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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Wendy An Jun 06. 2024

기꺼이 감수하는 불편함이 매력으로 화답할 때

'이네스'네 집

묵직한 목재 문을 열쇠로 힘겹게 열고 몇 발자국 옮겨 아치형 통로를 지났다. 맞은편엔 녹음이 가득한 중정이 펼쳐져 있지만 시선은 이내 벽과 계단에 사로잡혔다. 어느 쪽을 바라봐도 낡고 낡은, 바래고 바랜 흔적뿐인데 예스러운 모습이 너무 멋스러운 거 아닌가. 세월을 제대로 머금고 있는 곳을 간절히 원했고, 열렬히 찾았고, 드디어 만난 것이다. 오스트리아 빈 '아르누보 아파트먼트’. 나와 연인에겐 이곳을 부르는 애칭이 있는데 바로 ‘이네스(Ines)네 집’이다. 이네스는 아르누보 아파트먼트 두 호수의 주인이다. 새로운 예술 사조를 칭하는 ‘아르누보’ 보다는 ‘이네스네 집’이 더 입에 착착 감기더란 말이지. 강렬했던 이네스의 첫인상도 애정과 애칭에 한몫했다. 햇살을 받아 반짝이는 부스스한 금발, 허리를 꼿꼿하게 세운 위풍당당한 몸짓, 빨려 들어갈 것만 같은 깊이의 진한 눈매와 눈빛이 꽤 인상적이었다. 강한 악력이 느껴졌던 첫 악수도 잊을 수가 없다. 손 끝에서 전해진 그 힘에는 짙은 환영과 반가움이 배어있었기 때문이다. 


나선형 돌계단을 오르는데 차라리 오래된 수도원의 다락방으로 향하는 기분이었다. 1800년대 말 어느 즈음으로 들어갈 수 있는 관문 같기도. 계단 디딤판의 좁은 폭 때문에 비스듬히, 조심스럽게 내딛는 한걸음 한걸음. 곧은 직선이라면 결코 느낄 수 없었을 묘한 기운이 굽이마다 감돌았다. 역시 곡선이 뿜어내는 비밀스러운 분위기는 상상력을 자극하지. 두 개의 층을 다 오르는 일이 이토록 요원한 일인가 말이다. 녹록지 않은 계단에서 두 개의 짐가방을 나르느라 수고하는 연인의 노고는 뒤로한 채 혼자 신선놀음에 빠져 있었다니. 잠시 난간에 비기어 서서 올라온 만치 아래를 내려다본다. 며칠간 이곳을 오르내릴 우리 모습을 그려보니 그건 ‘확실한 행복’의 보장과 다름없었다. 140년이라는 인고의 시간을 견뎌낸, 여전히 아름다움을 뿜어내는 곳에서 나흘을 보낸다니 말이다. 그저 세월이 오래 흘렀을 뿐인데 오늘날에 이르러 낯선 이방인에게 호기심 어린 즐거움을 안겨주리란 건 아무도 몰랐을 테지. 


오래된 곳이 좋은 이유는 많고 많지만 그중 하나가 계단이라면, 또 다른 하나는 열쇠다. 호텔 카드키로 따릭 문을 열 때보다, 묵직한 열쇠로 오른쪽 왼쪽 미묘하게 돌려가며 드르륵 문을 여는 게 왜 이리도 낭만적인지. 스톡홀름의 100년 된 호텔 엣헴에서도, 코펜하겐의 역시 100년 된 호텔 알렉산드라에서도 체크인할 때 묵직하다 못해 무거운 열쇠를 받았을 때의 기쁨이 아직도 생생하다. 열쇠를 들고 다니던 내내 무게감이 곧 100년이라는 시간의 상징으로 느껴졌다. 호텔 열쇠는 물성 그 이상의 즐거움을 준다. 가방 속이나 주머니에 손을 넣었을 때 손 끝에 닿는 촉감에 바로 이어 찾아드는 안도감. 그뿐이랴, 어떤 열쇠가 건물 현관 전용이고 어떤 열쇠가 집 전용인지 찾을 때면 숨 한 번 고르게 되는 여유. 무엇보다도 번호키만 눌러대는 일상에서 벗어났다는 확실한 물적 증거로 인해 일상과 여행을 확실하게 구분짓는 깨알 재미까지.

집 현관문을 열 때 세밀한 노력이 필요하다는 말과 함께 이네스가 시범을 보여주었다. 우리 둘 차례로 시도했지만 역시 승자는 연인이었다. 이네스는 반드시 그가 문을 열고 잠그라는 특명을 내리면서 그에게 열쇠를 하사했다. 모두 함께 시원하게 한바탕 웃고 나서 설레는 마음 부여잡고 집 안으로 들어섰다. 검은색 문을 열고 들어갔지만 문의 안쪽과 초입 공간은 온통 하얀색 페인트칠이 돼있었다. 안과 밖의 대조가 흥미롭다는 생각을 했다. 높은 층고와 따뜻한 조명빛 그리고 타일 바닥이 이루는 풍경이 아늑했다. 오른쪽엔 아슬아슬한 사이즈의 욕실과 화장실이 있다. “140년 전 지어진 건물이라 그땐 화장실과 욕실이 없었어요. 주거 건물이 되면서 새롭게 만든 공간이랍니다.”라는 이네스의 말을 듣고 나니 사르르 이해가 되면서 아담하고 사랑스러운 공간으로 바라보게 됐다. 왼편엔 오랫동안 화장대로 쓰였을 것만 같은 짙은 밤색의 가구와 세라믹 싱크대가 나란히 놓여 있는 모습이 정겨웠다. 


세라믹 싱크대를 보자마자 연인이 내게 건넨 말 한마디는 바로 “설거지는 무조건 내가 할게.”다. 손에서 늘 무언가를 떨어뜨리는 나의 부주의함 때문에 그가 본능적으로 내뱉은 말이다. ‘내 약점이 내게 효도를 다 하는구나’ 싶어 쾌재를 부르며 기꺼이 설거지를 양보하기로 결심했다. 그러나 세라믹 싱크대만 생각하면 잊을 수 없는 일이 있다. 이네스네 집과의 첫 만남 때엔 용케도 아무 일 없이 넘어갔지만, 다음 해에 다시 찾았을 때 결국 나는 사고를 쳤다. 내 부주의함은 결코 나아진 적이 없는데 웬 자신감이었을까. 아침이고 낮이고 커피를 마실 때마다 전용잔으로 애용했던 찻잔 한쌍을 호기롭게 갈라놓았다. 말인즉슨, 설거지하던 중 컵받침을 떨어뜨려 깨트린 것. 세라믹 싱크대 속엔 자비란 없었다. 일단은 이네스를 향한 미안함을 감출 길이 없었다. 그리고 왜 늘 사고를 치는 건 연인이 아닌 나인지 한숨이 나왔다. 민망함에 머쓱히 웃기만 하는 나를 방으로 들여보낸 후 그는 깨끗이 잔재를 치워주었다. 부주의는 그대로지만 머쓱한 미소만 날로 늘어간다. 


이네스에게 부랴부랴 메시지를 보냈다. 십여분이 지났을 즈음 이네스는 단 한 문장의 답문을 보내왔다. “걱정하지 말고 행복한 여행을 하는 데에 집중하세요.” 호방하고도 즉각적인 이 용서와 격려에 힘입어 단 몇 초만에 내 영혼의 무게가 깃털처럼 가벼워졌다. 그런 데다가 이네스의 한마디는 장엄한 명령처럼 느껴졌다. 그러니까 여행자인 나는 그 본분에 충실해야겠다는 생각을 이네스가 상기시켜 준 셈이다. 마침 마지막 밤을 앞둔 날이었고, 덕분에 온몸과 마음을 다해 빈을 누비고 만끽했다. 마지막 저녁 식사를 앞두고 집에 잠시 돌아가 쉬기 위해 정류장에서 트램을 기다리던 중 건너편에 있는 꽃집이 눈에 들어왔다. 냉큼 달려가 어여쁜 꽃다발을 한 아름 사고 집으로 돌아가 테이블 위 화병에 꽂아 두었다. 다음날 체크아웃 시간에 만나기로 한 약속이 있었기 때문에 싱그럽게 보관해 두었다가 이네스에게 꼭 건네고 싶었다. 마침 이네스는 위층에 머무르고 있었다. 잘츠부르크 태생이지만 오랜 세월 빈에서 살았고, 이제 다시 삶의 본거지를 잘츠부르크로 옮겼다고 한다. 빈과 잘츠부르크를 오며 가며 영위하는 삶은 어떤 삶일까, 더 구체적으로 상상하고 싶어졌다. 경험해 볼 수밖에. 길지 않은 인생, 너무 늦지 않게 잘츠부르크를 조우하길 다짐해본다.


다시 첫 만남의 순간으로 돌아가볼까. 역시 오래된 흔적이 역력한 짙은 밤색의 가구가 방 입구 편에 놓여있다. 생김새가 딱 조리대의 모습인데 아니나 다를까 상판이 대리석으로 덮여 있었다. 열심히 빵도 썰고, 납작 복숭아도 썰고, 우유와 버터와 커피를 올리고 내리며 가장 긴밀하게 관계를 맺은 가구였다. 궁극의 적당한 사이즈의 냉장고 위엔 캡슐 커피머신과 토스터가, 냉장고와 키가 같은 가스 오븐 위엔 귀여운 찻주전자가 올려있는 모습이 다정했다. 아침엔 커피머신과 토스터를, 오후엔 주전자를, 저녁엔 가스오븐을 어찌나 유용하게 사용했는지 마치 이네스가 디자인해 둔 동선대로, 계획대로 이곳을 누리고 있는 건 아닐까 싶었다. 안 필요한 건 없고, 필요한 건 시선의 끝에 늘 있었다. 마치 긴 여행을 마치고 빈으로 돌아와 엉망인 내 집으로 돌아가기 전 언니네 집에서 며칠 거하며 심신의 안정을 회복하는 기분이었다. 우리끼리만 있는데 보살핌을 받는 기분. 이네스는 여행자인 우리 마음을 정확하게 읽고, 다정하게 어루만져주는 존재였다. 


드디어 내 마음을 사로잡았던 문제의 그 사진 한 장 속으로 들어갈 차례다. 시선이 빼꼼 빛을 따라 안쪽으로 향한다. 타일 바닥이 끝나고 나무 바닥이 시작됐다. 몇 발자국 안쪽으로 더 떼고 나니 발과 나무 바닥이 만나 삐거덕 소리가 난다. 공간은 나를 반기고 나는 흥분을 하였으니 이 소리 어찌 어여쁘지 아니할까. 갈색의 사전적 정의를 찾아보니 검은빛을 띤 주홍색이라고 하는데 가히 갈색의 향연이 펼쳐지는 사진 속 그 공간이었다. 빛을 받은 색은 차라리 검기보단 붉은빛이 감돌며 온기를 안겨주더라. 아, 어디부터 바라보아야 할까. 무엇에 더 마음을 빼앗기고 싶은가. 내 마음 이토록 흔들리며 갈피를 못 잡아도 되는 걸까. 창문의 가장자리 구석진 곳에 모여 있는 화분 하나하나가 꽤 사랑스럽다. 이네스는 미소 띤 얼굴로 열심히 키우고 있는 중이라며 뿌듯해했다. 햇살의 자양분은 한 톨도 양보할 수 없다는 듯 아름드리 모여있는 모습에서 생기와 사랑스러움이 잔뜩 묻어났다. 갈색의 캔버스 위 가장자리에 무심히 그려진, 그런데 존재감이 범상찮은 녹색창연함처럼. 


벽 한 면이 다 창문이라는 것도, 그벽 중앙에 책상이 있고, 책상 위엔 오스트리아와 빈 지도와 작은 녹색 등이 올려져 있단 것도 다 좋았다. 흰 레이스 커튼이 살랑거리는 창문 바로 곁으로 작은 식탁이 있다는 것도, 침대 곁 햇살이 가장 잘 들어오는 자리에 흔들의자가 있다는 것도, 그 옆엔 키가 큰 책장과 스탠드조명이 있단 것도 숨 넘어가게 좋았다. 하루, 이틀, 사흘 머물며 만들어지는 우리의 동선과 일렁이는 마음으로 공간을 채우고 있는 모든 것들의 존재의 이유를 알 수 있었다. 방 안의 왼편엔 크나큰 그릇장이 있다. 볼 때마다 탐나는 마음 감출 길 없던 그릇장의 수납공간은 각종 그릇과 잔과 커트러리와 조리도구가 구비돼 있었다. 그릇장의 중앙부 열린 공간엔 오디오와 각종 시디가 채워져 있다. 이른바 이네스 큐레이션. 아침엔 빈에서의 아침이라는 이유로 커피와 함께, 밤엔 빈에서의 밤이라는 이유로 와인과 함께 음악이 필요했다. 이네스의 탁월한 컬렉션 덕분에 때에 따라, 기분에 따라, 언제든 음악이 있었다. 음악은 결국 우리를 춤추게 했고.


호텔에서 머무를 때면 주로 일찌감치 거리로 나서 커피와 빵을 즐기던 우리다. 그런데 이네스네 집에선 집에서 먹는 아침, 집에서 먹는 저녁이 너무 즐거운 나머지 늦게 나가고 일찍 들어왔다. 웃어야 할지 울어야 할지 모르겠지만 그곳에서만 느낄 수 있는 그 특유의 행복감이야말로 빈을 제대로 여행하는 거라는 생각이었다. 한 공간이 한 도시를 아우를만치 우리에게 건네주는 게 있다면 그것으로도 충분히 충만한 여행이 아닐지. 그러고 보면 여행은 취향의 발로이기도하지만 내면의 속삭임에 귀 기울이는 것일 터. 순간순간의 크고 작은 선택과 결정에 있어 더 과감히 원하는 것에 집중하는 용기 말이다. 빈의 곳곳은 우리를 기다리고 있는 듯했지만 더 강한 끌림에 저항할 수 없었다. 마치 집에 보물이라도 숨겨둔 사람처럼 출근하기가 무섭게 퇴근하는 기분이었다랄까. 과연 그곳에 감도는, 그 공간을 가득 채우고 있는 건 무얼까. 공기에 서려 있는, 공간의 분위기를 장악하는 에너지였을까. 오래된 것들이 한데 모여 뿜어내는 시간의 향기였을까. 그립고 그립다. 


이네스네 집과 헤어진 후 상사병이 제대로 발병했다. 빈이 그리운 건지, 집이 그리운 건지. 빈을 그리워할수록, 집을 추억할수록 그게 그거 아닌가 싶었지만. 그 묘한 사귐을 못 잊어서, 특별한 사이가 되고 싶은 나머지 시름시름 앓다가 결국 1년여 만에 다시 찾았다. 이네스와 재회한 날을 잊을 수 없다. 그 비밀스러운 나선형 계단을 우아하게 걸어 내려오며 내게는 두 팔 벌려 포옹을, 연인에게는 예의 그 힘 있는 악수를 건네주었다. 그 온기와 미소를 잊을 수 없다. 다시 만난 이네스네 집은 기대했던 대로 ‘그대로’였고, 만나자마자 어디서도 맛볼 수 없는 아늑함과 뜨거운 감정이 피어올랐다. 생각해 보면 작고 좁은 욕실, 바래고 해어진 건물 외관, 포근함을 기대하긴 어려운 침대, 흥미로운 것도 맛있는 곳도 딱히 없는 주변 동네까지 불편한 거 투성인 곳이다. 그런데 그 불편함이란 게 단 하나도 예외 없이 모두 기꺼이 감당할 수 있는, 감당하고 싶은 것이었다. 불편함을 금세 잊게 하는 공간의 매력에 기쁜 마음으로 굴복한 것이다. 


아침저녁으로 공간의 매무새와 갖춤새가 사뭇 다른 느낌이 들어 익숙함과 새로움 사이를 오가며 지루할 틈이 없었다. 다시 만났어도 공간을 구석구석 빠짐없이 경험하고픈 욕망이 날마다 새롭게 피어났다. 바깥세상을 여행하느라 공간과 충분한 교제를 나누지 못하면 어쩌나 하는 이상야릇한 염려는 또 어떤가. 반대의 염려를 해야 하는 건 아닌지. 가만히 집을 바라보고 있노라면 공간의 나이를 향해 경외심도 들더라. 공간과 사귀어 가는 여정, 그 여정 속에서 피어나는 즐거움이 곧 여행이었다. 이네스네 집과 우리, 너무도 상관있는 사이가 된 거 아닌가 말이다. 그리움에 취해 생각해 보면 이네스네 집은 내 마음의 옆구리를 쿡쿡 찌르며 연신 말을 걸어왔던 것 같다. 그 다정다감했던 손길에, 그 섬세했던 물음에 또다시 응답하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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