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Wendy An May 09. 2024

상상을 강렬히 자극하는 영감의 원천, 그곳은 '카페'

카페는 물리적 공간임과 동시에 정신의 세계다. 그 정신의 세계에서는 온갖 상념, 상상 그리고 창조가 일어난다. 물리적 공간에서는 다양한 만남이 이루어지고, 다정한 대화가 공간을 채운다. 오랜 세월의 역사를 지닌 유럽의 도시를 여행하는 큰 묘미 중 하나가 바로 '카페'다. 세월을 머금은 카페에서 쉼과 대화를 가지는 것이야말로 여행의 기분을 실감하며 만끽하는 가장 평화로운 순간이다. 여행자의 몸과 영혼을 달래기에 그윽한 커피 향과 사람들의 은은한 대화 소리만 한 게 없지. 카페에 자리를 잡고 앉는 순간 여행자에게 찾아드는 특별한 위안도 있다. 마치 중립 지대에 들어선 듯한 기분이 바로 그것. 여행은 국경선을 둘러싼 갈등도 아니고, 전쟁에 비할 일도 전혀 아니지만 타국을 여행할 때면 으레 갖게 되는 긴장감을 내려놓고 안온감을 느낄 수 있는 곳이라는 의미다. 긴장할 일도, 걱정할 일도 없이 그저 커피와 여유를 즐기면 되는 그런 곳. 


가만히 쉼을 즐기고 있노라면 슬슬 공간이 말을 걸어온다. 내 매력을 다 보았냐고, 오랜 세월 겹겹이 쌓인 공간의 역사와 이야기를 알고 싶지 않느냐고 말이다. 충분한 쉼은 어느새 충만함이 되어 공간을 구석구석 살펴보게 된다. 카페인 덕분인지 시선에 호기심이 일고, 흥미가 생기기 시작하면서 머무름은 교감으로 바뀐다. 애초에 꽤 성실히 찾아본 후 엄선해서 발걸음 한 곳이니 이미 애정은 한가득이지 않나. 그런데 공간과의 묘한 교감을 주고받는 순간 특별한 감정이 생겨난다. 그 감정은 이내 상상력을 자극한다. 100년 전으로 거슬러 올라가 철학을 논하고 있는 무리 사이에 끼어 용기 있게 한마디 툭 던지는 상상, 또는 30년 후 할머니가 되어 다시 이곳을 찾아 적요를 즐기며 책을 읽는 상상 말이다. 상상이 언젠간 현실이 되기도 한다지. 벌써 세 해째 연인과 함께 발걸음 하고 있는 오스트리아 빈의 카페 하벨카(Café Hawelka)에서 하벨카와 우리의 만남 10주년을 기념하는 건 어떨까. 7번만 더 가면 된다. 생각만 해도 신이 난다.

카페라는 세계를 생각하고 추억할 때면 늘 이 네 도시-빈, 베를린, 코펜하겐, 암스테르담-가 떠오른다. 유럽이 아니어도, 도시가 아니어도, 카페란 곳은 차라리 신비감마저 감도는 특별한 곳이다. 다만, 유독 내 마음을 사로잡아 잊을 수 없는 곳들이 이 네 도시에 있다. 감각과 감성을 툭 건드리면서 깨워주었고, 미감과 분위기에 취한 나머지 황홀한 기분에 휩싸이게 했다. 호기심과 상상력을 강렬하게 자극했고, 문학과 철학을 향한 관심과 흥미를 북돋워주었다. 작고 세밀한 자극에 더 예민하게 반응하며 감도를 높이도록 정신의 옆구리를 찔러 주었고, 인간을 관찰하며 위대함과 다양함에 대해 생각해 보는 기회를 마련해 주었다. 생김새와 사고방식 등 서로가 무척 다른 우리들이지만 이 공간에서 시간을 함께 점유하고, 공기 중에 상념과 상상을 띄워 공명한다는 생각이 들기도 하더라. 밥을 먹는 레스토랑에서, 술을 마시는 바에서, 영화를 보는 극장에서 혹은 연주를 즐기는 음악당에서, 그 어디에서도 동일하게 가질 수 없는 남다른 느낌이다. 오직 카페만이 주는 그것.


베를린 샤를로텐부르크 쿠담 지구의 어느 조용한 길목에는 문학의 집(Literaturhaus)이 있다. 문학의 집엔 겨울 정원(Wintergarten)이라는 카페가 있다. 정문으로 들어서면 제법 넓은 정원이 펼쳐진다. 정돈된 여러 채의 건물들과는 달리 정원은 자연 날 것의 분위기를 물씬 풍기는 모습이다. 카페로 들어서니 크디큰 창에 흰 커튼이 길고 우아하게 드리워 있고, 공간의 구획이 비밀스레 그어져 있어 자리를 찾는 여정에 설렘이 피어났다. 진한 블랙커피와 녹진한 크림을 주문해 감미로운 크레마를 만들어 두어 모금 마시고 나니 베를린 여행의 마지막 날이란 사실을 잠시 잊을 수 있었다. 아쉬운 마음에 애플 파이도 주문해 쌉싸름한 아쉬움과 달콤함을 오가며 ‘이게 바로 여행의 맛이려나’ 생각했다. 작지 않은 공간이 브런치를 즐기시는 백발의 점잖은 노인분들로 가득 채워져 있었는데 그들 틈에 끼어 함께 있다는 게 그저 행복했다. 


미래로 잠시 가 본 느낌이었기 때문일까. 머잖은 우리의 모습이길 바라는 대화를 마침 나눈 덕분이었을까. 이때 마침 생겨난 로망이 있다. 바로, 백발의 단발머리다. 유독 베를린에서 펌을 하지 않고 단정한 단발을 하신 아름다운 백발의 여성들을 많이 만났기 때문이다. 미래의 내 모습을 미리 그리고 있다는 건 꽤 유쾌한 일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이때야말로 미리 그려둔 또 다른 그림을 고백하기에 제격이란 생각이 드는데, 나는 이미 묘비명을 정해두었다. 묘비가 무슨 필요겠나 싶어 점점 생각이 바뀌고 있긴 하지만. 아무튼 문학 속에서 발견해 둔 한 문장을 묘비명으로 삼았다. 그건 바로 ‘나는 내가 어디로 가야 할지를 알고 있다’라는 것. 그곳이 어디인지 정확히 알고 있다기보다는 아는 척하며 가보려 한다. 그래서 여행과 나의 관계가 이리도 죽이 잘 맞는 거 아닌가 싶기도 하고. 


7년 만에 다시 찾은 암스테르담. 이번엔 꼭 호수 공원(Vondel Park) 부근에 머무르며 매일 아침의 공원 산책을 하겠노라 꾀했다. 이른 아침마다 세수는 생략하고 푸른 초원과 호수와 신나게 산책하는 강아지들을 바라보며 영혼을 정화했다. 명상이 따로 없었다. 호텔로 돌아오는 길 건너편 일찍이 문을 연 카페가 늘 궁금했던 것. 딱 마음에 드는 조도와 잔잔한 활기 그리고 새어 나오는 매력적인 음악까지 우리를 끌어당기고 있었다. 끌림엔 저항하지 않는 게 상책 아닐는지. 산책 후 아침 첫 커피가 이토록 럭셔리해도 되나 싶을 만치 훌륭한 커피맛과 향에 탄복하고 말았다. 그런데 정말 흥미로웠던 건 카페 이름(‘schuurmanoomkensgrassotti’)이다. 도통 한 음절도 읽을 수가 없을 뿐만 아니라 읽는 흉내조차 낼 수 없었다. 외래어 표기법을 바탕으로 읽어보면 ‘스휘르마놈켄스흐라소티’다. 


당혹감과 수줍음에 그만 이름의 '의미'와 '이토록 이름이 긴 이유'를 묻지 못한 게 여전히 한으로 남아있지만, 산책 후 훌륭한 커피로 하루를 기분 좋게 열었던 기억이면 충분하다 싶다. 암스테르담을 떠나는 마지막 날 아침에도 산책 후 다시 찾아 연거푸 플랫화이트와 카페라테를 찬찬히 즐겼다. 그러는 동안 만났던 뒷 테이블 강아지 친구를 여태 잊을 수가 없는데 얼굴이 아직도 생생하다. 우리 테이블 위 빵 냄새가 그를 끌어당겼는지 꼬리를 흔들며 연인 옆에 딱 붙어 앉았다. 뒤편에 앉아 책을 읽고 있던 주인과 눈이 마주친 우리는 그저 웃을 수밖에. 빵은 줄 수 없었지만 사랑은 줄 수 있었다. 덩치가 제법인 녀석이 어찌나 사랑스럽던지 눈을 뗄 수가 없었다. 녀석은 빵을 포기했는지 급기야 바닥에 비스듬히 누워버렸다. 위로의 손길을 조금 보탰더니 마치 ‘어서 쓰다듬으라 인간이여’라는 듯 그윽한 눈빛을 보내길래 조금 더 힘을 실어 쓰다듬었다. 쭈그려 앉아 쓰다듬기만 하려니 행복하지만 힘들어서 조금 쉬었는데, 멈추는 순간 고개를 들고 눈치를 주는 거 아니겠나. 보아하니 주인도 강아지도 카페 단골의 모습이 역력한 게 여간 편안해 보이는 게 아닌 거다. 카페가 안겨준 기분 좋은 인연 덕분에 잊을 수 없는 추억을 잔뜩 충전했다. 그로부터 한참을 더 쓰다듬었다고 한다. 


적당한 시끄러움과 생동감 그리고 사람들의 환한 미소가 어우러져 빛이 나는 곳, 코펜하겐의 시장 토르브할렌으로 향했다. 커피 마시러 부러 시장에 간다는 사실이 꽤 매력적으로 느껴졌다. 활활 타오르는 불처럼 빛을 최대로 뿜어내던 햇살에 눈이 부셨던 어느 가을날의 오후 3시 카페 ‘더 커피 콜렉티브(The Coffee Collective)’의 바(bar)에 자리를 잡고 에스프레소 한 잔을 들이켰다. 오후의 나른함과 이글거리는 햇살이, 시장의 활기와 사람들의 생동감 넘치는 움직임이 나에게 분명 말하고 있었다. '지금, 에스프레소가 딱이야.!' 여행자에겐 일명 ‘커피 시계’가 있다. 긴 하루를 위해 아침을 깨우고, 그윽한 향으로 지친 몸과 영혼을 위로하고, 저물어 가는 하루에 강렬히 저항하며 타오르는 태양 빛을 벗 삼아 인생을 음미하는, 커피가 필요한 순간을 알려주는 시계랄까. 

커피 시계는 비단 타이밍을 알려주는 기능만 하지 않는다는 것. 오랜 기억 속 익숙함에 새로운 경험 한 스푼, 기분 좋은 상상 한 스푼, 낯선 감정 한 스푼 씩 섞어 새로운 생각의 문을 열어준다. 사방팔방으로부터 찾아오는 오만가지 자극에 마음을 활짝 여는 의식과 다름없다. 에스프레소 한 잔으로 이 의식을 끝내기엔 못내 아쉬워 드립 커피를 한 잔 더 주문했다. 일 하는 사람들도, 카페와 커피를 즐기고 있는 사람들도 시장의 에너지를 듬뿍 담뿍 받고 있는 기운이 느껴졌다. 공간을 점령한 활력은 금세 내게도 전염됐다. 긍정과 회복의 기운이 솟아나고, 사고가 명료해지면서, 남은 하루를 최고의 시간으로 만들기 위한 각오를 다지게 되더라. 카페의 전형적인 모습 및 기대에서 벗어나 새로운 바이브를 만들어 가는 단단한 모습은 감흥을 불러일으켰고 영감의 세계로 나를 초대하는 듯했다. 그 초대와 부름에 기꺼이 응하면 흥미진진한 세계가 펼쳐질 것만 같던 그 찰나의 흥분과 희열을 다시 느끼는 것만 같은 기분 좋은 착각이 든다. 


베를린 커피 순례의 대미를 장식했던 곳, 카페 자비니(Café Savigny)는 공간에서 커피 향에 버금가는 문학과 철학의 향이 났다. 자비니 광장 근처 어느 작은 동네에 숨겨져 있는 곳으로, 애정을 갖고 찾아야 보인다. 이전 세기의 문학도들과 철학도들이 함께 모여 열띤 대화와 논쟁을 가졌을 것만 같은 분위기가 짙게 드리운 곳이다. 빛바랜 원목 테이블과 의자의 색, 빳빳하게 다린 하얗디 하얀 테이블보, 널찍이 구석에 놓인 짙은 오렌지빛 조명과 나무바닥이 어떤 ‘정서’를 만들어내고 있었다. 그 정서에 스며들기 위해선 독일 고전 문학 속으로 당장에 뛰어들어야 할 것만 같더라. 그렇지 않아도 독서모임과 철학모임이 주기적으로 열리는 곳이라고. 철없는 여행자는 ‘와 이런 카페라면 매일 매일 상주하고 싶다!’라는 생각으로 일단 신나는 공상에 빠지고 본다. 그러다가는 ’괴테가 저 문을 열고 들어오면 어떡하지? 멋지게 인사를 건넬 수 있을까?’라는 괴이하고도 재미난 상상을 한다. 에스프레소 마키아토를 한 잔 마시고 나니 현실로 되돌아왔지만 가슴은 여전히 콩닥거렸다. 


커피와 빈(Wien)과 카페는 수학이나 과학 공식을 만들어 증명하고픈 어떤 강력한 가설이자 이론이다. 빈의 카페에서 멜랑즈를 마시는 그 순간의 행복을 뛰어넘을 수 있는 여행의 순간은 아직 없었기 때문이다. 빈에서 가장 좋아하는 카페 하벨카가 그리울 때마다 하는 생각이다. 이 그리움은 오직 하벨카에서만 느낄 수 있는 강렬한 감정을 향한다. 하벨카는 단골 노인분들과 함께 우아하게 나이 들어가고 있다. 오랜 세월 지켜온 분위기와 커피하우스로서의 자부심을 굳건히 유지하고 있다. 하벨카의 커피엔 묘하게도 기품이 있다. ‘내가 진짜야, 내가 바로 비엔나야’라고 말하고 있는 듯한 힘이 느껴진달까. 안으로 들어서는 순간 또 다른 ‘빈’이 펼쳐진다. 하벨카에서 커피를 마시는 시간을 가져보지 않았다면 빈을 만났다고 할 수 없겠다는 생각이 들기도 한다. 과연 어떤 매력 혹은 마력인 걸까. 하벨카를 찾는 이들은 모두가 각양각색이지만, 신문과 잡지를 읽는 노인세대와 홀로 책을 읽는 젊은 세대 그리고 옹기종기 모여 긴밀한 대화를 나누는 다양한 세대가 섞여 있다. 카페를 채우는 대화를 다 그러모아 무게를 재본다면 지구보다 더 무거울지도?


벽을 가득 채운 흑백 사진과 신문 기사, 누군가의 자필 편지와 드로잉이 멋스럽다. 이게 바로 요즘 말마따나 ‘힙’ 아닐지. 붉은색 패브릭 소파와 짙은 밤색의 원목 소파가 각자의 진한 매력을 발산하지만 서로 간의 어우러짐이 제법이다. 작고 둥근달처럼 떠있는 노란빛의 조명은 공간과 사람들을 어여삐 비춰준다. 하벨카에 잠잠히 머무르고 있다 보면 ‘아름다운 밤’에 초대받은 기분이 든다. 무도회나 파티가 아닌 ‘예술의 밤’인 거다. 누군가는 그림을 그리고, 누군가는 글을 쓰는 밤. 누군가는 노래를 부르고, 누군가는 왈츠를 추는 밤. 누군가는 피아노를 치고, 누군가는 시를 낭송하는, 그런 밤. 열렬히 원하지만 어디서도 본 적 없는 상상 속 그런 밤. 왠지 하벨카에선 모든 게 가능할 것만 같다. 하벨카에서 아인슈패너를 마실 때마다 하는 상상인데 도통 지루하지가 않다. 다음번엔 꼭 저녁노을 지는 무렵에 하벨카로 향해 고독과 삶에 대해, 여행의 아름다움에 관해 글을 끄적이고 싶다. 어쩌면 시 한 편 외워두고는 나긋이 읊조리게 될지도.


매거진의 이전글 여행 속에도 ‘휴가’가 있다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