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아마추어리 Apr 18. 2022

[너와 내가 책 사이로 남겨둘 것들]

지는 목련과 피는 라일락을, <우리들의 블루스>의 은희와 한수를 보면서

너와 내가 책 사이로 남겨둘 것들


우리 아껴두자

아무도 기억하지 않는

혼자만의 영광처럼

과거 안에 꿋꿋이 빛나고 있는

그 예쁜 날들을 꺼내어

시시한 무용담으로 만들진 말자


우리 약속하자

매년 거름 되어 잊히는

한 철 계절꽃처럼

예쁠까 들여다보면

가슴 아픈 사이는 되지 말자


우리 아까운 사이는 되지 말자

이뤄지지 못했던 지난한 날들은

차라리 아무 책에나 묻어두고


비 오는 날 툭 꺼내보는

신선한 사이가 되자


영원히 바래지 않는

선명한 여운이 되자




여러 우연이 한날한시에 찾아와 마치 삶의 한 부분이 운명처럼 느껴질 때가 있다.


이 모든 건 '꽃이 지는 걸 올봄에는 눈여겨봐야지' 하고 다짐한 그때 시작됐다. 퇴근길에 무심코 찍던 왕벚나무와 매화나무, 목련이 있던 곳을 더듬더듬 찾아갔다. 꽃이 활짝 피었을 땐 그 자체로도 시선을 끌고, 나무를 빙 둘러싼 사람들 때문에 그것들이 어디에 있는지 모를 수가 없었다. 그런데 맙소사. 아는 길이라 자부하며 걷다 보니 나도 모르게 그 나무를 지나쳐버린 게 아닌가. 앙상하게 가지만 남은 그 매화나무는 전혀 딴 판의 모습을 하고 길가에 덩그러니 서 있었다. 길가의 사람들이 뼈만 남은 그 나무를 쌩 하고 지나쳤다. 허무. 아름다움은 허무만을 동반하는 것일까. 일순간에 존재감 제로가 돼버린 가로수를 보고 생각했다. 봄 기분 내기에 극성인 사람들에게 온갖 기를 다 빨리고 초라하게 선 모습이 가여웠다. 낙화의 순간에도 흩날리는 벚꽃잎이 아름답다 했겠다마는, 그다음은?... 며칠을 생각하다가 결론을 내렸다. 쓸쓸함은 나 혼자 내린 감정. 나도 참, 수천 년을 그렇게 지내온 자연을 보고 이런 상념에 잠기다니 감히 허튼짓이다.


풍성함은 어디 가고 쪼글쪼글한 흔적만이 남아 있다. 사람들은 아무렇지 않게 그 나무를 지나간다.


정동길 벚나무를 본 다음에는 목련을 보러 갔다. 목련은 벚꽃보다는 오래 피는지 아직 나무에 꽃의 흔적은 남아있었다. 대신에 바나나 줄기처럼 한 잎씩 죽죽 떨어진 흰 꽃잎이 검게 녹아 물들어 있었다. 이젠 봄꽃 사진을 찍으려는 생각도 없이 퇴근버스를 향해 뛰어가는 사람들 사이에 쪼그려 앉아 사라지는 목련 잎을 찍었다. 아니, 오히려 무단횡단을 해서라도 이쪽 길은 피하려는 듯한 느낌이었다. 가을철 은행나무 길을 피해 다니듯이. 공원이나 흙밭에 뿌리내린 나무였다면 부드럽게 녹아 거름이든 뭐든 됐겠지만 내일 새벽이면 도시 청소부의 쓰레받기로 들어갈 것들이다.



 이번 주 토요일에는 우연히 <우리들의 블루스>라는 드라마를 봤다. 화려한 출연진에 관심을 가졌다가 첫방을 놓쳐서 나중에 몰아 봐야지 했는데, 잠깐 눈길을 사로잡은 것이 한 편을 뚝딱 다 보게 만들었다. 1화부터 3화까지는 '은희와 한수' 이야기가 나온다. 은희에게 한수는 첫사랑이다. 한수도 그때를 좋은 기억으로 가지고 있다. 씩씩한 은희에게 실패한 첫사랑의 기억은 아련하긴 해도 미처 꺼내지 못할 말들은 아니었다. 소주 한 잔에 킬킬대며 수다의 소재로 삼기도 하고, 한수에게 대놓고 내 인생에 남자는 너밖에 없었다고, 그때가 내 청춘의 피크였다고 말한다. 은희이기에 가능했던 일들이겠지. (사실 이 드라마의 감상과 더 잘 어울리는, 예전에 써둔 시가 떠오르긴 했는데 마저 쓴다.) 아무렇지 않게 지난날의 행복한 기억을 꺼내 드는 그녀가 참 낯설기도 하고 대단하게 느껴졌다. 오히려 나는 한수와 같은 시선으로 과거의 행복을 다루고 있었다. 그때와 비교하면 지금의 나는 너무 낡았고 초라해 보이니까, 슬퍼지기만 하니까 회피하려고도 했다. 그런 마음으로 예전에 이 시를 썼다. 결국 다시 만난 날카로운 첫사랑의 기억은 그들의 손과 발에 상처와 허무만을 남겨줬지 않은가. 지나간 마음을 곱씹어봤자 마음만 아려오지 않나. 거짓 없는 두 눈으로 마주 앉아 그때만을 추억하기엔, 이제 서로에게 너무 많은 사정이 있지 않던가.


그럼에도 한수가 바닷물에 둥둥 떠 과거의 순수를 그리워하는 모습을 볼 때는 눈물이 났다. 겨우 서른 줄에 이러면 어쩌지, 하면서.



목련꽃이 있는 상가 맞은편엔 이름 모를 중학교가 하나 있는데, 거기 담장엔 라일락이 풍성하게 피었다. 아, 맞아. 코로나 전에, 막 더워진 여름밤, 헬스장에서 돌아오는 길에 라일락 향을 맡으며 기분전환을 하곤 했는데. 지는 꽃 맞은편에선 벌써 다음 계절을 준비하고 있었다. 한 철 지난 묵은 꽃 앞에 쪼그려 지난 기억에 아파할 때가 아니라, 살아있는 다음 기억을 찾아 앞으로 걸어가라는 듯, 라일락 꽃은 담장에 길게 피어 있었다. 봄꽃에 미련을 가지느라 눈앞의 더 향기로운 풍경을 못 보고 있던 거다.


드라마에서 한수도 은희도 결국 상황을 종결하고 다시 각자의 삶으로 돌아간다. 추억여행을 떠날 즈음 생긴 상처는 서로 간의 오해를 풀어가며 아물어간다. 너무 아름다웠던 한 철, 제 아무리 찬란해봤자 이미 그 시절은 끝났다고 도장을 쾅 내려 찍는다. 이제 두 사람은 새로운 관계가 됐다. 아련한 첫사랑의 대상이 아니라, 이제는 의리 있는 진짜 친구로 남는다.


그러나 이런 시를 쓴 나는 무작정 은희가 아팠다. 들춰내 바래질 추억이라면 애초에 만나지도 이야기하고 싶지도 않을 것 같다. 드라마에서야 그렇게 끝이 났고, 어쨌든 나보다 나이도 많아 성숙해 그런지는 몰라도 내가 너무 좋게 간직한 추억을 어른의 사정이라는 다른 기억으로 덮어진 것이 안타까웠다. 내게는 나만의 아름다운 기억을, 혼자 의미 부여하고 혼자 해석한 사랑을 마음대로 간직하고 지킬 권리가 있지 않은가?


그럼에도, 은희는 노래를 흥얼거리며 주먹밥을 만들고 제 삶을 살아나간다. 봄꽃이 피어야 그 꽃이 지고, 그 꽃이 져야 맞은 편의 여름꽃에 눈이 가듯이. 세월의 상처를 순서대로 받아들이며 시간을 살아나간다. 가슴속 미련을 속 시원히 떨쳐낸 사람처럼.


오늘도 정돈되지 못한 글을 마치며 비로소 고민을 시작한다. 피고 지고를 반복하며 지나가는 계절과 하이퍼 리얼리즘이 반영된 지독한 드라마를 보면서, 대체 시간을 산다는 건 어떤 일인가. 나만 이렇게 미련한 마음을 품고 사는가.


혹은, 굳이 황량해진 봄꽃나무를 찾아가 그 허무함을 두 눈으로 확인한 나도, 지난 추억에 대한 미련을 버리고 살 용기가 필요했던건 아니었을까. 삶은 때로 바래고 다치며 다음 철로 나아간다는 걸 이제는 알아야만 했던 건 아니었을까.

작가의 이전글 [정동길] 퇴근, 그 슬프고 아름다운 역사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