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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세만월 Jun 01. 2023

어머니 전 상서; 부활과 엘비스 프레슬리를 바칩니다

감정 알아차림(on 나의 논문심사일)


아이가 그린 무지개와 함께

아래 두 곡을 어머니에게 바칩니다.




꽃이 필 때 꽃이 질 때

사실은 참 아픈 거래

나무가 꽃을 피우고 열매를 달아줄 때

사실은 참 아픈 거래......


이 세상엔 아픈 것들이 너무 많다고

아름답기 위해선 눈물이 필요하다고

엄마가 혼잣말로 하시던

얘기가 자꾸 생각이 나는 날......                                           

   - 부활, <친구야 너는 아니> 中-


Like a river flows 강물이 흐르면

Surely to the sea 바다로 가는 게 당연하듯

Darling, so it goes 우리 사랑이 그래요

Some things are meant to be 운명 같은 것들이에요


Take my hand 내 손을 잡아요

Take my whole life, too 내 모든 삶을 그대에게 바칩니다

For I can't help falling in love with you 그대를 사랑할 수밖에 없으니까요

   - 엘비스 프레슬리, <Can't Help Falling in Love> 中-




오늘 논문 심사일이다. 한 시간 뒤면 논문 심사를 받는다. 논문을 출산의 고통에 비유한다고 하는데, 솔직히 말하면, 우리 아이 낳았을 때보다 더 아픈 시간들이었다. 버텨내는 데 너무나 많은 일들이 산적해 있었기에 오늘 심사를 받기까지가 그냥 대견 그 자체이다. '잘했어. 그동안 잘 버텼어. 대견하다' 하고 나 자신에게 칭찬해 주었고, 교육분석 시간 때도 상담 선생님이 나를 칭찬해 주셨고, 나에게도 나 자신을 대견해하라고 지지해 주셨다.


어제 인터뷰[수업 과제]를 마치고, 하루 더 나가면, 엊그제 아이 아빠를 두고 엄마가 육두문자를 써서 아이 앞에서 그러지 마시라며 다투다가 아이가 울어버렸다. 그러고 난 다음 날 엄마를 인터뷰했다.


나의 논문이 나오기까지 교육분석 시간 내내 나는 그랬다. "논문 심사를 앞두고 있는 지금 기분이 어때?"라는 질문에 항상, "내 피땀과 영혼을 갈아넣은 기분이에요"라고 말이다.


그런데, 어제 엄마와의 인터뷰를 마치고, 엄마의 희생, 그 무거운 책임감으로 내가 논문을 쓸 수 있었고, 모든 시간을 지금까지 이렇게 버티고 왔구나! 하고 깨달았다.


꽃을 피우기까지 아픈 거라고 

다독이는 부활의 노랫말이 

엄마의 희생을 떠올리게 했다. 

모든 것이 아름답기까지, 

우리 아이가 잘 자라기까지, 

내가 이렇게 두 발로 서서 

그간의 많은 힘든 일을 잘 헤쳐나가기까지 

그녀의 희생으로 가능했다. 

엘비스 프레슬리의 사랑 노랫말처럼 

자신의 모든 삶을 내게 바치셨다. 

나를 사랑할 수밖에 없으셨다. 


# 면접교섭권으로, 아이가 아빠를 만나는 날에는, 엄마는 나를 절대로 내보내지 않고, 자신이 아이 아빠와 만나 아이를 데려다주신다. 딸을 고생시킨 남자를 보고 오면 엄마는 마음이 심란하기만 하다.

# 대출원금을 꼬박꼬박 자기 딸이 내고 있는, 그 아파트에 아무 생각 없이 살고 있는 아이 아빠가 엄마는 꼴도 보기 싫다. 딸은 대출원금 갚느라 이혼 판결을 기다리며 매달 그 돈을 내고 있다. 자기 딸은 빚만 늘어가는데, 그 남자는 매달 양육비 60만 원으로 모든 것을 해결하고 있으니 가슴이 미어터질 노릇이다.

# 이혼 조정이 결렬되면서 판결을 기다리고 있기까지 횃수로 2년이 되었다. 그 시간 동안, 아니, 지금까지 거의 무일푼 아이를 돌봐주신다. 어린이집 교사만큼이나 잘 봐주신다. 책임감이다. 그리고 지난날 자신이 가장으로서 돈을 벌면서 나와 남동생을 돌보지 못했다는 생각에서인지 버거우리만큼 엄마를 누르고 있는 그 책임감으로 비롯된 마음으로 나의 아이를 첫돌 지나고부터 봐주셨다. 딸의 결혼식 때도, 아이 돌 때도 참석 못 하셨던 엄마이다.


엄마는 한 달 전, 성당에 나가시기 시작했다.

기댈 곳이 하늘에 계신 조물주밖에 없는 것 같다.

기댈 곳 없는 허망함과 버거움을

하늘에 목놓아 내려놓으려나 보다. 




공부를 잘했음에도, 제비 뽑기로 뺑뺑이로 학교 배정받을 수 있음에도, 가정형편이 어렵다는 이유로 엄마를 중학교를 보내지 않았다. 하지만 외숙모가 그래도 학교는 다녀야 한다고 해서 전수학교를 보냈다. 그리고 고등학교는 미인가 학교로 부기를 배우는 곳으로 진학했고, 3년 과정을 1년 반 만에 다 배웠다. 중학생 때 항상 전교 1, 2등을 했다. 그럼에도 학교와는 연이 없었다.


18세 때 회계일을 시작했다. 그리고 회계사셨던 이모부의 영향으로 세무사 사무실에 들어갔다. 우리나라에 77년도에 부가세가 생기면서 세무사 사무실에 들어갔고, 80년도에 결혼해서 그해 6월에 나를 배고 입덧이 심해 아빠가 회사 일 접고 광주 간다고 해서 쉬고, 나와 남동생을 6살, 5살까지 키우다가 86년도 5월 3일 재입사했다. 그 회사에서 10년을 더 일했다.


그렇게 10년이 지나고 세무사 사무소를 차려 사무장으로서 20년을 일했다. 세무사를 두고 직원들을 2~3명을 둔 작은 ceo로 20년을 보냈다. 그 시간 동안 나와 남동생 대학 학비까지 다 책임지셨고, 나는 어학연수까지, 남동생은 행정고시 준비 시기까지 모든 경제 활동을 책임지셨다.

 

IMF때도 거래처가 늘었고, 엄마는 인천에서 강남으로 왕복 4시간이라는 출퇴근 시간에 운전을 하며 그 시간을 버텼다. 아빠가 술을 먹고 한바탕 난리를 친 날이어도 새벽 4시까지 집안을 치우고 한 시간도 채 안 돼 5시에 출근했다. 당시 엄마의 양볼을 가득 뒤덮었던 기미를 잊을 수 없다.


엄마는 25살에 결혼했다. 그런데, 20살에 선자리가 들어왔었는데, 결혼하면 미국 가서 살아야 한다는 말을 들은 외삼촌이 그 선자리를 취소했다고 한다. 결혼하면 힘들어서 친정이라도 와야 할 텐데 미국살이를 어떻게 하냐고 취소했다는 것이다.

(엄마) "엄마 사주에는 결혼을 일찍 가거나 늦게 가거나 해야 했대. 25살은 어중간한 거지."

(나) "엄마는 미국 갔어도 잘 살았을 텐데."


(나) "엄마가 좋아하는 사람은?"

(엄마) "외손자 OO."

(나) "왜?"

(엄마) "왜긴 왜야, 그냥 정이 가는 거지. 이해타산적인 것도 없잖아."


(나) "엄마가 싫어하는 사람은?"

(엄마) "매일 옥신각신 하는 사람이지. 근데 그냥 딱히 없어. 그냥 나 자신이 싫어. 현재 내가 무능한 것 같아서. 내 무능함이 싫어."


(나) "엄마 성격은 어떤 것 같아?"

(엄마) "이렇게 불안한 거 있으면 조바심을 좀 하는 성격인데, 또 끈기는 있는 것 같아서, 나는 옛날에 힘들 때 까무러쳐서 쓰러져서 기절했으면 좋겠다는 게 소원이었어."

(나) "나의 끈기가 엄마한테 왔나 봅니다. 엄마 언제부터 그랬어? 어릴 때부터 그런 것 같아?"

(엄마) "아니 결혼해서 살면서 힘들은 거지. 결혼해서 살면서부터 방도 못 얻어서 반지 팔고 뭐해서 신림인가 영등포에 있는 거기에다가 60만 원의 월세를 얻었는데 장[옷장]을 샀는데 장이 안 들어가. 거기[그분이] 우리 결혼식에도 왔어. 그 아저씨 장이 안 들어가서 그냥 취소하고 내가 이거 다 팔아서 200 전세방을 엄마 옆에 대림동에다 얻었었지. 그때부터 뭐, 그때도 맨날. 어, 근데 그게 성격이, 근데 정말 안성에서 살 때 그때도 '뭘 할까?' 미용을 배우고 싶은데 그게 한 3, 40만 원이 든다는 거야. OO이[남동생]도 없고 집에서 있으면서 뭔가를 배워야 되는데 그러다가 그걸 못 했어."

(나) "그 미용을 배우고 싶었어?"
(엄마) "아니. 이게 내가 벌어야 되니까. 그러니까 사람도 다 끊고 살았던 거 아니야....... 몇 살이야? 안성 가서 사는 게 6살 저기 수색 가서 나도 뭐가 뭔지...... 안성은, 수색 가서 살다가 안성으로 왔다가 아빠일 엎어져서 저기로 왔을 거야. 이모 집 근처 목동 거기로 이렇게 왔을 거야."
(나) "아빠 그때 군인이었어?"
(엄마) "아니. 거기 뭐 연수원에 취직한다고 그래가지고 거기 월급도 못 받고 옛날에 군인 출신 해가지고 연수원 뭐 해서 직장인들 막 연수도 받고 그런 게 한참 했어. 전두환 때 근데 뭐 거기서 개척만 하다가 뭐 아무것도 없지 뭐. 그래가지고 그렇게 왔다가, 아, 대림도 그래서. 시골 갔다가 접고 그냥 올라와 버렸잖아.


응. 그래 가지고 이모 집 옆에서 막 이모가 쌀 대주고 다 해서 반찬 대주고 살다가 수색으로 갔다가 거기서 연수원 한다고 안성 갔다가 다 털어먹고 외숙모 집에 와서 6개월을 그 방에서 살다가 이모 집 옆에 월세 방 150에 6만 원인가 그거를 간 것 같아. 거기서 G 아파트를 내가 보증금 150에 해서 집을 사 가지고 간 거야."

 
(나) "엄마의 성격은 어떤 것 같아? 지금 얘기하는?"
(엄마) "한번 두 달을 계산을 했어. 혼자서 집에서 오류동에 모델하우스 가보고 맨나다 계산을 했는데 얼마를 계산했나? 이사 비용까지 맞췄거든. 그래 갖고."

(나) "그게 집착이라고는 너무 부정적인 것 같고."
(엄마) "한번 꽂히면 이게 뭐냐면 그냥 갖고 싶다 하면 갖고 싶은 사람들이 도둑질도 하고 하잖아. 근데 나는 어떻게 해서 이거를 해서 이 돈을 만들까를 고민을 한 거지."
(나) "그걸 어떻게 만들었어? 돈을?"
(엄마) "회사에서 세무사한테 돈 빌려달라고 그랬어. 아니, 아니야. 그때는 아니고, 재형저축 들어서 그거를 600만 원 대출을 받았어. 재형저축 옛날에 11.5프로가 싼 거였어. 그걸 받고 그렇게 대출받고 150 하고 뭐 하고 해서 1620만 원인가 뭔가를 집을 해서 대출받아서 샀고, 여기 D 아파트 할 때 분양 내가 이걸 내가 5년 안에 여기 버스 타고 부평역 오면서 여기가 이렇게 논이었잖아. 여기는 아파트 들어오겠다. 나는 여기 들어오면 내가 어떻게 해서든지 5년 안에 분양받아야지. 근데 4, 5년 안 돼서 그 분양을 받아야지 그랬잖아. 계약금 이제 우선 하고 그다음부터 아빠가 이제 보험회사 다닌다고 그래서 근데 백수였잖아, 3년을. 그러니까 이제 또 다 무너지잖아. 아, 그래가지고 세무사한테 가불을 천만 원을 해달라고 그래서, 그렇지 거기 10년 다녔던데, 그래 가지고 이제 갚고 나중에 그만둘 때 이제 그런 거 특별 퇴직금처럼 더 따로 그냥 퇴직금 받고 막 이래 가지고 그렇게 해서 거기서 9년을 살다가 그래도 1억 2천200에 팔아서 거기 2억 4천 들여서 온 거 아니야? 수리비랑 50프로 대출받아서 내가 버니까 이제 계산을 해 본 거지. 거기서 9년을 살았나? 많이 살았다. 9년 살았는데 두 배 오른 거지. 서울이 뭐 몇 배 올랐을 때."
(나) "응."  


(나) "부모님은 어떤 분이셨어?"

(엄마) "우리 엄마가 융통성이, 근데 우리 엄마 아버지가 너무 부지런하게 이렇게 없이 우리 아버지도 국민학교만 나와서 근데 다 농사도 했지. 회사도 다니면서 농사도 했지. 또 파도 해 먹는데 밭데기로 파는 거 하셨지. 우리를 먹여 살리느라고 참 고생 많이 했다. 엄마도 이렇게 O형인데 엄마가 융통성 있게 아기자기하게 잘하고 우리 묵 장사도 하고 묵 쏴서 맨날 다 갈아가지고 그 집에서 그러면 동네에서 가마솥에다 하면 동네에서도 사가고 이렇게 해서 다 묵 해서 팔고 우리 맨나다 맷돌질 같이 하고 그러니까 부지런하게 별것 다 하신 거 같아.
아버지가 좋지. 우리 동네에서도 호인이라고 법 없이도 산다고. 근데 아버지가 그 가죽 회사 그 기술자에서 고려 피역이라고 양평동 거기 회사 다니셨고 정년 퇴직하고도 다시 몇 년을 또 다닐 수 있었어. 근데 이제 신경통 때문에 다리 아파서 이제 못해서."

(나) "엄마가 손재주나 이런 거를 닮았나 보네."
(엄마) "엄마가 엄청 부지런하고 뭐든지 하시고 그러니까 엄마랑 나랑 집에 도배는 1년에 뭐 한 번씩 하잖아. 우리 거의 한두 번 엄마랑 나랑 했어. 엄마가 나 데리고 했어."

(나) "진짜. 그 이모랑 외삼촌이랑 막 있었잖아."
(엄마) "그 둘은 직장 다니고 이제 그러니까 항상 도배하면 내가 엄마랑 했던 것 같아."




[다음은 초반 인터뷰 내용이다.]


(나) "당신은 하루를 어떻게 보냅니까? 하루 일과를 듣고 싶습니다. 하루 중 가장 재밌는 시간은 언제고 그 이유는? 아니면 하루 중 가장 싫은 시간은 언제고 그 이유는?"
(엄마) "근데 그냥 짜증 나네. 나한테 이게."

(나) "하루 중에 재밌는 시간이랑 가장 싫은 시간이랑 재밌는 시간 없어? 엄마 텃밭도 나가고 그러잖아."

(엄마) "아니, [그건] 그냥 잊으려고."

(나) "수영도 하잖아."
(엄마) "나는 하면 책임으로 그냥 하는 거야. 기계적으로."
(나) "재밌어서 하는 건 없어?"
(엄마) "없어."
(나) "그러면 가장 싫은 건 뭐야? 가장 싫은 시간."
(엄마) "이런 거 물어보면 안 되는데, 나 그냥 붕 떠서 살고 있는데."
(나) "얘기해 봐."
(엄마) "나?"
(나) "응. 하루 중에 가장 싫은 시간, 그 이유는?"
(엄마) "아니, 그렇게 시간 단위로는 그런 게 없는데. 그냥 밖[현관문 앞 복도]에 앉아서 밖에 내려다보고 있는 게 제일 좋아. 그냥 좋고."
(나) "이유는?"
(엄마) "응. 이유는 다른 생각을 안 하네. 아무 생각을 안 하고 있을 수 있어서."
(나) "그럼 가장 싫은 게 있을 거 아니야 하루 일과 중에."
(엄마) "우리 식구들하고 대화하는 거. 그래서 다음부터는 이제 말을 안 해야지 그렇게 다짐을 하는데 또 깜빡깜빡 잊고 얘기를 하지. 대화, 식구들하고 대화."
(나) "이유는?"
(엄마) "응."

(나) "이유는 무엇입니까?"
(엄마) "안 통하니까 그렇지. 나보러 안 통한다고 그러니까. 이게 뭔가 대화가 오가지를 못하니까 그냥 혼자서 다 삼키는 것 같아."




# 기말과제는 '이해되지 않지만 친해지고 싶은 대상을 인터뷰하는 것'이었고, 나는 엄마를 인터뷰했다.

# 어제 인터뷰를 마치고 오늘, 지금 인터뷰를 정리 중이다. 오늘은 나의 논문심사일이기도 하다.

# 엊그제, 인터뷰하기 전날 아침, 면접교섭권으로 지난주 아이 아빠와 시골에 가서 시간을 보내고 온 아이가 피곤했는지 화요일 아침 어린이집 가려고 일어났는데 머리가 아프다고 했다. 엄마는 외손자의 '머리 아프다'는 말에 딸을 고생시킨 아이 아빠에게 화가 났다. 아이 앞에서 육두문자를 내뱉는 것을 나는 저지시켰고, 그 과정에서 엄마와 나는 말다툼했고, 아이는 울었다.

# 1~2주 전부터 듣던 음악을 오늘 아침에도 들으며 KTX를 타고 학교로 왔다. 부활, <친구야 너는 아니>란 음악이었다. 엘비스 프레슬리의 음악도 있었다. 기차 안에서 흐르는 눈물을 멈추지 못했고, 결국 손수건을 얼굴에 올려 놓고 그냥 울었다. 소리는 내지 않았지만 엉엉 소리를 내는듯이 눈물을 쏟아냈다.




인터뷰 이후 엄마가 인생을 마주하고 있는 먹먹함이 계속 내 머릿속을 떠나지 않았다. 그러던 중에 부활의 노랫말이 나를 울려버렸다. 어머니에 대한 감사함, 미안함, 측은함이었다. 엘비스 프레슬리의 사랑 노래도, 어머니의 무한한 책임감과 희생으로 대신하여 들렸다. 연인 간의 사랑 노래로 들렸던 애틋함이 엄마에 대한 안쓰러움으로 들렸다. '그대의 모든 삶을 내게 바친 그녀에게'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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