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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세만월 Aug 05. 2022

편협한 나의 단어, '귀인'

감정 알아차림<2022.7.22>

게슈탈트 이론상의 전면과 후면, 그리고

'귀인'이던 나의 동료


이혼 변호사를 선임하면서, 직장 동료들에게 내 사정을 이야기했다. 남편이 회사로 느닷없이 닥치기도 했고, 준비할 서류도 많았고, 학기말과도 겹치기도 했고, 바쁜 업무와도 겹쳐 직장 동료들의 도움이 필요했다.


그중 한 동료에게서 많은 위로를 받았다. 그 동료의 가족사에도 부모님의 이혼 문제가 있었고, 그의 주변에 이혼을 겪은 친한 친구들도 많았다. 그래서 나의 아이에게 필요한 말들, 힘든 상황을 겪고 있는 나 자신에게 어떻게 스스로가 해주어야 하는지 등등을 알려주며, 3~4개월간 나의 전담 상담사 역할을 해주었다.


그리고 한 달 뒤 두 번의 수술을 받았다. 월 초 맹장염 수술과 월 말 난소 혹 제거 수술. 그런데 그 동료가 맹장염 수술을 받은 적이 있었고, 또 난소 혹 제거술을 받은 친한 친구가 있었다. 그래서 역시나 병실에 있는 내내 그 동료에게서 위로받았다.


나는 그 동료에게 "나에게 정말 귀인이다" 하고 말했다. 여러 번.

당시 그 동료가 없었다면 참으로 힘들었을 것 같다. 정말 '귀인'이었다.

하늘에 조물주가 계시다면, 나를 보호해 주기 위해 이 동료를 나에게 붙여주셨나 하는 생각마저 들었다.


그 후 4개월 정도가 흘렀다. 하지만 지금은 '귀인'이 아닌, '하극상', '피곤한 사람' 등으로 표현되고 있다.

얼마나 편협한가!


내가 꺼내 놓았던 '귀인'이란 표현은 이기적인 마음으로 이랬다 저랬다 할 수 있는 의미가 아닐 텐데.......

나에게 '귀하다' 한 존재였을 텐데.......


직장 동료들에게서 나의 트리거trigger를 찾았고, 내가 마주하고 싶지 않은 나의 그림자를 직면했다고 글을 올린 적이 있다. 그리고 그 동료들이 문제가 아니라, 나의 문제였음을 마주했고, 그러고 난 뒤 나는 편해졌다고 썼던 내용이었다.


무엇이든 다 나의 문제로 갖다 대서도 안 되겠지만, 감사한 존재가 얼마 안 가서 정반대의 존재가 된다는 것은 뭔가 '획획' 변해 버리는 나의 문제이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이 감정이 들어선 것은 보름 정도 된 것 같다. 다른 급한 문제들을 다루다 보니, 교육분석 때 꺼내놓지 못했다. 이것을 들여다보고 싶다.



현재 나는 그 동료에게 미안함이 크다. 그리고 퇴사 시점을 확실히 정하지 못하며 나 스스로 괴로운 상황에서 그 동료에게 지금 느끼는 피곤함과 하극상과 같은 기분. 이것을 어떻게 바라봐야 할까.


얼마 전, 사례배분 심사에서 상담 시연을 하던 중, 그 동료가 제일 크게 올라왔다. 게슈탈트 이론에서의 전면과 후면처럼, 그간 직장 생활에서의 대인관계 문제를 얘기하면, 항상 오랜 시간 나를 힘들게 했던 퇴사한 직원이 생각났는데, 그간 그 문제를 오랜 시간 상담받다 보니 후면으로 갔다. 문제가 해결되면 후면으로 가고, 또 다른 문제가 전면으로 보인다는 것이 바로 이것이구나! 순간 떠오를 만큼, 영화의 슬로오 모션처럼 후면과 전면의 과정이 직접적으로 내게 다가왔다.


전면으로 떠오른 것은 그 동료였다. '이게 뭐지?' 싶었다. 당황스러웠다.


"현재 안정되지 않은 상황에서 대출까지 받으면서도 안정적인 수입을 포기하며 직장 내 관계들을 정리하고픈 주 이유는 무엇인 것 같으세요?"라는 질문에, 그 동료가 제일 크게 떠올랐다. 다른 부분들은 배경으로 천천히 작아지며 사라졌다.


전면으로 등장한 그 동료는 나에게 무엇일까!

이 문제를 해결하여, 그 동료가 후면으로 사라지는 순간을 경험하기를 바라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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