호텔심리학 2
단 며칠이라도, 호텔을 나만을 위한 공간처럼 여기며 머무르는 것은 늘 기대 이상의 즐거움을 안겨주는 놀이라고 할 수 있다. 더욱이 작고 개성 있는 호텔이라면 잠시간 집처럼 여기며 모든 곳을 누비는 거다. 꼭 계단을 이용해 천천히 거닐기. 곳곳의 벽장식, 그림, 조명, 인테리어를 호기심 가득 바라본다. 며칠 후엔 이곳 어디엔가 분명 나만의 애정 스팟이 생긴다. 창밖으로 동네의 모습을 내다 보며 어떤 동네일까 상상해본다.
호텔의 이곳 저곳을 게으르게 둘러 보다 키친으로 향해 마음에 드는 자리를 찾아 조식을 주문한다. 테이블 장식과 캔들, 꽃에 시선을 잠시 두어본다. 응접실 푹신한 소파로 자리를 옮겨 하루의 진정한 시작인 첫 커피를 마신다. 모든 세포가 서서히 깨어나는 그 순간의 희열이란. 밤의 공간과 아침의 공간은 사뭇 다르다. 놓칠 수 없지, 생동감 넘치는 자연의 모습을 닮은 엣헴의 아침 풍경. 무심히 쌓여있는 두꺼운 매거진을 몇 페이지 들여다 본다. 시선은 창밖 정원의 빛을 받아 더욱 검게 빛나는 피아노로 옮겨간다. 기억나는 곡도 거의 없고 수줍기 그지 없지만 피아노는 늘 사람을 끌어당기지. 어느새 그 앞에 앉아 서툴고 투박하게 연주를 해본다. 내 미소는 과연 부끄러움뿐일까, 그보단 작지만 확실한 행복감에 겨운 만족과 설렘의 표출이리라.
느슨히 풀어둔 마음과 모든 감각을 세밀하게 깨워둔 몸을 준비한다면 호텔 그 흥미로운 공간과 재미난 관계를 맺을 수 있다. 가령, 일의 마감 기한, 프로젝트 예산, 30일 챌린지 등 우리네 인간에게는 제약이 주어질 때 더 빛을 발하는 것들이 있지 않은가. 여행이야말로 언제나 끝이 있고 돌아갈 곳이 있기에 더 간절하고 더 아름다운 것 아닌가. 체크인-체크아웃 사이의 제한된 시간 동안 매 순간 집중하며 나를 끌어 당기는 것들을 열린 생각과 마음으로 흡수할 때 그 세상은 다른 세상이 되어 내게 펼쳐진다. 그 적극적인 탐색의 여정에서는 뭐 하나 예사로운 게 없는 거다. 사람, 계단, 열쇠, 테이블, 의자, 창문, 조명, 침대, 욕실, 복도, 물컵, 찻잔, 로브, 슬리퍼, 웰컴 노트... 그곳에선 나조차도 이전의 나와는 사뭇 다를 수가 있는 거다. 자세히 관찰 할수록 더 많이 감동하고, 마음을 열수록 뜻밖의 발견이 뒤따른다.
삶에서 눈 앞의 모든 게 특별하게 다가오는 날은 결코 많지 않다. 그러니 눈 앞에서 만난 그 순간, 나 스스로를 위해 고심해서 고르고 고른 그 공간 그리고 공간의 모든 것들과 열정적으로 교감하는 거다. 세심하게 들여다 보고, 만져 보고, 사진도 찍고. 아름답다, 아늑하다, 멋지다라는 감탄에만 그치기 보단 '왜?'라고 묻고 내 멋대로 답해보는 것. 왜 다이닝룸 한 켠은 서재처럼 책으로 가득한 걸까, 깊은밤 위스키 한 잔은 책장 곁에서 하는 게 좋을까 아니면 응접실 한 구석 암체어에 기대어 하는 게 나을까. 화려한 꽃병 속 저 보랏빛 들풀과도 같은 꽃의 이름은 무얼까, 2층과 3층 계단 사이 어여쁜 공간에 놓여진 저 멋진 의자엔 누군가 앉아본 이 있을까.
공간은 물리적이지만 매우 심리적이며 때론 영적이기까지 하다. 어린 시절 기억이나 여행의 여러 추억을 떠올려보면 공간은 정말 그러하다. 퇴직하신지 적잖은 시간이 흘렀지만 여전히 현역의 아우라를 뿜어 내는 아버지는 군인이셨다. 그리하여 어릴 적부터 꽤 오랜 시간 우리 가족은 관사 생활을 하며 살았다. 마당이 있는 단독주택의 형태인 관사에서도 몇 해 살았었지만 줄곧 아파트 관사에서 살게 되었다. 어렸던 당시엔 특별히 의식하진 못했겠지만 주거 형태가 바뀌니 움직임과 놀이에도 변화가 있었고, 공간을 바라보는 관점이나 생각에도 분명 차이가 있었으리라. 그 때부터 시작된 계단과 마당을 향한 남다른 애정은 기억한다. 삼남매가 휘젓고 다니며 뛰어 놀기엔 집이 좁았던 것일까. 공상이 생활이었던 나는 어느 날부턴가 아파트 계단을 오르 내리며 이 곳은 성(castle)이고, 우리 집은 내 방이라고 여겼다. 이런 재미난 상상이 어떻게 왜 시작됐는지는 알 길이 없지만, 선명한 기억으로 남은 것을 보면 삶의 어느 결정적 시기에 아로새겨진 공간을 향한 추억은 평생 내게 영향을 미치는가 보다. 아파트가 성이 되는 순간 아무 생각 없이 오르내리던 계단은 한 칸 한 칸 소중하다못해 특별해졌다. 그 때부터는 남의 공간이 아닌 내 공간이 되면서 나름대로 생각해낸 성 안을 거니는 사람의 태도와 몸짓을 하게 된다. 영혼 없이 빠르게만 휘리릭 지나치던 지루한 계단을 사뿐 사뿐 찬찬히 오르 내리고, 내 방에 다다르기까지 그 수를 세어 보고, 영화 대사를 치듯 혼잣말을 연거푸 내뱉으면서. 돌이켜 기억 아니 상상해보건대 단 하루도 그 계단은 똑같지 않았으리라.
마당이 있던 집에서 살던 시절의 큰 추억 중 하나는 난로에 머리카락이 타버린 비비 인형이 죽었다 생각되어 오빠와 남동생의 도움으로 뒷마당 한 켠 땅을 파 무덤을 만들어 묻었던 것. 그뿐이랴, 동네 친구들을 다 불러 놓고 마당 창고 지붕에 올라가 보자기를 목에 두른 채 슈퍼맨~하고 뛰어 내린 적도 있던 곳. 아버지의 재빠른 발견으로 병원으로 달려가 결국 수습됐지만, 코가 심하게 깨졌고 친구들은 울었고 나도 울었고. 아파트에선 마당의 추억을 이어 나가기가 쉽지 않았다. 놀이터와 동과 동 사이 공터를 마당으로 여기며 뛰어놀긴 했지만 아쉬움은 적잖았던 듯싶다. 그 때부터 시작된 또 하나의 다른 공상 놀이는 비록 콘크리트 바닥일지언정 마당에서 뻗어 나가 푸르른 정원을 상상 속에서 그림 그리며 뛰놀았던 것. 디즈니 만화영화에서 본 정원, 책에서 본 정원, 부모님을 따라 국내의 이곳 저곳을 여행 다니며 발견하곤 마음 속에 그림으로 저장해두었던 어떤 예쁜 정원을 3D로 눈 앞에 펼쳐 내며 그렇게 발도 정신도 땅에 닿지 않은 채로 둥둥 떠다녔던 어린시절 추억이 생생하다.
스톡홀름 호텔에서 웬 계단과 정원의 어린 시절 회상인가 하겠지만 엣헴에 다다른 순간부터 이 모든 정신적 활동은 빠르고도 강렬하게 일어났다. 공간이 불러 일으키는 복잡미묘하고도 특별한 감정 그리고 소환되는 추억, 발견하는 내밀한 욕망까지. 호텔만으로도 여행이 한 층 더 깊어지는, 영혼(soul)과 정신(spirit) 그리고 생각(mind)이 회오리 치며 뻗아나와 서로 뒤섞이며 축제를 벌이는, 호텔 심리학.