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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6일 여행을 마치며, 다시 한번

일상의 소소함(Feat. 일본과 중국에서)

by 세만월

집에 왔다.

어제는 박사과정 오티에 참석했다.

소논문 2개에 연구계획서 제출이란 말에

현실로 돌아왔다.


1학기 영어시험

번외로 전문가 자격증 시험들

2학기부터는 소논문 준비라는데


또 달려야 하는 그 과정을 알기에

긴 여행 후 피로감을 느끼며

과연 내가 할 수 있을까 두려움이 몰려왔다.


한 교수님이

학자로서의 길에 들어선 것을 응원한다고

격려해 주었는데

학자로서의 라는 말에 두려움이 몰려왔다.


길어진 이혼소송으로 경제적으로 여유 있지 않은 채

아이와의 50여 일 여행으로 잘 다니던 회사는 퇴사하고

동 대학원 지도교수님 밑에서 박사과정을 시작한다.


여행에 오자마자 직장을 구하는 것이 눈앞 현실이다.


용기인지 무모함인지

용기를 내려면 나 자신을 믿어야 한다는데

최근 몇 달간 나의 행동은

무모하리만큼 무책임하고 무책임하리만큼 이기적이고

그리하여 두렵기도 하지만 박사과정에 집중하려고 한다.

직장은 당분간 구하지 않으려 한다.

박사과정에 집중하는 과정 중에 어떤 기회가 오겠지

믿어보려 한다.


두 달 후면 내 수중에는 아무것도 없을 것이 눈앞 현실이나

내 머릿속 계산으로는 그러하나

매 순간 내 머릿속 계산기대로 흘러간 적은 없었기에

무모한 용기를 내보려 한다.


나의 무모함을 나를 믿는 믿음으로 커버해 보려는데

나를 믿는다는 것보다

나를 믿어주자가 어울릴 것 같다.

지금 나를 믿어주지 않으면

나를 믿어줄 사람은 없기에.

나의 직관을 귀담을 이는 나여야 하기에.


중국 친구가 내 상황을 알고 '복락'이란 한자를 세긴 글자를 빨간 상자에 담아 비행기로 2시간을 날아와 아이와 내가 머무는 호텔 근처에 숙소를 잡고 그날 저녁 내게 준 선물이다.

중국 친구는 내게 말해주었다.


너는 분명 괜찮을 거야.

그러니 힘들면 언제든 우리 집에 와서 쉬어.

또 다른 중국 친구는 긴 여행 끝에 마지막 여행지 상하이에서 피곤해하던 아이와 나를 위해 호텔 로비까지 와서 죽을 시켜 내 손에 쥐어주고 갔다.

그 친구는 내게 말했다.


난 상하이 토박이니깐 언제든 연락해.

호텔까지 얼마 안 걸려. 더군다나 오늘내일

상사가 안 나와.


멋쩍게 웃으며 죽을 건네주었다. 소화제 약과 함께.


46일 긴 여행을 마치고 느낀 것은

사는 건 어디나 똑같구나.

내 아이와 나는 긴 여행이었지만

단둘만의 시간에서 난생처음 둘만의 현실을 보내다 왔구나.


한 친구는 배우자와 이혼해 육아를 하고 있었고

한 친구의 아이는 지병이 있어 안타까웠고

한 친구는 여러 이유로 이혼하고 싶지만 참고 살고 있고

한 친구는 유럽 남자친구와 20년 장거리연애 중이고

한 친구는 골드미스이고

한 친구는 자기와 동성인 여자와 연애 중이고

한 친구는 중학교 때 만난 남친과 결혼해 20년째 살고 있고

한 친구는 자기 동생을 여의어 슬픔에 빠져 있고

한 친구는 자기 사업체를 운영하고 있고

그들은 나를 응원해 주었다.

일본 친구가 아이와 내가 일본을 떠나 상하이로 가는 날 한국어로 내게 보낸 메시지이다.

나랑 12살 차이 나는 일본 친구가 내게 보내준 메시지에

연신 눈물이 흘렀다.


이렇게 말하면 덧없으려나.

46일간의 긴 여행은 다녀와 보니 막상 별게 없었다.


상하이에서 아이와 나는 넋다운 되어

상하이 디즈니랜드도 취소하고 이틀 내내 호텔방에서 잤다.

환불 불가 조건이었음을 알고 있었지만 취소했다.

호텔 조식도 3일 내내 이용 못 했다.

안타까움을 하소연했더니 중국 친구가 내게 말했다.

It's great waste.

그 말이 어찌나 위로가 되던지.

우리는 그저 웃었다.


일본에서 상하이행 노선이 없어서 한국에 입국하고

다시 출국하여 상하이행 비행기를 타야 했다.

한국에 다 달아 인천국제공항에서 수하물을 찾으러 가던

아이에게 말했다.


○○야, 엄마가 미쳤었나 봐.


아이는 무슨 말인지 바로 알아차리고는 내게 말했다.


엄마, 내가 진짜 이 말은 잘 안 하는데

엄마 미쳤었나 봐 맞는 거 같아.


아이와 나는 피곤에 절어 이성을 상실한 듯 너털너털 웃었다.


○○야, 우리 한국 들어왔다가 또 나간다.

엄마? 엄마? (하며 웃는다.)

맞아. 엄마가 여행 계획할 때 미쳤었나 봐.


아이는 또 한 번 크게 웃는다.

나도 크게 웃었다.


여행에 돌아와 며칠 띵하니 아이와 나는 컨디션이 안 좋았다.

그리고 며칠 더 쉬고 어제는 사우나에 가서

나도 난생처음 오일전신마사지를 받았고

아이도 난생처음 세신을 받았다.

아버지 말이 아이가 세신을 받으며 계속 시원해했다고 한다.

나도 마사지를 받으며 계속 시원해했는데.


세신 해주는 여사님이 내게 물었다.


마사지 처음 받아요?

네.

어떻게 왔어?

너무 피곤해서요.

처음이니까 살살해줄게요. 처음 받음 몸살에 걸리기도 해.

앞으로 하다 보면 점점 세게 받게 될 거야.

네.

지금 이렇게 살살해도 아프다고 하잖아.

근데 시원해요.

시원해? 와.

네. 또 올 거 같아요.


여사님은 웃으셨다.


세신을 마치고 나오니

아이와 아버지는 이미 마치고 일층 카페에서

어머니와 차를 마시고 있었다.


와, 진짜 개운하다.

○○도 시원하단다. (아버지가 말씀하셨다.)

집으로 돌아와서 식구들은 저녁을 먹고 나는 박사과정 비대면 오티를 받았다.


늦은 밤 교육분석 선생님과 연락을 취했다.


잘 다녀왔어?

오늘 박사과정 오티 받았어요.

현실로 돌아온 소감이 어때?

시간이 참 빨라요.

그럼 몸 좀 추스르고 다음 주에 연락드릴게요.

그러자. 좀 쉬어야 해, 알지?

네.


일본 친구 카페에 다 같이 모여 두런두런 얘기 나누던 시간의 공간

언젠가 일본인 친구가 하는 카페에 지인과 가서는

조용히 앉아 두런두런 얘기하고 차를 마시면 좋겠다

싶었다.


46일 여행을 마쳐가는 즈음에 너무나 고즈넉하니 어여쁜 곳에 머물러 있었던 걸까.

46일 긴 여행의 끝이 이런 일상의 소소함이었구나! 하고

느낀 순간이었다.


Good night, 그대. 편히 쉬어요.


※누으려는데 태국에 갔을 때 보지 못했던 친구가 4월에 한국에 온다는 메시지를 보내왔다. 조카딸이 한국어를 배우기 위해 한 달 단기코스로 와 있어 그녀를 보기 위해서란다. 날짜가 나와 맞아 시간을 같이 보내기로 했다.

46일 여행에서 친구들에게 받은 배려와 베풂을 이 친구에게 몰빵 해주련다. 따끈따끈한 이 감사함을 되새김하는 맘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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