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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세만월 May 05. 2024

인생의 기회; "죽음-기회-놀라움"

영화 <피아노 piano>에서

벙어리 여인에게 자기를 표현하는 수단은 피아노였다.

말 못하는 여인에게는 대화가 되지 않는 남편이 있었다.

언어의 대화도, 몸의 대화도 되지 않는 남편이었다.

여인에게 자유의 표현은 피아노 건반 그 자체였다.

하지만 피아노 건반으로

자기의 모든 감정을 발산해야 하는 여인에게는

바다 한가운데 놓고 올 만큼 무겁기만 한 목재 피아노뿐이다.  

답답하다. 그마저 없이 산다는 건.

그래서 피아노를 바다 한가운데 버려두고 온 것은

자기를 방치한 것마냥 고독하다.


벙어리 여인에게 남자가 생겼다.

피아노를 딜로 삼아

검은건반 한 개에 남자의 요구를 들어주어야 한다.

피아노 검은건반 10개를 수락하고 남자와 몸을 섞는다.

하지만 남자는 피아노를 여인에게 아무 조건 없이 돌려준다.

여인은 집에서 마음대로 피아노를 연주한다.

하지만 뒤를 돌아보고 또 돌아본다.

검은건반 한 개마다 요구를 하던 남자의 소리는 없다.


피아노를 뿌리치고 남자에게 달려가

검은건반이 아닌 몸의 연주를 한다.

남편에게 갇혀 남자에게 갈 수 없다.

건반 한 개를 빼낸다.

자기 마음을 건반에 적어 사랑을 전하려 하지만 실패한다.

남편의 분노로 인한 도끼질로 손가락 한 개를 잃는다.


남편은 여인을 그 남자에게 보낸다.

피아노와 함께.

말을 하지 못하는 여인인데, 피아노 연주로, 눈빛으로

남편에게 말을 한다. 그를 사랑한다고.

말을 하지 못하는 여인에게 들리는 그 고백은

그 말을 무시하고 살 수 없을 만큼 강렬하다. 놀랍다.


남자는 무거운 목재 피아노를 싣고 바다에 배를 띄운다.

배 한가운데 목재 피아노가 서있다.

도저히 배가 앞으로 나아가지 않는다.

남자는 여자에게 중요한 피아노를 끝까지 가지고 가려한다.

여인은 피아노를 바다에 던지라고 한다.

던지라는 여인의 주장은 확고하다.

피아노를 바다에 던지고 피아노가 심연 깊이 아래로 내려간다.


여인은 피아노와 함께 심연 아래로 깊숙이 내려간다.

피아노를 묵고 있던 밧줄에 발이 걸린 여인이

따라 바다에 빠진 것이다.

하지만, 피아노가 배에서 던져지는 순간 밧줄이 풀리는 중에

여인이 한쪽 발을 넣는다.

그리고 깊고 어둔 바닷속

평생을 함께해 온 피아노와 무서우리만큼 고요한 정적 속에

극한의 두려움을 경험한다.

그리고 밧줄에 걸린 발을 빼어 밖으로 나와 숨을 쉰다.


여인은 정적을 깨뜨리고 남자와 영국에 정착하며

그녀의 삶을 산다.

피아노를 연주하는 열 손가락 중에

인조 손가락 한 개가 보인다.


엔딩 씬 내레이션이 들린다.

죽음, 기회, 놀라움, 침묵, 바다, 소리......


말 못 하던 여인이 피아노를 오롯이 연주하던 열 손가락

말 못 하던 여인에게 익숙했던 침묵

말 못 하던 여인에게 유일했던 피아노

자신을 대신했던 피아노를 버리고 선택한 남자

도끼로 잃어버린 손가락 한 개

말 못 하는 여인이 전하는 감정, 그리고 소리


엔딩 씬이 상상 속 내레이션인지

여인과 남자의 현실 속 내레이션인지

분간이 되지 않았지만, 이런들 어떠하리 저런들 어떠하리


나에게 남은 메시지는

죽음-기회-놀라움-침묵-바다-소리였다.

나의 삶도 우리네 삶도

죽음과 기회, 놀라움의 연속이다.

자기만의 침묵과 바다가 있다.

익숙한 소리가 있고 낯선 소리가 있다.

무서우리만큼 힘들고 갑갑하고 답답한 침묵도

어떤 때에는 우리의 생을 위해 필요하다.

깊이 빠져 허우적거리지만 잠시 그 정적을 경험하고 나면

바다를 경험하게 된다. 그리고 바다 밖으로 나오는 순간 정적은 깨진다.


우리는 바닷속으로 점점 내려가 두려운 정적 속에서

그 두려움을 마주하고 나서야

밧줄에 걸린 발을 풀고 나서야만 밖으로 나올 수 있다.

오랜 시간 함께해 피아노와 정적 속에서

여인은 깨고 나왔다.


우리가 삶이 힘든 이유는,

피아노를 바다 한가운데 버려두고 와야 하면

피아노를 영영 잃는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피아노를 연주하는 열 손가락이 온전하지 않으면

자기의 세상은 무너진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그러기에 '기회'라는 것은

'죽음'과 함께하며

'놀라움'을 선사한다.


인생을

무겁다고도,

가볍다고도,

덧없다고도 할 수 없는,

그래서 무섭다고도 할 수 없는 이유이다.


내가 두려워하는

정적 속 바다는 어디에 있는지

정적 속 바다를 마주하는 순간

삶을 살아가는 기회가 주어지는 것은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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