬픈 역사를 세워두고

정동길은 퇴근길이 되었다


시간은 속절없이 흐르고

그 틈새로 사람이 걷는다



우리 회사는 경희궁 인근에 있다. 새문안로부터 종로로 이어지는 광화문  복판에 대기업 건물이 즐비하다.  건물이 2~30층은 우습게 솟아 있으니,  동으로만 쳐도 이 근방 회사원 몇이나 될까. 점심시간에 국수  그릇 먹기 위해  줄이고  줄이고 줄을  있으니 수천 명은 우습지 않을까 싶다.


정동길은 언제 걸어도 정겹다. 오래된 붉은 벽돌 건물은 참 한국적이면서도 서양미를 갖췄고, 내 키만큼 낮은 담장은 마음을 편안하게 만들어준다. 560년이 넘도록 한 자리를 지키는 보호수인 회화나무도 있고, 근사한 대사관도 있다. 사람만 한 동상도 있다.

어느 날은 퇴근 후에 정동길을 한 시간 정도 운동 겸 걸었다. 마침 봄이 와서 드문드문 개나리나 매화꽃이 피었다. 정동길과 덕수궁길, 서소문로길로 갈라지는 서울시립미술관 앞에는 그런 봄꽃이 피는 나무가 작품처럼 서있다. 매화나무 한 그루, 홍매화 나무 한 그루, 벚꽃나무 한 그루... 모처럼 밝아진 퇴근길을 걷던 직장인들이 하나둘 발걸음을 멈추고 사진을 찍는다. 그리고 몇 걸음 걸어서 다음 나무로 간다. 차례차례, 전시회 스텝으로 앞선 이의 움직임을 살피며 걷는다. 묘한 동질감에 기분이 배로 뿌듯해진다.

미술관 1층을 잠시 둘러보고 내려오는데 덕수궁 돌담길에 불이 켜진다. 연인과 같이 걸으면 헤어지는 길이라더니, 마냥 예쁘다가도 지루하게 뻗은 길에 고개가 끄덕여진다. 깊은 대화 속 오가는 서로의 의중만이, 이상하게 쓸쓸함이 느껴지는 그 길의 유일한 길동무가 되어주었던 건 아닐까.

퇴근버스를 타기 위해 정동사거리를 지나 다시 서대문역으로 향한다. 동서남북으로  있는 의경은 아직도 미동 없이 나무를 찍는 사람들을 구경한다. 저들은 하루에  명이나 이렇게 사랑스러운 사람들을 관찰할까. 꽃이 만개한 어떤 날에는 느닷없이 튀어나가 사진을 찍고 싶어 지진 않을까. 이제는 나보다 한참 어린 의경 '아저씨'들에 대한 생각도 한다. , 확실한  하나 있다. 해가  지고 캄캄한 밤에 찍는 봄꽃이 원래  예쁜 . 어쩌면 푸른 하늘에 대고 역광 사진을 피해 여러  셔터를 눌러대는 우리를 속으로 비웃고 있을지도.

각종 교회와 학교를 다시 둘러보며 걸으니 어스름이 진다. 퇴근하는 직장인도 점점 안 보일 때쯤, 문득 저물어간 역사가 궁금해진다. 고풍스럽고 아름다우며 대한민국에서 손꼽는 걷고 싶은 길, 정동길. 인도 곳곳에 세워진 팻말을 읽어도 영어와 한자, 숫자가 뒤엉켜 이해하기가 어렵다. 길 한복판에 역사를 건물로 켠켠히 남겨뒀는데 알지를 못한다.

퇴근을 앞둔 평일 다섯 . 사무실에서 조용히 정동 역사를 검색해본다. 구한말부터 일제강점기에 이르기까지 서울의 근대 역사를 간직하고 있는 . 영어수업을 비롯한 신문화, 신교육이 시작된 상징적인 장소들이 있고, 대한제국의 외교권을 빼앗긴 가슴 아픈 역사의 장소도 있단다. 최초의 개신교 건물과 최초의 근대식 극장을 복원한 정동극장도 있다. 나는 오늘도 역사와 문화, 감성을 간직한 정동을 둘러보며 퇴근하는 회사원 사이에서  시간은  걸을 예정이다.

아무리 아픈 역사도 시간이 흐르면 근사한 공간으로 바뀌고, 아무리 세련된 건물도 시간이 지나면 고즈넉한 풍경으로 변한다. 조국 흥망의 역사가 이러한데 직장인의 하루는 어디에 비빌쏘냐. 오늘 얼마나 짓궂은 상사가 있었든, 비열한 동료가 있었든 시간이 지나면 어떻게든 바래지겠지. 잠시 역사를 잊고 살았어도,  터전을 물려받은 우리는 생이라는 역사를 딛고 오늘도 한걸음 한걸음 앞으로 나아간다.


그리고 새마음으로, 새 역사를 써가라고 봄꽃을 피워내는 이 길과 땅에 감사함을 느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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