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간과 나의 관계 맺기, 그 묘한 사귐에 대하여

호텔심리학 9

by Wendy An

한쪽 모퉁이에서 잠시간 공간 전체를 조망한다. 괜히 실눈을 번갈아 뜨며 팔짱을 끼고 비스듬히 서서 말이지. 트렁크를 과연 어느 자리에 두고 생활할 것인가를 고민한다. 물론 짧고 유쾌한 고민이지만 나름 애를 태우며 마음을 쓴다. 왜일까? 새로이 조우한 공간과 관계를 맺어가는 이 특별한 일에서 첫 단추를 잘못 끼우고 싶지 않아서라고 해두자. 언제든 옮기면 될 것을 뭐 그리 유난스럽게 구는가 싶겠지만 여행의 모든 순간은 유난스러워야 마땅하다. 가슴 떨리게 하는 공간과의 만남이라면 더욱 그러하다. 맨 처음 트렁크 자리를 잘 정하면 마음에 안정이 찾아옴은 물론이거니와 짐 풀기도 한결 수월하고 즐거워진다. 아, 이 빛나는 슬기로움이여, 믿어보시라니깐. 인생에서도 그러하지, 비슷해. 일에서도, 특히 관계에서도 내가 있어야 할 곳에 있는 거라면 그 자리를 여전한 방식으로 지키면 된다. 그런데 맞지 않는 옷을 입은 듯한 어색함이나 불편함을 안고 있는 거라면 결국은 그 자리 혹은 그 사람을 떠나게 되지 않는가 말이지. 생각의 흐름이 트렁크를 어디에 둘 것인가의 문제에서 삶의 자리까지 사방팔방으로 날리어 흩어지는군. 여행자의 특권이라 해두자.


물건을 공간 이곳저곳에 걸어두고 올려두다 보면 며칠 새 시간이 안겨다 주는 익숙함이 배어나 공간과 친해진다. 내 소지품들조차도 마치 있어야 할 곳을 스스로 알고 찾는 듯한 신묘막측의 기운이 감돈다랄까. 일상의 패턴을 떠나온 여행이지만 다시금 몸과 마음에 새겨지는 일상을 닮은 패턴에 흐뭇해지는 건 과연 나란 인간의 어리석음인지 여행의 묘미인지. 어느 곳에서라도 반드시 나만의 애정 어린 스폿이 생기기 마련인데 떠나고 나면 그 지점이 구체적으로 그리워진다. 그 지점에서의 내 모습이 가장 천진난만 자연스러웠다랄까.


아침저녁으로 공간의 매무새와 갖춤새는 사뭇 다른 느낌이 들기도 하여 익숙함과 새로움 사이를 오가며 지루할 틈이 없고. 구석구석 빠짐없이 경험하고픈 욕망이 날마다 새롭게 피어나곤 하지. 바깥세상을 여행하느라 공간과 충분한 교제를 나누지 못하면 어쩌나 하는 흐뭇한 염려는 또 어떻고. 그러다 어느 순간 말없이 힘없이 가만히 바라보고 있노라면 공간의 나이를 향해 드는 경외심도 품게 되누나.


안락한 쉼이란 걸 제대로 느껴야겠다 싶어 멍함이 간절할 땐 흔들의자에 앉고, 적막과 고요를 벗 삼는 모닝커피 시간이나 나른한 오후를 깨우는 진한 커피와 함께 책을 읽어야겠다 싶을 땐 창가 패브릭 의자에 자리 잡는다, 어느덧 무척 자연스레 말이지. 그러다 일기를 써야겠거나 음악을 들으며 지출내역을 정리해야겠으면 책상 곁 원목 의자에 앉고. 옷장 곁 사이드 의자는 아끼는 옷이나 가방 얹어두는 전용으로 지정하고, 크나큰 장 선반 한편에 나름의 구획을 나누어 화장품이며 액세서리며 가지런히 정리해두곤 하는 것. 책장이나 서랍은 천천히 하나씩 열어보고 냄새도 맡고 여닫이 소리로 세월도 가늠해 본다.


이렇게 공간과 사귀어 가는 여정. 그 여정 속에서 피어나는 관계의 즐거움. 너무도 상관있는 사이가 된 거 아닌가 말이다. 그 묘한 사귐을 못 잊어서, 특별한 사이가 되고 싶은 나머지 시름시름 앓다가 결국 1년여 만에 다시 찾은 빈 그리고 이네스 아파트. 그리움은 이토록 열렬한 것. 이네스와 재회의 포옹을 하며 건네받은 온기와 미소가 공간에 서려있더라. 아, 이대목에서 흘러나와야 할 음악은 바로 이브 몽땅이 부른 장밋빛 인생(La vie en rose)! 맞아, 인생은 때때로 장밋빛인 게 분명하니까.


여행은 곧 방랑, 부러 어딘가로 향하지만 그곳을 또 홀연히 떠나는 것. 흔적과 자취는 어울리지 않아,라고 늘 생각하는 나인데 말이야, 이곳은 뭐 그리도 왜 이리도 다른 건지. 아름다운 공간은 내가 기억하고 추억하면 그만인 것을 다시 찾은 이네스의 공간은 나의 일부를 -그게 무엇이건- 이곳에 각인시켜두고픈 알 수 없는 욕망을 끌어냈다. 아, 이런 욕망 덩어리 같으니라고. 역시 무언가를 탐하는 것은 부작용을 낳는 법일까. 커피를 마실 때마다 전용잔으로 삼았던 찻잔 한쌍을 호기롭게 갈라놓았다. 말인즉슨 설거지하던 중 컵받침을 떨어뜨려 깨트린 것(개수대가 도자기인 건 혹 변명이 될 수 있을까 하는 연약한 이 내 마음). 이 어여쁜 한쌍은 이대로의 모습이어야만 할 텐데... 란 안타까움. 공간에도 이네스에게도 미안함을 감출 길이 없었다. 어쩌지, 어쩐담.. 만 읊조리며 조심스레 깨진 조각들을 치워두곤 과한 애정을 남몰래 반성했다. 그저 딴생각에 휩싸여 저지른 부주의함이었겠지만 생각 뭉치는 날개를 단 듯 이리저리로 날아가더니 고민의 모습으로 다시 돌아왔다. 이실직고는 빠를수록 좋은 것 아니겠나 싶어 부랴부랴 이네스에게 메시지를 보내는 성급하고 못난 손가락. 두 문장에 이르는 변명 섞인 어설픈 사과를 지워 버리고 담백하고 명확한 문장으로 바꾸어 전송. 얼마 후(몇 분이 지났을까 몇십 분이었을까, 알 수 없다) 그는 그런 걱정일랑 말고 어서 행복한 여행에 집중하라며 단 한 문장으로 무지개 같은 답장을 보내왔다. 이 호방하고도 즉각적인 용서와 격려에 다시 힘입어 콧노래를 부르는 건 과연 몇 초나 걸렸을까. 그 순간 내 영혼의 무게는 깃털과 같았으리라.



마치 장엄한 명령과도 같던 이네스의 한마디에 힘입어 우아한 빈을 행복하게 누비고 거닐었다. 즐거움과 들뜬 마음 사이사이 틈새에 자리 잡은, 도통 사라지지 않던 미안한 감정에 잠시 멈춰 선 발걸음. 정류장에 잠자코 서서 트램을 몇 대 지나 보내다 건너편 아기자기한 꽃집을 발견한 건 여행 중 만난 가장 큰 행운이었다. 미안함은 금세 그와 어울리는 꽃을 고르는 설렘으로 변신했다지. 알록달록 곱기도 한 색을 품은 꽃다발을 품에 안고 가자니 신이 나지 않을 방도가 있나. 다음날 만나기로 한 시간에 건네려 컵에 물을 받아 꽃다발을 꽂고 가장 아끼는 자리에 올려두니 비로소 공간이 완성되는 마법이 펼쳐진 듯했다. 내일까지 신선함과 멋짐을 유지해다오, 라는 마음속 조용한 부탁을 건네며 한참을 바라봤다. 주인을 찾아갈 테지만 잠시간 공간도 내 마음도 밝혀주는 꽃의 위력에 새삼 감탄을 하게 된 어느 바보 같았던 날의 소중한 추억. 결국 이렇게 욕망은 실현되는가. 아니면 이곳에 나의 일부를 각인시키고팠던 이름 모를 그 탐심으로 저지른 실수가 꽃이 되어 이네스에게 기억될 수 있길 바라는 또 다른 욕망의 탄생일까. 아무렴 어떠랴. 꽃을 받아 든 그의 표정이 내게 영원히 각인될 것은 분명하니 다 이루었도다. 이곳, 나와 각별한 관계라 외치고픈 이곳에 언젠가 다시 발길 마음길 닿겠지. 그때엔 나를 위해 그리고 공간을 위해 꼭 꽃을 한 아름 꽂아두겠노라고 다짐해본다.

keywor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