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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세만월 Jan 27. 2023

새아버지를 이상화하다; 나의 결핍, 아버지

감정 알아차림<2023.1.26>(with 교육분석)


연휴 어떻게 보냈어?

아이와 전망대도 가고, 제 작은 방에서 같이 처음으로 자기도 하고, 

아이가, 아빠집으로 엄마가 들어가면 안 돼? 말하기도 했어요.

순간, 합칠까 하는 생각이 들기도 했어요.


찰나에 든 생각이었지만, 왜 이혼하려는 부부들이 아이 때문에 다시 합친다는지 이해도 갔어요.

하지만 저는 이혼을 준비하는 과정에서 아주 많은 길을 건너온 것 같아요. 이 과정이 있기 전과 후로 나뉜다고 느낄 만큼요. 합친다는 건 없어요. 


OO이는 아이와 보낸 연휴가 어땠고, 아이는 어땠던 것 같아? 이렇게 길게 같이 시간 보낸 적이 있었나?

아뇨, 처음인 것 같아요. 

전망대에서 두 시간이 넘는 대기줄을 기다리면서도 아이에게 의지가 많이 되었던 것 같아요. 혼자 기다리라면 못 기다렸을 것 같아요. 든든하기도 했고요.  

제 방에서 생각보다 잘 만하네. 아늑하네 하며 같이 붙어 자던 것도 재밌었고요.


근데 왜 눈물이 날까요?

그러게.

그러게요. 왜 눈물이 나는지 모르겠네요. 


실체가 없는 느낌...

부정적인 세계관... 


너무 추상적인 것 같아. 철학적이고 어려운 말들이네. 실체가 없다, 세계관이 부정적이다... 좀 더 구체적으로 얘기할 수 있을까?


카페에서 상담 전공책을 읽을 때는 집중을 해요. 하지만, 읽고 나오면, 지금 뭐 하고 있나,

연구소 상담실에서 내담자와 상담을 할 때는 좋아요. 하지만, 상담실을 나오면, 지금 뭐 하고 있나, 

하는 생각이 들어요. 


일주일 전 내담자에게 해석상담을 해주는데, 내담자가 실망을 하더라고요. 

악조건 속에서도 열심히 살아오며 상담까지 받으며 자신을 알아가려 노력하며 수정 중인데. 

자신은 여전히 부정적인 모습들에 그대로인 것 같다고...


그 내담자를 보면서 어떤 생각을 했어? 내담자가 좋아질 수 있을 것 같다고 생각이 들어?

아뇨. 어느 정도는... 하지만, 얼마나 오랜 시간이 걸리는 것인지를 알기에...

내가 어떤 사람이구나를 깨닫고 알아가는 것은 어느 정도 가능한 것 같아요. 

하지만, 그 깨닫는 과정이 수없이 반복되어야 하고, 그 반복되는 중에서 사고도 행동도 수정되어야 하고요. 

하지만, 그 세계관이라는 게, 회복이 참 어려운 것 같아요. 

제가 그 내담자에게 할 수 있는 건, 만약 100가지가 있다면 한두 가지만이라도 자기에 대해 알아가는 기회만 주어도 대단한 거란 생각이 들어요.  

인간이 해 줄 수 없는 일 같아요.


내 생각에 OO이가 정말 '소진' 상태가 된 것 같아. 

아까 상담실 들어오는데, 링거를 맞아야 하나 싶을 정도로 힘이 하나도 없어 보였어. 

내가 OO이를 오래 봐왔잖아. 

그간 중 오늘이 가장 힘이 없어 보여. 


저도 그런 것 같아요. 


언제부터 이 상태가 시작된 것 같아?


시기적으로 보면 새아버지와 싸우고 난 후부터요. 

어떻게 표현해야 할까. 

OO이가 그동안 이혼에, 수술에, 학업에, 회사일에, 논문에, 경제적 걱정에, 

아등바등 버티면서 많은 일을 해오고 있었잖아. 쓰러지려는 것을 버티면서 

어떻게든 다시 부여잡고 하고 있는데, 막 다시 기를 쓰고 일어서려는 걸 밟아버린 것 같아. 

밟아서 주저앉힌 것 같은. 거친 말과 행동으로. 어린 시절 트라우마와 터치될 만큼 컸던 것 같아.

그러면서 예전 낙담한 OO이와 만난 것 같아. 


네, 그런 것 같아요. 


사람 마음이 떠난다는 건 아주 순간이구나 느꼈어요.

그분에게 맘이 떠났어요. 번호도 차단했고, 하시는 일에도 관심이 꺼졌어요. 

기본적인 행동만 할 뿐이에요. 외출할 때 '다녀오겠습니다', 다녀와서는 '다녀왔습니다'. 

그리고 그날 사건에 대해서는 이야기하고 싶지 않아요. 

만약 꺼내신다면, 저는 이렇게 말할 거예요.

"아버지도 인생을 오래 사셔서 아실 거예요. 사람 맘이 한순간 떠난 것을 애써 돌이키려 하지 마세요"라고. 

그런 맘뿐이에요.


OO이가 그분에게 '아버지'라고 부르기까지 얼마나 많은 시간이 걸렸어. 

많은 고민과 생각 끝에 아버지라고 불렀는데. 

새로운 아버지를 만들었던 것 같아. 

어린 시절 없던 새로운 아버지란 존재를 기대했던 것 같아. 

이상화한 거지. OO이의 취약점... 


새아버지가 제게 한 욕과 거친 행동과 말이, 나는 결국 불행해질 수밖에 없구나 하는 

저의 부정적 세계관에 확답을 준 것 같아 불안하기도 하고, 

기분도 같이 가라앉았다고만 생각했어요. 

그런데, 실망감이 더 컸던 것 같아요. 

그분만큼은 어떠한 상황에서도 옛날 어린 시절 아빠가 했던 행동을 안 하실 줄 알았어요. 어떠한 상황에서도. 그런데 했어요. 그게 컸던 것 같아요. 


사람은 변할 수 있어. 사람은 불완전한 존재야. 

남편부터, 전 직장 부장님, 새아버지 등 작년부터 올해까지 이상화된 관계를 하나하나씩 떠나보내왔어. 

그것만으로도 많이 힘들 거야. 좋을 수가 없지. 


[교육분석 선생님께 얘기하지 못한 1인도 생각이 났다. 내가 이상화시킨 대상. OO님도 내가 이상화한 대상이 아닐까? 그런데 왜 나는 남편과 이혼하기까지도, 지금도, 누구보다 나를 전적으로 지지해 주시는, 나에 대해 가장 많이 알고 있는 교육분석 선생님께 말을 하지 못할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왜? 다른 것들은 다 이야기하면서, 남편일도 이혼을 결심하고 변호사를 선임하고 난 뒤에 말씀드렸다. 왜지? 내가 이상화한 대상들 중 너무 큰 의미가 부여된 사람에 대해서는, 부정적으로 얘기될까 봐 겁이 나서 일까? 부정적으로 얘기할 것을 예상한다는 말이기도 한데, 교육분석 선생님이 나에게 부정적으로 말할 것을 예상한다는 것은, 나도 내가 생각하기에 상대가 나에게 부정적인 존재임을 안다는 것도 될 텐데, 그런 부정적인 대상을 이상화해 놓고, 그 이상화된 존재가 내게 떼어진다는 것이 겁이 나는 것일까? 나는 왜 이상화된 대상이 필요할까? 나의 결핍일까? 결핍을 채우고자 하는 욕망은 누구에게도 터치받고 싶지 않은 것일까?]


아까 걱정된 게 두 가지가 있었어. 

하나는, 관계에서 상대를 이상화하는 것. 

그리고 또 한 개는, 남편과 합친다는 생각을 했다는 것. 물론 아이 때문에 그런 생각이 든 것도 알지만 말이야.

그건 새아버지 때문에 생각난 것 같아요. 


예전에 새아버지 드리려고 남편이 설 선물로 한우 세트를 사들고 갔는데, 남동생 내외 앞에서, 

한우 같은 거 필요 없다고(건강이 최우선이고, 자기 몫을 잘 해내면 된다는 의도였지만) 했던 적이 있었어요. 남편이 마음을 열려고 한창 노력할 때 그런 일이 벌어졌고, 그 뒤로 그 사람은 새아버지에게 마음을 닫았어요. 그 사람 마음이 떠났고, 제가 그걸 옆에서 봤죠. 느꼈죠. 그래서 생각났던 것 같아요.



지금 기분은 어때?

내가 이상화하고 있었구나 생각 들면서 뭔가 정리가 되는 것 같아요.


어떻게 하면 지하 8층에서 올라올 수 있을 것 같아?

물어보시니까, 브런치에 밀린 글들을 정리해서 쓰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그동안 브런치에 올릴 글을 미뤄뒀었거든요. 

그래서 제 머릿속이 정리가 안 된 느낌이었어요. 


그래, OO이가 좋아하는 것 하면서 기운을 얻었으면 좋겠어. 클렌징할 것이 필요한 것 같아. 


그리고, 

예전 낙담한 OO이 자신과 만나지 않았으면 좋겠어. 예전 낙담한 OO이와 현재 낙담한 OO이는 다르거든. 

이제는 낙담했을 때 벗어날 수 있는, 브런치처럼 OO이가 좋아하는 일도 더 찾았으면 좋겠어.

네, 찾아보고 싶어요. 제가 좋아하는 것들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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