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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Wendy An Oct 04. 2020

공간으로 떠나는 여행

여행의 공간, 을 읽고

여행의 공간

(어느 건축가의 은밀한 기록)  by 우라 가즈야



여행을 추억하는 방식은 여행을 하는 모든 이들의 수만큼 각양각색일 것이다. 밤하늘의 무수한 별들이 비슷한 밝기와 모습으로 빛나고 있는 듯하지만 분명 자세히 들여다본다면 각각 고유의 빛깔과 이야기를 품고 있을 터. 나의 여행도, 나의 이야기와 추억도 그 빛나는 별들 중 하나이길 바란다. 특별히 공간이라는 프레임으로 여행을 추억하고 이야기하는 누군가를 만난다면 그보다 더 반가울 수는 없을 것인데, 그 사람을 '책'이라는 형태로 만났다. 바로 책 '여행의 공간'이다. 여행의 공간이라 하면, 내게는 단연 '호텔'이다. 호텔 이야기를 할라치면 밤을 지새움은 물론이고, 했던 이야기 또 하는 우를 범하는, 제대로 올드 패션드의 향기를 풍기는 게 바로 나인데, 무려 이 책에는 전 세계 매력적인 호텔 69곳의 이야기가 실려 있다. 그것도 건축가의 공간 실측 스케치와 정감 있는 글 그리고 여행의 감정과 생각이 담긴, 실로 강렬한 설렘과 호기심을 유발하는 책이란 말이다.


우선 찬찬히 차례를 살펴본다. 하나씩 하나씩 호텔 이름을 읽어본다. 내심 생각한다. '혹시 내가 다녀온 호텔도 있을까?'란 비밀스러운, 바람 아닌 바람이 깃든 생각을 말이다. 쑥스러운 아쉬움이 뇌리를 스친다. 당연히 없지만 또 뭐 그리 당연할 것까지인가 싶다며 피식 웃음이 나오더라. 그래, 이 목록에서 내 마음을 사로잡는 곳이 있다면 다음 여행은 그곳이다, 라는 호탕한 다짐을 해본다.


저자는 우라 가즈야라는 건축가이자 인테리어 디자이너다. 전 세계 호텔을 다니며 거의 모든 공간을 몇 시간을 공들여 실측하는 것도 모자라 손으로 스케치를 하고 구석구석 자세히 들여본단다. 작은 것도, 큰 것도 어느 하나 놓치지 않은 듯한 오라(aura)가 책의 곳곳에서 느껴졌다. 건축가이니 당연지사겠지만 '작은 것이 곧 큰 것이다'라는 관점과 가치관이 배어나면서도, 그저 여행이라는 흐름에 몸과 마음을 유유히 맡기는 호젓한 한 여행자로서의 따스함과 자유로움도 묻어나더라. 프로의 향기일까, 아니면 삶에 깃든 연륜과 여유의 균형감인 것일까, 책은 계절로 비유해보자면 가을 같다랄까. 그러니까 읽고 있다 보면 적당히 따스한 햇살과 온기에 나부끼는, 살랑이는 가을바람이 연상된다. 색채가 가미된 몇몇 풍경화는 마치 절반 즈음 가을 색채에 물든 단풍 같고 말이다.


스페인 그라나다에 있는 호텔 '파라도르 데 그라나다(PARADOR DE GRANADA)'편에서 그는 이렇게 말한다.

p.235
여행이란 시간과 공간을 일상에서 떼어낸 일련의 '흐름'으로, 그 감흥을 즐기는 고급 유흥 중에 하나다. 따라서 여행의 단면들을 토막토막 늘어놓는다면 그저 두서없이 산만해질 뿐이다. 여행도 맛있는 요리나 긴 음악처럼 기승전결이 있을 뿐 아니라 서막과 여운도 있다. 아 라 카르트 a la carte적인 여행이라 할지라도 그것을 하나의 세트로 즐긴다. (...) 어렵더라도 스스로 그 루트를 만들어가는 것이 좋다. 다소의 실패나 우발적인 사건이야 얼마든지 일어날 수 있다. 호텔 때문에 여행이 결정되는 경우도 얼마든지 있다.


마음속 어딘가가 시원해졌다. 격히 공감되기에 그러하기도 하고, 내 여행의 모습이 이 문장들을 닮아있기 때문이기도 하다. 서막과 여운이 있는 여행을 늘 바라 마지않으며, 그 기승전결의 하이라이트는 단연 '호텔'이기 때문이고, 아울러 호텔 때문에 여행이 결정되는 경우가 얼마든지 있을 뿐만 아니라 그리해야 마땅하다 생각하기 때문이다. 온갖 '때문이다'를 늘어놓으니 호텔이란 공간이 내게 얼마나 강렬한지, 여행이란 게 내게 얼마나 소중하고도 중요한지를 새삼 깨닫는 순간이로다. 그래, 우라 가즈야를 따라 해 보자. 그처럼 나만의 목록을 만들어보자. 나만의 어워드도 만들어 보고, 변덕스럽게 랭킹을 이리저리 바꿔도 보자. 어쩌먼 이미 이런 작당모의(?)를 하고 있는 건 아닐까 싶은데... 그 증거를 대보자면 바로 브런치에 연재 중인 '호텔 심리학'매거진. 에필로그까지 마쳤고, 몇 편의 부록 업데이트를 마무리해 매무새를 완성시켜보고자 한다. 이때가 바로 스윽, 은은히, 은근히 링크를 내밀 때다! 후훗-


호텔과 여행은 하나다. 그렇잖은가? 여행은 곧 호텔에서의 기승전결, 그러니까 호텔에서의 움직임과 흐름을 설계하는 것과 다름없다. 단순히 머무르는 데 그칠 수 없다. 건축가의 매의 눈을 가질 순 없겠지만 호텔의 곳곳 그리고 게스트룸의 면면을 구석구석 들여다보고 느끼고, 시도 때도 없이 궁금해하면서 이리저리 오가는 게 바로 여행의 묘미이자 큰 기쁨이라 할 수 있다. 손길 발길 그리고 마음길 닿았던 지난 여행의 호텔들이 떠오르기도 하고, 오버랩되면서 더 재밌어지기도 하고, 큰 감동 또는 작은 실망 등의 감정이 교차하면서 흐름이 만들어진다.


내 여행 추억은 호텔 찬미로 시작해서 호텔 찬미로 끝난다 해도 과언이 아니다. (밖으로) 갈 곳도 볼 곳도 많은 것이 본디 여행일 테지만 호텔이 곧 도시이자 여행지가 될 수 있다, 충분히. 아침에 눈뜨는 순간부터 깊은 밤 잠드는 시간까지 호텔에서 경험하는 것들을 한 번 찬찬히 생각해보자. 감각과 생각을 깨워 총동원시켜보자. 호텔에서의 머무름과 감각적, 물리적 경험과 오고 가는 이야기 등 모든 것은 곧 여행 전체의 흐름과 모습을 닮아있다는 것을 부정할 수 없게 될 것이다.


우라 가즈야의 따스한 글 중에서 또 하나의 매력적인 문장이 있었다. 부탄에 있는 오라탕 호텔 편이다.

p.197
부탄에선 그 어디에서도 다른 아시아 각국의 일반적인, 급격한 근대화에 따른 위화감을 찾아볼 수 없다. 욕망을 제한하는 것이 이런 아름다움을 남긴다는 사실을 몸소 보여주는 듯하다.


'욕망을 제한하는 것이 이런 아름다움을 남긴다...' 약간의 반전이 내 안에서 펼쳐졌다. 호텔이란 공간도 욕망을 제한한 것의 결과물일 수 있구나. 이어서 생각했다. 어쩌면 내 마음을 사로잡아갔던 호텔들의 면모는 커다란 욕망에서부터 조그마한 욕망까지, 그 욕망을 세련되게 디자인한 것이구나 싶다. 더불어, 머무르는 누군가에게 리듬감 있는 경험이 될 수 있도록 많은 것들을 빼내어 만들었기에 더 아름다웠을지도 모르겠다고. 역시 가하는 것보다 감하는 것이 더 우월한 수준의 작업인 것인가, 란 생각에도 다다른다.


우라 가즈야의 리스트에서 나만의 리스트를 만들어 보았다. 이름하야 Wendy's Wishlist - TOP 5 Hotels!


1) Hotel Imperial 호텔 임페리얼 (오스트리아 빈)

Why? 지난 2년간 연속 빈을 여행하며, 이곳을 지나칠 때마다 수줍게 마음속으로 다짐했다. 꼭 가보리라고...! 그런데 그가 다녀와 이렇게 이야기를 들려주니 다짐을 다시 되새기지 않을 수가 있나...


2) MORGANS 모건스 (미국 뉴욕)

Why? 내 호텔 사랑의 99%는 '부티크' 호텔을 향한다. 그 원조격이라는 이곳에 꼭 발걸음 꾹 디디고 싶다.


3) Hotel Bachmair am See 호텔 바흐마이르 암 제 (독일 로타흐에게른)

Why? 독일어권 여행을 격히 애정 한다. 중세를 한껏 느낄 수 있는, 그것도 매우 독일스러우면서도 튼튼한 목조 건축이라고 하니 더더욱. 아름다운 테게른 호숫가에서 괴테를 읽고 싶다.


4) The Regent Schlosshotel Berlin 리젠트 슐로스 호텔 베를린 (독일 베를린)

Why? 독일어 Schloss는 '성(castle)'이다. 성에서 어찌 아니 머무르고 싶을까? 실은 몇 년 전 베를린 여행을 계획하면서 몇 번이고 눈독 들이던 곳이다. 베를린이 처음이었기에 다른 선택을 했지만(그 선택은 완벽한 추억으로 남아 지금까지 그리움으로 점철되었다) 반드시 다시 향하고픈 베를린의 다음 여행에선 '성'안에 머무르며 온갖 상상을 펼치고 싶다.


5) Clarion Hotel Neptun 클라리온 호텔 넵튠 (덴마크 코펜하겐)

Why? 친환경 에코 호텔의 모든 것을 환경선진국에서 느껴보고 싶게 만든 저자의 글 때문이다. 더불어, 코펜하겐 여행 당시 뉘하운 선착장 인근의 노을이 참 아름다웠고, 저녁놀 벗 삼아 맛있는 음식을 먹기에도 제격이었는데 부근의 좋은 호텔에 머물며 코펜하겐을 더 깊이 만끽해보고 싶다.




이미 세심한 배려와 고민으로 설계된 호텔이라는 공간에서 낯선 재미와 흥분 그리고 호기심으로 나만의 호텔 놀이를 설계해나가는 여행이 참 좋다. 그 남모를, 은밀하고도 열렬한 탐닉과 애정에 쓰담쓰담 격려를 받은 것만 같은 책이라고 하고 싶다. 게다가 언제일지 모를 다음 여행을 보다 생생하게 '호텔' 위주로 그려보게 되니 사라진 줄 알았던 설렘과 기대도 다시 피어오른다. 떠날 수 없을 때에는 글 속으로 깊숙이 들어가는 게 그 어떤 것보다도 훌륭한 처방전이다. 한 나라도, 도시도 그리고 그 속 어딘가에서 오롯한 모습과 분위기로 비밀스러운 스토리를 간직한 채 매력을 마구 뿜어내는 호텔도 모두 공간이다. 우리는 공간으로 여행을 떠나는 것이다. 여행의 축소판인 호텔에서의 여행이 더 소중해졌음은 물론이고, 지난날의 여행을 추억함에 있어서도 다시금 한가득 열정이 충전되었다. 한 건축가의 글과 스케치가 이토록 가슴을 쿵쿵 바운스 시켜줄 줄이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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