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상 놈과 내 놈
타당화연구 보고서를 쓰고 있는데,
며칠 전까지만 해도
어떻게 써야 할지 막막했는데,
하루 고민하고 이틀 고민하니깐
어제 새벽부터
서론 부분에 필요성을 어떻게 적어야 할지
생각이 나더라고요.
지금은 논의 부분만 남았어요.
소논문 쓸 때 도움이 될 것 같아 재밌어요.
막상 쓰면 또 몰입해서 쓰니깐 재밌어요.
미루긴 했어요. 근데,
제가 어느 정도 할 수 있다는 생각이 드니깐
미뤘던 것 같아요.
OO이는 언제 미뤄? 모든 것에서 미루나?
음..., 그건 아닌 거 같은 게
제가 해야겠다고 생각하는 건 바로 하거든요.
여행 가는 거?
네. 맞아요. 또, 아까 얘기한 것처럼
논문 스터디를 하자고 생각이 들면
팀을 꾸려서 규칙을 만들고 진도표 만들고 제안하고
하는 것들은 또 바로바로 하거든요.
제가 듣고 싶은 수업이나 교육이 있으면 바로 하고
성당에 가고 싶으면 어디든 바로바로 가고요.
맞아, OO이가 하고 싶어 하는 것들에서 그래.
미루지 않아. 1초 만에 다 해버리더라고.
네. 그런 것 같아요.
근데, 물리적인 시간으로 1초이지만,
그 순간에 제 안에 접촉이 되거든요.
내가 하고 싶은 것이다, 아니다가요.
그게 제 안에 접촉이 되면 바로 하는 거고,
접촉이 안 되면 하지 않는 거고요.
예전에 출판사 다니면서도
그렇게 상담 공부하고 싶어 했었잖아.
10년을 버티기도 하고,
결혼생활에서 어려움도 겪기도 하고,
편집하느라 밤도 매일같이 새고,
그런데, 대학원을 입학하고 나서
상담을 받겠다고 연락을 한 거였잖아.
사실, 이게 쉬운 게 아니거든.
어떻게 그렇게 다 할 수 있었을까가 궁금해.
그 동력이 어디서 나오는 건지가 말이야.
음..., 저도 잘 모르겠어요.
단지, 예전에 저희 나눴던 얘기 중에 열등감 얘기가 있긴 했었어요.
그래서 보상심리로 더욱 열심히 한다?
근데, 그렇게만 설명하자니 부족한 감이 있는 것 같아서요.
지금 생각해 보면 초등학교 때, 어릴 때요.
누가 시킨 게 아닌데,
크리스마스날 다가오면 반 전체 친구들 줄 거
카드 일일이 다 재료 사서 밤새 만들고 그랬거든요.
학교에서 금연 포스터 공모한다고 그러면
시간 가는 줄도 모르고 밤새 작업해서 내고 그랬던 것 같아요.
항상 가장 행복했던 때가 언제냐고 물어보면
어렸을 때 카드 만들고 그림 그리고 했던 게 기억나더라고요.
그게 저인 거 같다?
기질인 거 같아요.
OO이는 너무나 INFP를 가지고 있지.
너무나 I고,
너무나 N이고,
너무나 F고,
너무나 P이고.
열등감으로 보기에는, 맞아. 약한 것 같아.
우리가 세상의 기준 Norm이라는 것에 놓고 봤을 때
OO이는 어릴 때 트라우마를 겪은 불우한 생활을 했고,
이혼을 했고, 아들이 한 명 있고, 부모님도 이혼을 했고
이런 기준들로 외부 환경에서 만들어진 '나'로서 갖게 되는
열등감인 거지.
그런데, 시간이 가는 줄도 모르고 논문 얘기만 나오면 살아나고 눈이 반짝반짝 빛나고,
수업 시간에 내주는 과제가 재밌다고 하고,
내가 여태껏 OO이가 과제를 받았을 때
재미없다고 한 적을 본 적이 없어.
OO이는 과제가 과제가 아닌 거야.
자기를 알아가는 루트를 만난 거거든.
아, 맞아요. 석사 때부터 지금까지
과제를 받았을 때
제 화두와 연결이 되는 게 너무 재밌었어요.
지금 기분은 어때?
뽕 맞은 기분인 것 같아요. 맞아 본 적은 없지만요.
나도 맞아 본 적은 없어서 모르겠는데,
그게 뭘까?
음..., 아까 선생님께서 말씀하신 대로
세상의 기준 놈(Norm)이라는 게 있잖아요.
제 안에 기준은 눈에 보이지 않는 놈이 있는 거죠.
눈에 보이지 않는 것을 지지해 주는 것 쉽지 않은 거잖아요.
그래서 저는 스스로 저를 다독여주고 지지해 주거든요.
그러다가도 지치는 순간이 오기도 하고 혼란을 겪는 순간이 오기도 하거든요.
세상의 놈이 아래 있고 제 놈이 위에 있다가도
물살에 순간 휘청거리면 전복이 돼 버리는 거죠.
교육분석을 받으면,
세상의 놈을 보고 흔들릴 때
얼른 제 놈을 가져올 수 있는 것 같아요.
교육분석을 받으면,
지쳐서 불씨가 사라질 때쯤
다시 아궁이에 땔감 넣어서
지펴 주는 것 같아요.
다시 생기 있게, 활활.
* 최근 3년 동안(더 이전도 되고 더 최근의 것도 상관없다)
내가 미뤘던 것과 미루지 않았던 것들을 쭉 써보기로 했다.
그리고 할 수만 있다면
미뤘던 것 옆에는 왜 미뤘고, 어떻게 했고를 적어보고,
미루지 않았던 것에도 마찬가지로 적어보기로 했다.
* 교육분석 말미에,
언제부턴가 내 상담이 게으른 상담이라고 느껴질 때가 있었다고 하자,
그게 뭔지는 다음 시간에 더 얘기해 보기로 했다.
이 주제에 대해 더 생각해 보기로 했다.
지금 기분은 어때?
제가 지금 해야 하는 것들이
제가 지금 방향으로는 잘 가고 있는 거구나.
다시 한번 확인받은 기분이에요.
그래. 그럼 다음 회기에 봐.
네, 들어가세요.
삶의 체험현장 같은 현실일 수 있으나,
마음의 안정을 주는 것은
눈에 보이지 않는 것들로,
내 안의 나와 순간 접촉되는 것들이다.
세상의 놈에 전복되지 않고,
내 놈을 찾아 '참나'를 만나는 것은
삶의 여유가 넘치는 궁핍한 현실에서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