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호텔이다

호텔 심리학, 프롤로그

by Wendy An

비행기를 놓쳤다. 이토록 호기롭고도 모자랄 수 있을까. 늦은 밤 혼자 있었으니 화풀이는 짧고 굵게 모노드라마를 찍었다. 어이상실에 머리와 이마를 몇 대씩 내려쳤다. 합리적인 가격의 직항 티켓인 데다가 이른 아침에 도착하는 밤 12시 출발, 두 마리 토끼를 다 잡은 줄 알았고 며칠을 들떠 있었다. 밤이 되어가던 시간에 갑작스레 연락을 받고 직장 상사 부친 장례에 다녀오게 됐다. 게다가 늘 그렇듯 휴가를 앞두고 몰아치는 업무에 지쳐 있었다. 그래도 그렇지, 미드나잇 인 공항을 좀 해보고 싶었건만. 자정이란 시간은 묘하다. 결국 날짜를 착각하고 말았다. 고객센터로 연락해 돌아오는 날짜에라도 탈 수 있게 해달라고 두 손 닳듯 비는 심정으로 사정했다. 세상 가장 불쌍한 사람이 되어 온갖 시상을 떠올리며 호소해봤지만 들어줄 리 만무했다. 아, 이렇게나 허무하게 놓칠 일인가 말이다. 암스테르담이 더욱 멀게 느껴졌다.


시간, 돈, 에너지. 모든 게 중요하고 긴박하고 아찔했지만 그 순간 그 와중에 가장 먼저 떠오른 건 '호텔'이었다. 나를 기다리고 있을 그곳, 내 방, 내 공간. 온 영혼을 그러모아 발견해낸 그곳. 정신이 들기 시작하면서는 일단 호텔에 연락했다. 어떻게든 다음 비행기 티켓을 구해서 갈터이니 제 날짜 및 시간에 웬디가 나타나지 않더라도 놀라지 말고 기다려주라고. 호텔로부터 그러하지 않을 이유가 없으니 어서 보길 바란다는 답이 왔고, 폭풍 검색 신공으로 상하이에 들러 밤 비행기로 암스테르담에 다다를 수 있다는 티켓을 결제했다. 클릭 클릭 사운드가 이렇게나 비싸게 느껴지기는 또 처음이로세. 이렇게 지불해버린 인생의 쓰디쓴 수업료가 또 한 번 다른 기회를 박탈시키며 내 삶에서 소비됐다. 아무렴 어떠리, 가야만 하는 것을(은 개뿔. 잠시 울고 싶었다). 다음날 새벽 5시 암스테르담 중앙역 도착. 나는 당분간 내 집이 되어줄 그 호텔을 향해 그 어느 때보다도 더 씩씩하게 걸어갔다. 포기하지 않길 얼마나 다행인가. 겨울인가 싶게 포근한 새벽의 기운과 바람이 잘 왔노라며 환영해주는 것 같더라. 이방인인 나는 고요한 새벽부터 캐리어를 질질 끌며 이 도시에 소음을 건네고 있었는데 말이다.


비행기는 놓쳤지만 스토리가 만들어졌다. 호텔에 도착하자마자 환영의 미소를 건네던 덥수룩한 갈색 수염을 가진 그는 나를, 정확히는 나의 스토리를 알아봤다. 마침 나와 메일을 주고받았던 그였던 것이다. 딱 하룻밤을 날렸을 뿐인데 어떠냐며 잔잔한 미소로 위로를 건네는 그의 표정에 힘입어 '이제 됐다, 여기서부터 시작이다'란 생각으로 마음을 가다듬었다.


오래된 진녹색의 카펫이 깔린 계단, 미로를 찾아가는 듯했던 좁고 각진 복도, 조도가 낮은 따스한 오렌지빛 분위기, 이름 모를 화가들의 그림이 걸린 새하얀 페인트 벽을 지나 만난, 본 적 없지만 본 적 있는 듯 무척 그리웠던 내 방. 여행을 앞두고 계획에도 없던 거사를 치르고 온 가여운 여행자의 몸과 마음을 달래기에 충분했던 크기와 공기와 느낌. 안 왔으면 어쩔 뻔했나 싶은 안도의 한숨을 내쉬고선 남은 힘 끌어모아 침대에 점프를 하고 나니 내 방이 나를 기다려주고 끌어당겨준 것이구나란 생각에 행복했다. 빛의 속도로 과거의 과오를 청산하고, 내려앉는 눈꺼풀의 중력 따위 가뿐하게 극복해낸 후 찬찬히 방 여기저기를 바라보았다. 이제 이 곳의 여백에 나의 온기와 생각과 이야기가 한데 섞이겠지. 당분간 가장 안전하고 편안한 집이 되어줄 공간에서 나는 어떤 모습일까, 어떤 생각과 끄적임과 오브제로 이 공간을 채우게 될까. 왜 이곳이어야만 했을까, 에 대한 물음에 어떤 답을 하게 될까.


나는 도시를 여행한다. 내게 있는 모든 감각을 일제히 깨워 도시 속으로 들어가 맘껏 누빈다. 도시에는 수많은 호텔이 있다. 제각각의 매력을 뿜어내며 나와 같은 여행자를 유혹한다. 도시 여행은 곳곳을 탐색하고 탐험하는 발걸음으로 가득 찬 여정이어야 마땅하지만 도시의 축소판과도 같은 호텔에서의 머무름만으로도 충만하고도 적극적인 여행이 된다. 나의 여행은 기승전 호텔이다. 혼연일체 몰입의 정신으로 내 취향과 욕망에 딱 맞는 곳을 열심히 발견한다. 수없이 자문자답하며 심혈을 기울여 선택한다. 그 선택은 취향과 경험을 향한 욕망의 산물로서 여행의 중심축이 된다.


나 스스로가 내 취향을 저격한 희열을 안겨주는 곳, 100년 전으로 시간여행을 하는 듯한 아우라를 뿜어내는 곳, 유니크한 오브제로 가득 채워진 곳, 젊음과 성숙의 디자인이 공존하는 곳, 호기심을 미친 듯이 자아내는 곳, 낯선 분위기로 오감을 자극하는 곳, 익숙함으로 유혹하면서 뜻밖의 비밀스러운 기쁨을 건네주는 곳, 지역 커뮤니티에 활짝 열려있어 로컬의 에너지와 정신으로 무장한 곳. 이 모두 호텔의 다른 이름이다.


묻고 싶어 진다. 당신 여행의 키워드는 무엇인가? 나는, 호텔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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