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 해 첫 날의 쓸데없는 고백록
솔직히 새로운 해를 맞이했다는 느낌 거의 나지 않지만, 기분도 그저 그렇지만 새 해는 새 해다. 세월은 잔인하리만치 정확하게 흐름에도 더 스피디하게 느껴지는 것이야말로 새 해 기분인 것일까. 1월 1일이 이렇게 저물어가는데도 여전히 연말의 어느날 같고, 과연 이 또 한 번의 새로운 한 해를 잘 살아갈 수 있을 것인지 덜컥 겁부터 난다. 진정한 사랑에는 두려움이 없다는데 나는 아직도 나 자신을 진정으로 사랑하지 못하는 것도 같고. 잡다한 생각을 하던 차 새 해 첫 날 다소 어지러운 끄적임을 통해서라도 반성할 것들을 고백하고, 스스로와 누군가들에게 사과를 건네고, 한 줄기 빛의 소망이 있다면 그것이 무엇인지 쑥스럽지만 나눠보면 어떨까 싶었다.
# 1
1월 2일 내일 새로운 회사의 첫 출근을 앞두고 있다. 엄밀히 말하면 새로운 회사가 아닌 옛 회사로 돌아가는 것이다. 마치 2년 간의 외도를 끝내고 조강지처에게 돌아가는 느낌이 드는 건 설명할 수 없이 이상하긴 하지만 '컴백홈'의 느낌이 짙게 난다. 예전 보스와 종종 만나 일과 삶을 나눈 덕이었을지도 모르겠다. 지금 회사에서 (나만의 착각이 아니라면) 훈훈한 송별회겸 송년회를 마치고 돌아올 회사의 송년회에도 참석하며 마무리 했던 2018년이 드디어 떠났다. 붙잡고 싶어도 붙잡을 수 없을 떠나간 그대 같구려. 새출발의 각오따위는 없지만 2년만에 다시 돌아가는 회사로의 첫출근인데 떨림이 너무 없어 조금은 스스로에게 섭섭하다. 난 이제 진부해진 것일까, 그새 나이들었다고 뻐기는 것일까, 그 무엇이란 말인가.
# 2
지난해 약 반년 간 너무 힘들었다. 몸도 마음도. 그래서 호기롭게 시작했던 팀 페리스의 책 '마흔이 되기전에'에 수록된 139개의 조언을 날마다 기록하고 생각을 덧붙여 끄적이다보면 139일이 지나겠지 싶었었다. 그 순간엔 무척 간절했는데 어김없이 내 지구력은 절반도 못가 바닥나고 말았고, 54번을 끝으로 다시 돌아오지 못했다. 12월 한 달은 퇴사와 이직을 앞두고 한가롭기도 했고, 직장인 생활 최초로 늘어지게 놀아보기도 했던 터라 제정신이었던 날이 별로 없었기도 했다. 변명의 여지가 없고 역시나 나는 또 뒷심을 발휘못하고 무너지고말았다. 이제는 바뻐질 것이란 핑계밖에 꺼낼 카드가 없지만 그래도 이게 나인 것을 어찌할 도리가 없다. 달라질 수 있을까? 지구력이 언젠가는 솟아날까? 나 자신이 진정 변화를 갈망하고 있는가? 많은 질문들이 더 쏟아져나와야 할 것이다. 살아가기 위해서는.
# 3
새 해 첫 커피는 장염을 앓고 있는 남자친구가 내려준 블렌디드 원두 블랙 커피. 신선했고 묵직했다. 새 해 첫 책은 연말에 설레는 마음으로 구매했던 프랑수아즈 사강의 리틀 블랙 드레스. 그녀의 소설 '브람스를 좋아하세요...'를 읽고 금세 사랑에 빠져버렸다. 탐닉과 탐독을 시작함을 선언하고자 한다. 먼저 시작했지만 병행 독서 하고 있는 또 하나의 아름다운 글은 아티스트 패티 스미스의 'M트레인'이다. 한 달여전 그녀의 책 '몰입'을 읽고 호기심 가득 염탐하게 된 작가인데 닮고 싶은 문체와 분위기를 가졌다. 새 해 첫 영화는 로버트 레드포드의 은퇴작이라고 하는 '미스터 스마일'. 매우 느리고 조용한 영화이지만 강렬하고 뜨겁고 우아했다. 84세의 노장으로서 10살이나 어린 74세 '행복한' 은행 털이범 역할을 이토록 부드럽고 우아하게 해낼 수 있는 배우가 누가 또 있을까? 단박에 떠오르는 배우는 없다. 은행을 터는 것에서도 누군가는 진정한 행복을 느낄 수 있음을 생애 최초로 느껴볼 수 있는 영화였다고나 할까. 누구든 무엇이든 간에 이토록 행복한 일이 하나 있다면 더 바랄 게 없는 삶을 이미 가진 게 아닐런지. 반가운 케이시 애플렉의 연기도 명품이었다. 새 해 첫 바깥 음식은 삼백집의 콩나물 국밥과 고추 만두. 우리들만의 소울 푸드 중 하나다.
# 4
지난 한 해 동안 끊임없이 나의 부족함을 보았고 깨달았고 때론 절망하고 때론 애써 위로하며 그렇게 어설프고도 어설프게 살아왔다. 무엇이든 말로만 떠든 적도 많았고, 언제든 침묵한 적도 많았다. 사람들을 덜 만났고 수많은 책과 넷플릭스에 파묻혀 지내기도 했다. 삶의 최고의 일주일이라 꼽을 만치의 비엔나 여행을 하고 왔음에도 기록으로 남기는 것을 수 개월 결심만 했을 뿐 글 한 톨 던져보지도 못한 걸 보면 꽤나 우울했던 듯싶다. 성과를 내지 못했던 직장에서는 온갖 괴로움을 역시나 침묵으로 일관했지만 그 부작용은 결코 예쁘지 않았다. 가족과 남자친구 덕분에 사람구실은 했으니 망정이지 새 해에는 갚으며 살아야겠단 생각뿐이다. 무엇이 됐든 탓 할 일은 단 한 가지도 없다. 모든 것은 내 안에 있으니 그것을 찾고 꺼내고 올바로 쓰는 수밖에.
# 5
2019년 마흔에 가까워진다. 아직 솔직히 긴박감이나 절망감이나 두려움 따위는 못느낀다. 다만 이제는 후회가 무엇인지, 해보지 않고 말만 떠드는 게 얼마나 비겁하고 경박한 짓인지는 충분히 깨닫는 한 해를 보냈으니 무엇이든 저질러보려고 한다(다만, 제발, 신중하게). 일단 하고 수습하든지 보완하든지 때려치든지. 어찌됐건 새 해가 즐겁긴 하다. 이 즐거움은 정말이지 감사해야 할 듯!