호텔심리학 4
한 세기를 거슬러 올라가는 시간 여행이 시작된다. 동편의 미테 지구에서 서편의 쿠담 지구로 옮겨 가니 베를린 속 또 다른 베를린을 만난다. 쿠담 지구의 번화가를 잠시간 지나 모퉁이를 돌면 믿을 수 없이 한적한 거리를 만나게 된다. 기쁘게도 바로 거기에서 오래된 아름다움을 지닌, 우아한 베를린을 만났다. 세월의 무게를 견디어 낸 견고한 아름다움이란 바로 이런 게 아닐까 했다. 19세기의 고풍스러움과 오늘날의 노스탤지어를 한껏 머금은 곳, 호텔 펜션 풍크(Pension Funk).
오래된 것에는 신성함이 깃든다. 어떤 역사와 이야기가 공간에 서려 있을지 마음껏 궁금해할 수 있다. 나만의 상상의 타래와 이야기의 진실이 만날 때 생각과 감정은 증폭된다. 호텔 펜션 풍크가 자리한 이 건물은 1895년에 지어졌다고 한다. 내 키의 곱절이나 됨 듯한 둔턱 한 철제문을 열고 들어서니 영화나 책에서 봄직한 19세기 말 아르누보풍의 고풍스러움이 펼쳐진다. 공기마저 100년의 세월을 머금고 있는 곳. 높디높은 층고와 레드 카펫이 깔려 있는 대리석 계단을 마주한 순간 내가 여행자라는 사실을 잠시 잊었다. 비밀스러운 파티에 초대받은 것도 같고, 영화 <미드나잇 인 파리>처럼 우연히 시간 여행에 성공해 만년의 괴테를 만나게 되는 건 아닌가 싶을만치의 설렘과 흥분이 혈관을 타고 흘렀다. 신비롭기까지 한 그 희열과 짜릿함은 나이가 120세쯤 되었다는 19세기 엘리베이터를 조우한 순간 절정에 다다랐다. '터치'는 인간의 근원적 욕구일 테지. 빛바랜 블랙 철제 엘리베이터 문을 만지고 또 만졌다.
오랜 세월 동안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오가며 흥미로운 이야깃거리로 이곳을 채웠을까, 라는 상상으로 정신이 없던 즈음 펜션 풍크 직원이 나와 따스한 환영을 건네주고는 큼지막한 구릿빛 열쇠로 끼익 소리를 내는 문을 열어 우리를 그 내부로 안내했다. 마치, 미스터리한 비밀 공간으로 발을 들이는 느낌. 마법의 옷장 문을 열어 환상의 나니아로 들어갔던 네 남매의 마음이 과연 이런 것이었나 하는 순간적인 상상에 부끄러운 미소가 뺨에 번진다. 그의 말로는 오직 '체크인'을 할 때만, 즉 짐이 있을 때에만 엘리베이터를 탈 수 있다는 것. 머무는 동안에는 멋진 계단을 오르내리면 될 테지만 체크아웃 때에는 어떡하느냐 물었더니 현대식 엘리베이터가 있는 뒷문이 있단다. 19세기로 들어가서 20세기로 나오는 곳. 참 매력적이지 않은가!
어릴 때부터 새 것보다는 오래된 것을 탐닉했다. 왜였을까. 빈티지란 게 무엇인지 제대로 알지도 못하면서 무작정 좋아했다. 호기심의 발로였으리라, 또는 타인들과 다르고 싶던 내밀한 반항이었을지도. 십 대에는 줄곧 이야기와 공상에 빠져 살았다. 그 시절, 엄마가 고등학생 때까지 읽었다던, 해리포터 서재에 있음 직할 아우라를 지닌 다단으로 된 세계문학전집과 오래전에 어쩌다 보니 모았다던 적잖은 샹송 레코드판이 있었고, 출처를 알 수 없는 아주 오래된 전축이 있었던 것이 계기가 되었던 것인지도. 집에선 이 모든 것에 아무도 관심을 주지 않았기에 나 홀로 독차지할 수 있었던 것이 가히 축복이었다. 의미와 맥락도 몰랐을 텐데 셰익스피어와 헤르만 헤세 그리고 톨스토이에 빠져들었다. 발음조차 흉내내기 어려웠지만 이디트 피아프(Edith Piaf)의 노래를 열심히도 흥얼거렸고, 그 눈물을 자아낼만치 서정적인 멜로디는 폭풍처럼 몰아치는 십 대의 감정을 꽉 부여잡았다. 어떤 철학도 의도도 없이 그저 그렇게 빠져들었던, 이유나 계기를 부러 생각해볼 필요도 없었던 그때가 가장 즐거웠을까.
자연스레 옷도 빈티지에 관심을 갖게 되었고(그때는 '구제'에 불과했었나), 한 번은 정말 마음에 드는 티셔츠를 발견했는데 가운데 프린팅 된 부분이 약간 해어진 것을 보고 이거다 싶어 결국 손에 넣어 바로 입고 교회에 갔었다. 이삼십 대 언니들 중 몇몇이 왜 해진 걸 입고 다니니, 라며 환한 미소 띤 격한 염려를 건네길래 '이거 빈티지야!'라고 소리를 쳤던 기억이 여전히 떠오른다. '니들이 빈티지를 알아'라고 마음속으로 소리치며 속상해했던 '나'를 위로하는 재미있는 추억이다.
여전히 내게는 빈티지에 대한 어떤 심오함도 깊이도, 그리고 전문지식도 없지만 어릴 적 언제부턴가 시작된 오래된 것을 향해 품었던 그 애정만큼은 멈추지 않고 자라왔다. 여행을 다니기 시작하면서 그 묘한 감정에 갈수록 더 사로잡혔다. 소유보다는 시간의 흐름과 역사, 공간의 경험으로 관심과 발견이 뻗어 나갔다. 무엇인가를 내게로 불러들이지 않고, 내가 무엇인가로 어딘가로 달려갔다. 세월의 흔적, 역사, 문화의 기원, 그리고 수많은 이들의 이야기를 품고 있을 도시와 공간을 향해. 그로부터 뿜어져 나오는 묘한 기운이 내 생각과 마음을 환하게 비쳐주는 순간을 여행마다 만났다. 이는 노력의 산물이기도 하고, 의식의 흐름이기도 하며, 영원한 장래 희망이기도 한 것. 이토록 강렬한 열망과 스토리를 지닌 내 정신과 취향의 역사가 대륙을 넘어 만난 호텔 펜션 풍크. 이 특별할지도 모를 여정은 이제 겨우 엘리베이터인데 어쩐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