호텔심리학 6
여행이란 무엇인가, 란 물음을 스스로에게 종종 건네지만 매번 그에 대한 답은 다른 빛깔을 띤다. 그 빛깔은 어디로부터 오는가를 생각하며 정신의 배회를 이리저리 하다 보면 결국 늘 '공간'으로 귀결한다. 그 공간은 도시이기도 하고 호텔이기도 하며, 길거리이기도 하고 미술관이기도 하다. 공원이기도 하며 레스토랑이기도 하고, 아름다운 성이자 카페이기도 하고. '공간 속 나'를 기억하는 게 곧 여행에 대한 추억이 된다. 때론 어떤 사진 속의 나는 공간과 닮아 보이는 듯도 하다. 매력적인 공간을 만났을 때 그곳에 스며들거나 그곳의 모든 매력을 내게로 흡수시키고자 하는 정신적 활동이 뇌 안에서 축제처럼 일어난다. 마치 공간에 반응해야 하는 것처럼. 여유로운 여행의 한 때이지만 필사적이기도 한 그 순간 공간을 향하는 그 몰입.
머무름이란 건 일상과 매우 밀착된 것이기에 집을 떠나 있는 중에도 무의식적으로 우선순위에 올려놓는 것 아닐까. 그러고 나서 일상의 익숙함을 잠시 떼내어 버린 그 여백을 새로움과 낯선 매력으로 채우는 것이 여행이 되는 것이다. 내 모든 여행은 도시로 떠난 여행이었다기보다 차라리 호텔로 떠난 여행인 것. 나를 끌어당기는 호텔을 발견하고 그곳에 발길이 닿았을 때 비로소 완성되는 여행.
이제 비밀스러운 공기로 채워진 복도를 미로처럼 지나 깊숙한 곳에 자리한 방으로 향한다. 이미 호텔 펜션 풍크라는 공간이 내게 건네준 자극과 물음에 충분히 반응했다고 생각했는데 지극히 사적인 공간이 될 방으로 들어가려니 결이 다른 설렘이 솟아난다. 이토록 도시마다 호텔마다 지닌 독특한 로컬 분위기와 개성으로 인해 생생하게 살아 움직여 반응하는 내 감정과 생각을 경험하곤 하는데 만약 규격화된 공간으로 나를 데려다 놓았다면 분명 놓치고 말았을 것들 아닐까. 레드 카펫 위의 레드 카펫 그리고 구석에 무심히 놓여 있는 짙은 자줏빛 암체어가 며칠간 방을 찾아가는 데 멋진 이정표가 되었다. 단 몇 초일 지라도 잠시 멈칫하고 바라보는 그 찰나가 어찌나 좋던지. 마치 작품 속 오브제(objet) 곁 오브제가 된 기분이랄까.
있어야 할 것들만 있음에도 모든 게 있는 듯한 방에 들어섰다. 침대와 옷장 그리고 테이블과 의자가 전부인데 이 모든 것들의 오래된 호흡이 느껴졌다. 이들 간의 어우러짐은 무엇으로부터 기인된 것일까 곰곰 관찰해보다가 나만의 결론에 다다랐는데 그것은 벽지와 함께 이루는 조화였다. 마치 벽지가 시간 배경과 방의 분위기를 정한 다음 하나씩 불러 모은 것처럼. 짙은 갈색톤의 가구, 하얗디 하얀 침구와 커튼 그리고 선홍빛 노란 조명이 마침 매우 알맞은 자리에서 각자의 오라(aura)를 뿜어낸다. 이들에게 내 손이 가닿으면 마치 세월을 가늠해볼 수 있다는 듯이 자연스럽게 만지며 첫인사를 나눴다. 사람과 사물 사이의 터치라는 것, 내게 그것은 과거와 현재를 연결해보는 여행의 리추얼(ritual)이 되었다. 그 리추얼은 짐을 풀고 내 사적인 물건이 방 곳곳에 하나씩 놓이게 되면서 공간과의 관계 맺기로 이어진다. 어느새 공간의 한 켠은 매우 개인적인 색을 띠게 된다. 또 다른 한 켠은 독서나 사색 등의 주목적을 갖게 되기도 하고 이유모를 애정이 짙게 쌓이는 스폿이 되기도 한다. 관련이 있는 사이가 된다는 것은 매우 농밀한 느낌 아닌가. 사람과 사람 사이라면 서로를 향한 마음과 정이 두텁고 가까워지는 그런 관계 말이다. 호텔로 여행을 떠난 날들이 쌓여 가면서 공간과 나와의 관계 맺기의 스토리도 이렇게 쌓여 간다.
방으로 안내받았던 첫날 방에 들어서자마자 매니저가 했던 말은 두 가지였는데, 하나는 나의 바람대로 가장 조용하고 아늑한 방이라는 것과 다른 하나는 테이블 위 전화기가 작동되는 것이니(장식용 골동품처럼 보였기 때문이리라) 본인이 필요할 시에는 꼭 전화를 사용해보란 것이었다. 전화기를 바라본 순간 짧은 탄성이 터져 나왔는데 반가움과 호기심 섞인 기쁨이었으리라. 테이블 끝자락 조명 아래에 수줍은 듯 놓여 있는 어여쁜 전화기를 과연 쓸 일이 있을 것인가 의문이 들었지만 바라볼 때마다 웃음이 새어 나왔다. 마치 이 방의 정체성은 이 어여쁜 다이얼 전화기로 대변한다는 듯 모두를 제치고 주인공이 된마냥 뿜어내는 멋짐이 느껴졌다랄까. 결국 따스한 차 한잔이 간절해진 어느 서늘한 밤 혹시나 하는 마음으로 다이얼을 돌렸고 매니저는 찻물과 함께 나타났다. 프런트 데스크는 1번이라 다이얼을 단 한 번 밖에 돌리지 못한 것이 못내 아쉬웠지만 그 한 번의 다이얼링으로 물을 끓인 주전자를 들고 성큼 나타나 찻잔에 따라주고 가는 매니저의 재미있는 서비스 덕분으로 마음을 달래볼 수 있었다.
머무는 내내 흠모하던 곳, 다이닝룸으로 가볼까. 그윽한 조명 빛 아래 새하얀 식탁보 위 가지런히 놓인 잔과 접시 그리고 밝고 산뜻한 붉은색의 꽃 몇 송이. 짙은 녹색빛의 냅킨이 강렬한 포인트가 되는 풍경. 다이닝룸 구석진 곳 단 두 명 만이 아침 식사를 즐길 수 있는 원탁 자리와는 슬프게도 한 번도 연이 닿지 않았다. 프레임 너머 존재하는 그림 속 세상과도 같은 그곳을 향한 그리움이 짙게 드리운다. 그 프레임 속 주인공은 되어볼 수 없었으나 어느 노부부가 찬찬히 식사하던 모습을 바라보며 내 자리가 아니었길 다행이었음을 기쁘게도 깨달았던 순간을 기억한다. 부디 그 장면이 언젠가 건너갈 저 너머 세계의 내 모습, 미리 만나 본 미래이기를 바라면서.
어디를 바라 보아도 흐뭇했을 뿐 부족하단 느낌이 끼어들 틈이 없었던 다이닝룸. 아늑하고 따스한 할머니 품 같던 곳. 이 세상의 모든 할머니들은 어쩜 이럴까 싶은 생각. 언제든 내어주던 그 깊고도 따스한 품과 마음 말이다. 먼 나라에서도 놀랍게도 만나는 할머니 품 느낌이란 게 이토록 소중할 줄이야. 새삼 나도 누군가에게 그리 기억될 수 있다면 인생 참 행복하겠단 생각이 든다. 이곳의 분위기와 색깔이 나의 나이 듦에 스며들었으면...
새하얀 식탁보는 프레임 너머의 세계에 양보한다. 회색빛이 은은히 감도는 거뭇한 대리석 테이블에서 즐긴 며칠 간의 조식이 보다 나다웠지 않았나 싶어 되려 흐뭇하단 것. 여행에서의 조식, 과연 부연이 필요할까. 조식을 흠애하는 여행자들과 함께라면 정말이지 조식만 가지고도 밤을 지새우며 이야기꽃을 피울 수 있을 것이다. 아, 호텔과 조식이여! 갑자기 솟아나는 에너지와 열망을 털어낼 길이 없어 외쳐본다. 어느 곳에 자리한들 상관이 없었다. 공기 중에 감도는 화기로운 부드러움을 벗 삼으니 모든 게 아름다운 아침이다. 진한 커피와 투박한 빵 그리고 빵에 얹어 즐길 수 있는 모든 것들로 인한 완벽한 하루의 시작. 펜션 풍크에선 아침의 정신을 아주 천천히 깨웠다. 조바심 낼 것 없이 진득하니 나와 어울리는 자리에 앉아 마치 공간과 대화를 나누듯 오래 머무르고 싶었던 것. 시간이 더디 가는 것도 같은 그 순간의 느낌은 세상이 마치 내 편인 것 같더라. 그래, 이렇게 여행으로 세상과 친해지는 거다, 란 생각도 해보면서.
어느 날엔 가엔 아침 식사를 마쳐갈 즈음 누군가가 복도에 있는 피아노를 연주했다. 아, 내심 누군가 제발 한 번쯤은 피아노에 앉아주길 바랬는데 어쩜 마음이 통했나 했는데, 늘 조식을 준비하시는 호텔 직원분이었다. 엄마와 이모의 중간 즈음의 이미지를 지니신 분이었는데 이름을 묻지 못한 게 무척 아쉽다. 우리에게 선사해준 아침의 경쾌함이었을까. 강약이 살아있는 그 정성스러운 연주를 듣노라니 여행의 묘미란 게 바로 이런 것이지란 그 찰나의 생각에 확신을 가질 수 있었다. 인생 뭐 별 거 있냐고들 하지만 여행이란 게 인생의 그 별 거다. 아침 커피도 새하얀 식탁보도 투박한 피아노 연주도 너무 특별해서 가슴속을 파고드는 어떤 순간을 만날 수 있으니 말이다. 어차피 어김없이 흘러갈 세월 그 어떤 순간을 자주 만나야 한다. 언제 곤 돌아갈 기억의 저편을 많이 만들어 두어야 종종 서러울 그 나이 듦 앞에 단념치 않고 미소 지을 수 있을 테니.
베를린에선 흔하디 흔한 중정과 비밀정원 펜션 풍크엔 없었으나 참으로 사랑스러운 발코니는 있었으니. 굳게 닫혀있는 줄로만 알았던 다이닝룸의 큰 문을 여니 싱그러운 공기가 마음속까지 파고드는 그런 공간이 나타나더라. 커피 한 잔을 더 부르는 소리가 귓가에 맴도는 것 같기도. 여행자에게 아침 커피가 단 한 잔이 웬 말인가, 그럴 수 없다. 두 번째 잔을 들고 발코니로 향한다. 가만히 서서 하늘 한 번, 건너편 멋진 건물 한 번 바라본다. 그러곤 향긋한 커피 한 모금 마시고. 켜켜이 자리한 화분들엔 이름 모를 꽃들이 피어 있다. 예쁘구나, 생각하며 또 커피 한 모금. 점점 멍해지는 상태가 무척 반가운 순간이로다. 그래, 계속 이렇게 멍해지자며 마음속 깊이 바라고 있노라니 콧노래도 흘러나오는가. 글쎄, 이게 뭐라고 왜 이리도 좋은가. 이유는 필요 없다, 좋으면 된 것이니. 이 장면에선 이제 재즈 한 곡 흘러나오면 딱 좋겠는데... 그러면서 서서히 페이드 아웃, 무엇이든 좋으니 어느 멋진 장면으로 이어지기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