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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Wendy An Mar 21. 2024

음악으로 만나는 도시

클래식으로 만나는 클래식

스트리밍 시대가 도래하기 전 카세트테이프로 클래식 음악을 즐기던 어릴 적 시절이 그립다. 이 그리움의 정체는 ‘음악의 물성’을 향한 향수이기도 하지만 ‘첫 만남’의 추억이기도 하다. 카세트테이프를 넣다 뺐다 뒤집고, 재생 버튼과 빨리 감기 버튼을 수도 없이 눌러가며 음악을 듣던 날들은 돌이켜 볼수록 아름답다. 앞면 트랙이 다 끝나면 뒷면으로 뒤집어 끼워야 하는 건 불편이라기보다 기꺼운 즐거움이었다. 십 대 시절 어느 날 학교에서 돌아와 보니 전축 아래 선반이 샛노란 색의 카세트테이프 세트로 가득 채워져 있었다. 초등학교 6학년 때까진 피아노 학원을 다녔던 터라 얕게나마 클래식 음악에 흥미를 갖고 있었다. 체르니와 쇼팽, 바흐 이름을 알고 있단 정도의 얄팍함에 불과했지만 말로 표현할 수 없는 이끌림이 분명 있었다. 그 낌새를 눈치챈 엄마의 빠른 조치였던 걸까. 며칠 밤낮으로 몇십 개의 테이프들을 번갈아 들어보며 상상했었다. 어른이 된 내가 아름답게 차려입고 음악당의 좋은 자리에 앉아 오케스트라의 연주를 감상하며 행복해하는 그림 말이다.   


첫 만남과 상상 덕분에 여전히 클래식 음악을 애호하고 즐겨 듣는다. 조예가 깊지 않고 부지런히 음악당을 찾아다니지도 않지만 늘 가까이 한다. 그래서인지 음악으로 도시를 만날 때 유독 행복하다. 오래된 도시로 향할 때면 꼭 음악으로 도시를 만날 기회를 찾는다. 여행 중 필하모닉이나 오페라를 즐기는 밤이면 '클래식으로 만나는 클래식’이란 생각이 들면서 도시와 더 가까워지는 기분이 든다. 클래식은 클래식으로 만나야만 감춰진 매력이나 비밀을 찾을 수 있다는 나만의 여행 철학이라고나 할까. 200년 전 쓰인 곡을 동시대의 사람들이 연주하는 모습을 바라보는 건 시공간을 초월하는 기시감을 일으키기도 한다. 음악과 연주는 그 자체로 아름답기 그지없지만, 내가 찾는 건 어쩌면 시간 여행을 한다는 착각 아닐는지. 영원히 가볼 수 없을 시대를 향한 기이한 향수를 달래며 마음을 채우는 건 오직 음악만이 할 수 있는 일이니까. 


어쩌다 한 번씩 서울에서, 휴학 중 몇 개월 머물렀던 미국에서 그리고 인생 첫 유럽 배낭여행에서 클래식을 만났었지만 그뿐이었다. 덜 여물고 덜 성숙하고 다소 무지했던 나는 그저 듣기만 했을 뿐 충분히 음미하지 못했다. 놀라운 예술의 향연 앞에서 어떻게 마음과 감각의 문을 열어야 하는지 몰랐던 것이다. 그저 마음과 감각의 모든 세포를 깨우고 에너지를 그러모아 몰입하고 즐기면 그만인 것을 말이다. 2017년 베를린 필과의 만남에서부터 여행과 음악이 떼려야 뗄 수 없는 관계가 됐다. 수줍은 고백이지만 삼십 대 중반을 지나던 그때 왜인지 여행도 성숙해져야 할 것만 같았다. 지금 생각하면 우습기 짝이 없는데 그땐 아무튼 진지하게도 성숙을 추구했다. 세상도 나도 평정을 찾아 고요해진 듯했고, 일과 사랑의 영역에서 경험도 충분히 한 것 같다는 자존감이 자리를 잡고 있었던 것이다. 처음 만나는 베를린에서 성숙한 어른의 마음으로 가장 하고 싶었던 건 바로 잘 차려입고 콘서트홀로 향해 베를린 필하모닉 오케스트라의 연주를 음미하는 것이었다. 


10월의 어느 가을날 밤 설레는 마음을 부여잡고 베를린 필하모니로 향했다. 세계적인 지휘자 사이먼 래틀 경의 지휘로 모차르트, 윌리엄 월튼, 그리고 졸탄 코다이의 곡을 만났다. 첫곡이었던 모차르트 피아노협주곡 27번 연주는 특별히 감동적이었다. 연주 실력이나 음향 시스템이야 당연히 나무랄 데 없었겠지만 내 감격의 근원은 아니었다. 피아노 독주 구간에서 청아하고 부드러운 피아노 선율에 완전히 매료됐다. 당시 칠십의 노장이던 피아니스트 미츠코 우치다의 연주를 바라보노라니 무언가 가슴에서 울컥하고 감정이 터져 나왔다. 강렬히 응시하며 연주를 보노라면 연륜의 힘이 폭발했고, 눈을 감고 듣노라니 건재한 젊음의 에너지가 건반을 타고 경쾌하게 전해졌다. 백발이 되기까지 치열하고도 충만한 음악인의 소명을 다하며 살아왔을 그녀의 삶을 상상하게 되더라. 다시 오케스트라의 연주가 피아노 선율 위로 합쳐지는 찰나에 눈물이 핑 돌았다. 마치 모차르트의 음악에 서려 있는 감정이 내 마음속 내밀한 곳까지 파고들어 와 말을 걸어오는 것만 같았다. 감정이 다층을 이루며 입체적으로 폭발했다. 음악이 터치하고 자극하는 몸과 마음의 모든 곳에서 흥분과 환희가 터져 나왔다. 


18세기 모차르트 음악에 이어 20세기로 껑충 시간 이동을 했다. 윌리엄 월튼의 비올라 협주곡과 졸탄 코다이의 ‘하리 야노스’는 낯섦과 새로움의 향연이었다. 태어나 처음 들어본 20세기 작곡가들의 곡을 베를린 필의 연주로 만나고 있다는 사실만으로도 과하게 행복했다. 이때의 경험이 계기가 되어 필하모닉 연주 프로그램에 관심을 가지기 시작했다. 여행을 앞두고 있을 때면 주로 필하모닉 일정과 지휘자에 집중했던 예전과 달리 관심과 결정의 폭이 넓어진 게 신기하고 즐거웠다. 클래식 음악이라는 대양에서 너울거리는 물결을 타며 찬찬히 취향을 찾아가는 여정이었다. 첫 만남인지라 자리에 욕심을 좀 부려봤는데 탁월하고도 기특한 선택이었다. 양옆 앞뒤로 곱게 차려입은 백발의 노인들이 대다수였는데 부디 나와 우리의 언젠가의 모습이기를 바라는 염원을 했다. 경제력, 체력, 취향과 마음의 여유 그리고 예술과 앎에 대한 열정이여 부디 나와 오랫동안 함께해 주오. 


2018년 늦여름 무렵 고아한 예술의 도시 빈과 첫 조우를 앞두고 있었다. 드디어 만나는구나 싶은 마음에 빈 필하모닉 오케스트라를 향한 설렘과 흥분이 솟구치고 있었다. 그런데 아쉽게도 빈 필은 잘츠부르크 페스티벌에 참여 중이었다. 일주일만 뒤로 미루면 만날 수 있었지만 직장인의 휴가에 융통성을 발휘할 여지는 없었기에 눈물을 머금고 포기했다. 2019년에는 초가을에 빈으로 향했지만 빈 필은 잘츠부르크 페스티벌에 이어 해외 원정 연주 중이었다. 이 운명의 장난을 어찌한단 말인가. 비탄에 잠겨 있던 것도 잠시 문득 빈 국립오페라극장이 떠올랐다. 유럽의 3대 오페라극장이기도 하고 빈을 상징하는 건축물이기에 꼭 발걸음 하려는 계획이었다. 정작 오페라를 볼 생각은 미처 하지 않고 있었지만. 여행 일정 중 딱 중간 즈음 좋은 날에 주세페 베르디의 오페라 ‘라 트라비아타’를 볼 수 있는 행운을 바로 거머쥐었다. 


빈 국립오페라극장에서 오페라를 관람하는 나를 상상하노라니 여행을 앞둔 기다림이 지루하기는커녕 흥미진진했다. 어떤 모습이고 싶은지를 스스로에게 계속 물어가며 나만의 그림을 완성해 나갔다. 내가 연출할 수 있는 우아함 혹은 화려함의 극치로 ‘길을 잃은 여인(라 트라비아타)’을 만나고 싶다고 생각했다. 마침 긴 머리에 히피펌을 해둔 참이었고, 평소라면 생각도 못했을 과감한 블랙 원피스를 주문했다. 블랙 원피스에 하이힐을 신고 진주목걸이와 귀걸이를 한 채 몇 번을 거울 앞에서 서성이며 고민했다. 단 한 번 밖에 입지 못할지도 모를 옷을 입고 여전히 수줍었지만, 내 삶의 다른 어떤 순간 보다도 완벽하게 어울리는 모습이었다. 파티복스러운 옷을 입고 있었다 보니 라 트라비아타 1막 비올레타의 살롱에서 열리는 파티 장면에서 당장 무대에 뛰어들어가 파티를 즐기는 상상을 했다. 일렁였던 이 욕망은 인터미션에 샴페인을 한 잔 즐기며 잠재울 수 있었다. 고민과 정성을 들인 옷차림이 오페라 몰입에 이토록 큰 역할을 할 줄이야. 


1853년 베네치아에서 초연된 작품을 21세기 어느 날 밤 1869년에 지어진 오페라하우스에서 보노라니 묘한 기분이 들었다. 오래된 유럽의 도시에서 할 수 있는 가장 즐거운 시간 여행 아닐까. 라 트라비아타의 줄거리와 초연 등의 역사를 찾아보고, 음악도 찾아 들어본 후 오페라를 본 감동은 꽤 입체적이었다. 이때부터 연주나 공연을 앞두고 있을 때면 더 촘촘히 찾아보고 들어보고 음미해 보는 습관이 길러졌다. 설렘 가득한 마음으로 미리 준비하고, 이런저런 상상을 해본 후 음악회에 임하는 건 다른 차원의 경험이 되었다. 이탈리아어는 알아듣지 못했지만 비올레타의 애절한 사랑의 마음과 사랑을 저버릴 수밖에 없는 비탄, 죽음을 앞두고 있는 두려움에 격렬히 빨려 들어갔다. 누구나 살면서 한 번쯤은 길을 잃기도 하고, 한 번쯤은 누군가를 열렬히 흠모하기도 하지 않나. 사랑과 죽음의 이야기야말로 삶의 본질이자 이야기의 시초라는 생각이 들더라. 음악도 문학처럼 타인의 이야기가 내 것으로 다가오는 순간 최고조의 절정을 만난다는 걸 깨닫는 귀한 시간이었다.


팬데믹의 긴 암흑을 지나 다시 빈을 찾았던 2022년 10월의 가을. 여행을 앞두고 제일 먼저 준비한 건 빈 필하모닉 오케스트라 티켓이었다. 4년 간의 기다림 끝에 드디어 만났다. 혹 만날 수 없는 게 숙명일까 생각한 적도 있었지만 삶을 운명에만 맡기기엔 인생이 너무 짧지 않은가. 여행의 목적이 오케스트라를 만나는 것뿐일지라도 꼭 해내고 싶었다. 만난 적도 없는데 혼자서 짝사랑이 좀 지나친 감이 있지만, 어엿한 어른이 되어 오래전부터 품고 있던 꿈을 이루어준 나 자신이 꽤 멋있어 보였다. 이 순간을 그리고 그때의 생각과 감정을 잘 간직해두리라 다짐했다. 내가 나를 잘 읽으며 살아가고 있다는 증거이기도 하고, 나이 들어가며 나 자신을 정확히 기쁘게 할 줄 아는 어른이 되고 싶었기 때문이다. 떨리는 마음으로 연인의 손을 부여잡고 빈 콘체르트하우스 메인홀로 향했다. 빈 필하모닉 오케스트라는 프란츠 벨저 뫼스트의 지휘로 브람스와 리하르트 슈트라우스의 곡을 연주했다. 


브람스의 2곡 중 첫곡이 브람스의 ‘비극적 서곡 Op.81 라단조’였다. 아름다운 선율에 서린 슬픔과 고뇌의 정서가 물씬 느껴지는 곡이었다. 우아함과 웅장함 사이를 오가며 짙은 비극의 정서로 관객을 끌어가는 힘이 놀라웠다. 슬픔이 지배적으로 느껴지는 연주에서 과연 누가 저항할 수 있었을까. 훌륭한 연주에 몸과 마음을 맡긴 채 몰입해 보는 건 삶의 의무라 생각하기로 했다. 혼자서는 꺼낼 수 없을, 아니 내 안에 존재하는지도 몰랐던 감정과 생각을 끄집어내 주었다. 브람스의 비극적 서곡 초연이 1880년대 빈에서 있었다고 하니 시대를 초월한 감동이 또다시 밀려왔다. 마지막 곡은 정말 특별했는데 리하르트 슈트라우스의 교향시 Op.30 '자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였다. 영화 ‘스페이스 오디세이 2001’ 수록곡으로 워낙 익숙해서 반가웠고, 무엇보다 빈 필하모닉의 연주로 이 곡을 듣게 될 줄 상상도 못 했던 터라 감격스러웠다.


니체의 책을 읽고 감명을 받은 슈트라우스가 니체의 철학과 언어를 아름답다고 칭송하며 음악에 녹여낸 곡이라고 한다. 음악과 철학의 결합을 꾀한 작품이라는 평을 받았다는데 이보다 더 정확한 표현이 있을까. 장르 너머로 영감을 주고받으며 결합을 이뤄내는 예술의 세계는 참 신비롭기 그지없다. 온 우주의 차원으로 보면 나는 그저 먼지에 견줄 한 명의 관객에 불과하다. 하지만 기꺼이 즐겁게, 호기심을 여전히 지닌 채 음악의 세계로 빠져드는 여행을 하는 내가 참 좋더라. 예술은 소수의 전유물이 아닌 우리 모두의 피난처이자 놀이터라 생각하기로 마음먹은 것도 여행 덕분이었다. 음악이든 미술이든 건축이든 예술이 건네주는 감동과 환희에 동참하자. 위로받고 영감 받고 공감하고 때론 분석해 보며 심신을 충만히 채워가는 삶을 살아가자. 


2023년 햇살이 여전히 뜨거운 늦가을에 암스테르담을 찾았다. 7년 만에 다시 찾는 그곳에서도 역시 제일 먼저 하고 싶었던 건 로열 콘세르트허바우 오케스트라 연주를 보는 것이었다. 세계에서 가장 뛰어난 음향을 자랑하는 곳인 데다가 연주자들의 꿈의 무대라고. 관객에게도 꿈의 객석 되겠다. 이반 피셔의 찬란한 지휘와 오케스트라의 환상적인 연주로 도시를 재회한 감회에 뭉클하게 젖어들었다. 베를린 필 수석지휘자 이반 피셔가 고령이시니 죄송한 말이지만 살아계실 때 꼭 한 번 만나고 싶었다. 멘델스존 서곡에서 시작해 프랑스 인상주의 음악가 드뷔시, 사티 그리고 라벨의 곡으로 연결되는 흐름이 꿈결처럼 아름다웠다. 음악에서 사랑스러움이 뚝뚝 떨어지는 장면을 눈으로 보고 있는 것만 같았달까. 특히 멘델스존 바이올린 협주곡에서 이반 피셔의 지휘와 바이올리니스트 제임스 에네스의 독주는 놀라우리만치 감동적이었다. 지휘자와 바이올린 솔리스트가 함께 왈츠를 추듯 호흡을 맞추며 극강의 연주를 뿜어내는 장면에선 시간이 멈춘 듯했다. 온 세상이 잠시 무음처리된 것 같았고 오직 두 사람만이 지구의 종말을 앞둔 순간 생의 마지막 연주를 하고 있는 것만 같았다. 영화의 한 장면 같기도 한 비현실적인 순간이었다. 열띤 몰입으로 인해 온몸이 아픈 지경에 이르렀지만 관객들의 열화와 같은 기립박수에 기쁜 마음으로 동참했다. 단 몇 분 만에 나를 다른 세상으로 데려가 주는 신묘한 음악의 세계를 사랑하지 않고 사는 방법을 이제는 모르겠다. 


오랜 세월 잊고 살았던 향수가 고개를 쑥 내민 2024년 겨울의 끝자락 2월. 생애 첫 도쿄 여행을 앞두고 있었다. 당연히 도쿄 필하모닉 오케스트라 연주 일정을 찾아보려 홈페이지에 접속한 순간 탄성을 내지르고 말았다. 도쿄필 명예음악감독 정명훈의 지휘로 베토벤을 만날 수 있는 기회가 여행 일정과 겹친다는 사실을 알게된 것. 어린 시절 엄마의 관심으로 정트리오의 음악과 이야기를 종종 듣곤 했었다. 마에스트로 정명훈의 행보는 이후로도 자연스레 관심을 갖고 있었고, 바이올리니스트 정경화의 음악은 앨범을 찾아 들으며 애정을 쌓고 있었다. 다만 부지런하지 못한 관계로 연주를 찾아보진 못하고 살고 있던 차에 도쿄에서 만나다니 하늘이 내려준 선물 같았다. 게다가 프로그램이 베토벤의 전원교향곡이었다. 익숙해서 좋고, 나이 들수록 전원을 향한 베토벤의 사랑에 공감하게 되니 더 친근하게 느껴지는 곡이다. 


일흔을 넘긴 마에스트로의 꼿꼿한 자세와 우아하게 춤을 추는 듯한 몸짓에서 극도의 섬세함이 발현되는 순간을 목격했다. 여유와 겸손이 묻어난 지휘는 숨 막히게 아름다웠다. 놀라웠던 건 그를 향한 오케스트라 단원들과 관객들의 존경과 환희가 나를 압도하는 순간이 있었다는 것이다. 도쿄로 떠나기 전 3주 동안 카라얀의 앨범으로 전원교향곡을 날마다 들으며 지냈다. 카라얀 앨범을 들었던 이유는 다름 아닌 도쿄 산토리홀이 카라얀의 컨설팅으로 지어졌단 걸 알게 됐기 때문이다. 내 마음대로 연결 짓는 놀이로 채우는 여행이 재미있는 이유다. 일기에도 끄적여 두었지만, 이 날은 베토벤의 전원교향곡이 정명훈을 통해 내 마음속에서 다시 태어난 날이다. 인터미션에 샴페인이 없었다면 결코 진정할 수 없었을 아름다운 밤이었다. 


도시에도 음악에도 찬란한 역사가 있다. 유독 마음이 가는 시대적 배경과 스토리가 있고, 인물이 있다. 음악으로 도시를 만나고, 또 음악으로 2세기에 걸친 시간 여행을 할 수 있다는 건 누려 마땅한 삶의 즐거움이다. 도시에도, 예술에도 마음을 열어젖힐수록 내게도 마음을 열어오더라. 여행 속 음악의 힘은 상상을 초월한다. 환희와 감동과 위로가 있고 낯섦과 새로움의 자극도 있다. 일상의 습관과 패턴에서 벗어나 옷도 차려입어 보고, 인터미션에 샴페인도 마시며 즐거움을 배가시켜도 보자. 연주를 다 보고 난 후 감동과 흥분을 해결할 길 없어 한없이 도시의 밤을 걸어본 경험은 내가 내 삶에 건넨 선물이다. 도시를 음악으로 만나보자. 클래식을 클래식으로 만나보자. 분명 도시가 내게 먼저 마음을 열고 다가올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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