호텔심리학 5
타임머신을 타고 목적지에 도착한 기분이란 게 과연 이런 게 아닐는지. 구체적으로 상상해본 적 없지만 호텔 펜션 풍크의 19세기 엘리베이터에 올라타 높은 층고를 한 층 지나 내리자니 딱 그 기분을 알 것 같다란 것. 탁월한 선택에 따르는 보상은 이토록 즉각적인 것인가. 만족과 설렘에 이끌려 드디어 들어선다. 끊임없이 호기심을 자아내는 비밀스럽고도 신비로운 이곳, 베를린 호텔 펜션 풍크.
카펫과 조명은 은은하면서도 우아하다. 좁지만 아늑함이 짙게 감도는 복도를 지난다. 양쪽 벽에 무수히 걸려 있는 한 여인의 사진들에 눈길이 간다. 그 순간, 아! 호텔 홈페이지에서 보았던 그 스토리구나 싶었다. 1차 대전 직후 베를린을 중심으로 유럽 대도시에 극장 건립과 영화 제작이 활발했다고 하는데, 그 중심에 우뚝 서있던 덴마크 출신 배우 아스타 닐센(Asta Nielsen)의 사진이다. 그녀가 이곳에서 몇 년간 살았었다고. 무성영화 시절 영화를 예술의 경지에 올려놓았다는 찬사를 받았다고 하는데 흑백의 사진에서 뿜어져 나오는 에너지와 아름다움이 내 피부에 스치는 것만 같다. 전후 시대에 한 획을 그은 멋진 예술가라니. 그가 이곳에서 살았었다니. 내 삶에 또 한 명의 위대한 예술가를 각인하는 순간이다. 아직도 내가 발견하지 못한 예술가들이 유럽 이곳저곳에 얼마나 많을까. 더 많이, 더 깊이 만나고, 알고 싶다. 그 비결은 곧 여행 이리라.
스토리로 다시 바라보니 더 이상 이곳은 호텔이라기보다 차라리 아스타 닐센의 어여쁜 집이다. 마치 그녀에게 초대받아 며칠 머무르게 된 듯한 기분. 이 상상 어린 기분은 온전히 나의 것이자 공짜이니 누려 마땅한 것. 색이 바랜 나무 바닥과 역시 나이가 많아 보이는 카펫 및 붉은 벨벳 소파의 조화는 가히 필연적인 듯하다. 이곳에 있어야만 하는 이 사물들의 운명일까 싶을만치의 자연스러움. 그리고 거기에 피아노가 있다. 완벽한 풍경이 완성된다. 엘리베이터에서 만끽했던 짜릿한 시간여행 느낌과는 사뭇 다른 감각이 피어난다. 오래된 것들로 둘러싸인 공간과의 본격적이고도 구체적인 만남이 시작된 것일 테지.
이곳은 분명 처음인데 왜 향수(鄕愁)와 같은 묘한 감정이 나를 감싸도는 것일까. 어째서 나는 처음 조우하는 공간과 이야기에서 느끼는 이 강렬한 감각의 소용돌이를 노스탤지어라 부르고 싶은 것일까. 노스탤지어는 마땅히 기억으로부터 발현되는 것 아닌가. 기억의 지도에선 찾을 수 없지만 마음의 지도에서는 찾을 수 있는 그런 공간이랄까. 미지의 영역과 다름없을 내 마음의 지도에서 나는 과학이나 상식을 송두리째 무시한 채 18세기 19세기의 예술과 낭만의 우주를 유영한다. 살아본 적 없는 어느 과거의 아름다운 시절을 상상하며 그리워하는 것. 상상의 나래가 끝없이 이어진다. 과연 이 그리움은 무엇일까. 많은 물음과 감정이 뒤섞인다.
시간 여행을 할 수 있다면 어느 곳 어느 시대로 가고 싶은가? 나는 종종 묻지도 않은 주변 사람들에게 뜬금없이 묻고는 내 바람 섞인 상상을 말하곤 한다. 이룰 수 없을 일이라 더 말하고 싶은 것인지도. 19세기 말부터 1차 대전이 발발하기 전까지의 경제와 문화 및 예술이 풍요와 번영을 누리던 유럽의 좋은 시절, 그 아름다운 시절 '벨에포크(La belle époque)', 특히 프랑스로 가고 싶다. 세계 각지에서 예술가들이 파리와 외곽으로 몰려와 활발한 예술 활동을 펼쳤던 그 시절로. 소설가, 인상주의 화가, 만국박람회의 주역들 그리고 물랑루즈, 막심에서의 화려한 음악과 춤과 예술가들이 뒤섞인 만남의 축제 속으로 들어가 보고 싶다.
청춘의 한 시절 그 시대 그곳에서 예술가들의 브로커로 살면 어땠을까 자주 상상해본다. 분야와 장르를 막론하고 많은 예술인들을 만나고 어울리며 풍류하는 그림을 그려보며. 얼마 전 물랑루즈의 작은 거인 툴루즈 로트렉 전에 다녀온 여운이 길게 남아 다시금 출구가 보이지 않는 이 상상과 몽상에 빠져들었다. 이 여운은 헤밍웨이의 파리 체류기 에세이집 <파리는 날마다 축제>를 다시 펼치는 것으로 이어졌고, 몇 년 전 2월의 파리를 그의 이야기와 이동 경로를 따라 홀로 거닐었던 추억으로 연결되었다. 현실로 돌아오자면 의지가 제법 필요하다. 아, 돌아갈 곳은 현실이 아닌 다시 베를린 펜션 풍크!
이제 겨우 복도를 지났을 뿐인데 정신은 또 다른 시공간의 세상을 여행하고 있었다니... 온갖 상상력과 향수를 자극하는 오래된 공간의 힘이자 매력이겠다. 여행이란 게 바쁠 거 있나, 몸도 정신도 마음도 이리저리 흘러 다니는 거지. 발길을 다시 멈춘다. 오후의 햇살이 새어 들어오는 탁 트인 공간이 펼쳐졌다. 우아함을 자아내는 세월의 무게가 공기에 감도는 듯 촉감이 느껴지던 곳, 다이닝룸.
이 따스한 기운은 무얼까. 왠지 백발에, 온화한 미소가 어여쁜, 선홍빛 스커트를 입고 빈티지 실크 스카프를 두른 할머님이 꽃병에 꽃을 꽂고, 잔과 냅킨을 정갈히 얹어두고, 어서 오라며 짙게 우려낸 홍차를 한 잔 건네주실 것만 같은 장면이다. 바움쿠헨 한 조각도 곁들여지면 금상첨화겠다.
짙은 브라운 톤의 가구에서 고풍스러움이 뿜어져 나온다. 펜션 풍크에서 지내는 내내 늘 가장 오래 머물고 싶었던 공간이다. 한 폭의 정물화를 바라보는 것 같기도. 어서 빨리 이곳에 스며들어 그림 속 풍경이 되고 싶었다. 움직임이 없는 그림을 바라보듯 상상하다 보니 이곳에선 시간이 종종 멈추는 게 아닌가 싶다. 잠시 정지된 시간 동안 내가 좋은 사람이 되고 싶다면 나를 좋은 공간으로 자주 데려다 놓아야겠단 다짐을 했다. 닮고 싶은 공간을 만나면 늘 되뇌는 약속이지만. 아, 방으로 가는 길이 이토록 아득히도 멀다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