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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아마추어리 May 26. 2022

[드라마] 드라마 속 빌런이 사라졌다

나쁜 사람이 없는데, 왜 더 피곤한 거죠

드라마


지금 내 옆에

나쁘기만 한 사람이 필요해


모종의 이유 따위가 통하지 않는

어떤 각도로도 이해되지 않는

정확한 빌런이 필요해


쉽게 미워하고

쉽게 싸우고

이해하지 않아도 되고

사정을 듣지 않아도 되는


마음껏 패고

뼈까지 씹고 부수며

그의 죽음에 통쾌해도

한 치의 죄책감이 없어도 되는

공식적인 빌런이 필요해


너와 함께

네가 아닌 세상의 온갖 오물을

적폐를 위선을 의무를

편견과 무례함을

시원하게 패대기친 후에


네 은혜로움을 알고

다시 겸허한 마음으로

모든 사람을 용서하고

이해하고 베풀며 살도록


요즘 드라마 이야길 하기엔 시청 폭이 좁다는 것은 안다. 다만 며칠 전에는 이런 일이 있었다. 나이 지긋한 인생선배와 낮술 한 잔을 걸치며 곧 종영하는 드라마에 대한 아쉬움을 토로하고 있었다. 그분은 꽤 유명한 드라마 작가와도 아는 사이어서, 종종 작가진이나 플롯에 대해 다양한 시각을 공유한다고 했다.



"우리들의 블루스는 안 보세요?"

노희경 작가의 드라마는 당연히 보셨을 줄 알았는데, 그녀는 거세게 손을 휘저었다. 그 작가의 작품은 뭔가 가르치려 들려고 하는 선민의식이 투영돼있어 불쾌하다는 것이다. 누군가는 다뤄야 하는 사회적 이슈, 그 어려운 걸 내가 말하고 있다, 라는 느낌이란다. 덧붙여 옴니버스식으로 구성돼 그 소재로만 따져도 이슈가 네댓 개는 된다. 한번 주행을 시작한 드라마를 안 챙겨볼 수가 없어서, 의리로 TV 앞에 앉지만 피로감을 지울 수 없는 이유를 느끼게 됐다.


그것도 그렇지만 '요즘' 드라마엔 이런 특징이 있다. 성악설을 주장할 만큼 뼛속부터 나쁜 빌런이 없다.        

나 어릴 때 봤던 드라마에는 꼭 '착한 편'과 '나쁜 편'이 나왔다. 여기 악역은 누가 맡았네,부터 확인하고 시청을 시작했다. 연기를 너무 잘해서, 드라마 속 캐릭터가 찢어 죽일 놈이라서 연예게 생활은 물론 일상생활을 지속하기 어려운 배우도 많았다. 그때는 악역에 손가락질과 온갖 욕을 해대면서 드라마를 보며 고통스러워했다.


허나 요새 드라마는 악역이 없어서 더 피곤하다. 주인공(요새는 3~4명, 심지어는 더 많은 인원이 공동 주연을 맡기도 한다. 사실 이것도 피로 유발의 지점 중 하나다)을 괴롭히거나 심난하게 만드는 자들이 온전히 나쁜 놈들은 아니다. 흑발 머리에 레드 립을 한 치명적이고 자극적인 드라마가 나오더라도, 그들마저 개인적인 사정이 있다거나, 결핍이 있다거나 하는 안쓰러운 서사를 꼭 가지고 있다. 그래서 마음껏 대놓고 욕하지도 못하겠다. 역으로 그런 캐릭터가 더 인기를 끄는 경우도 생긴다. <내 이름은 김삼순>에서 서 려원이 맡은 원조 김희진이 불쌍하다는 사람, 로맨스물의 서브 캐릭터가 애잔해서 '서브병'에 걸려버리는 사람들이 그 예다. 그래도 그 정도면 양반이다. '주인공이 제일 빌런'인 드라마도 수두룩하니까.


대표적인 서브병 유발자들. 예전엔 메인커플의 러브라인을 방해하는 빌런 취급이었지만, 요새는 서브병 한 번만 제대로 터지면(?) 스타덤에 더 빠르게 오르는 듯 하다.


세상이 다원화되고 취향이 다양화돼서 드라마 속 인물들도 풍부해진 걸까. 나는 예전 같은 심플함과 강렬함이 없어진 것만 같다. 드라마란 무엇인가. 위키백과에서는 현실을 담은 극의 장르라고 말한다.


드라마: 정서적 정서적인 주제를 다루는 현실적인 등장인물의 성격 묘사를 바탕으로 하는 장르이다. 가장 범위가 넓은 장르로 로맨스, 스포츠, 시대극, 범죄와 같은 하위 장르를 포함하고 있다.


하긴, 현실에서도 마찬가지다. 세상을 살아보니 어쩌다 한 번 찢어 죽이고 싶은 놈은 있어도 온전히 나쁘기만 한 놈은 없다. 회사에서 괴롭히는 상사도, 더럽게 말 안 듣는 거래처도, 갑질이 하늘을 찌르는 클라이언트도 그래야만 하는 이유가 있다. 윗사람이 시켜서 그런 거겠지, 그들도 사람이니까, 하면서 그렇게 화가 나는 마음을 잠재우고 살아간다. 한 편으론 억울하다. 나를 기분 나쁘게 하는 사람들. 나를 화나게 하는 사람들에게 속 시원하게 "그만 괴롭히라고!!!!" 소리 지르지 못하고 그들을 이해하려 애쓰고, 인내하고, 관용을 베풀어야 한다는 것이 서러운 때가 있다. 특히 예민하고 섬세한 사람들은 더욱 그럴 것이다. '과연 내가 저 캐릭터에게 돌을 던질 수 있는가?'라는 고민부터 시작해 드라마보다 더 깊은 성찰에 들어가게 되는 수도 있다.


광기 어린 조커도 슬픔의 내러티브를 가지고 리메이크가 되는 이 세상에, 가끔은 무식하고 클래식한 빌런들이 그립다. 마음껏 손가락질하고 욕하며 속 시원하게 한 방 날려주어도 불편하지 않은 악 중의 악당. 미운 사람을 다각도로 이해하고 넘어가지 않는 경험을 하고 싶다. 이쯤 되면 밤낮을 바꿔 김치 싸대기를 날리는 아침드라마를 보는 게 해결책인가 싶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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