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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Wendy An Mar 14. 2024

설렘 폭발 지점은 여행을 '준비'하는 3개월 전

여행을 준비하는 여정은 또 하나의 여행이다

여행을 준비하는 여정은 그 자체로 또 하나의 여행이다. 온갖 브레인스토밍과 검색, 상념과 상상으로 나를 위한 여행을 기획하는 몇 달간의 사적인 프로젝트다. 이 특별한 여정 동안에는 여행 중에 혹은 여행 후 느끼는 감정과는 결이 다른 감정을 독점한다. 그건 바로 순도 높은 설렘과 기대감. 설렘은 여행을 향한 순수한 열정이고 희열이다. 기대감은 보고, 느끼고, 맛보며 감탄해 마지않을 것들에 대해 미리 설정해 두는 마인드셋이라고나 할까. 나 자신을 기쁘게 만들 수 있을 거라는 믿음에서 비롯된다. 이 믿음은 ‘기대에 못 미쳐도 괜찮아. 여행을 떠나는 것만으로 충분해’라는 초연한 마음을 동반한다. 뜻밖의 생각을 반기고, 익숙하지 않은 감정을 당당히 마주할 수 있길, 새로운 환경이 어떤 식으로든 나를 자극하길 기대한다. 가보지 않은 길로 한걸음 더 내디뎌 보길 기대한다. 지금의 나는 잠시 잊고, 내가 나에게 바라던 최상의 모습을 끌어내볼 기회를 얻길 기대한다. 해보지 않은 것을 시도하도록 스스로를 자극하는 용기를 기대한다.


항공권 구매를 마치고 나면 몇 가지 사적인 직책을 스스로 부여한다. 여행 디자이너, 여행 기획자, 인터뷰어 그리고 마인드 리더(내 마음을 낱낱이 읽어야 한다). 맹렬한 자문자답을 시작으로 내 욕망과 호기심이 어디로 향하는지 면밀히 관찰한다. 오로지 나에게만 집중하고 질문하는 시간은 고밀도의 정신 활동이다. 이 귀한 시간과 활동은 나에 대한 새로운 ‘발견’과 뜻밖의 ‘놀라움’을 가져다준다. 늘 고정된 프레임으로 세상을 바라보던 익숙함에서 기꺼이 벗어나겠다고 작정한다. 마음의 짐, 편견과 선입견을 내려놓고 세상을 보는 관점을 업그레이드하겠다는 각오도 다진다. 여행의 틈새마다 ‘나는 어떤 사람이며, 무엇을 욕망하고, 어떻게 살고자 하는지’에 대해 탐색하는 것을 소홀히 하지 않겠다는 다짐을 한다. 언제 곤 생각도 마음도 바꿀 수 있다는 유연함을 전제로 마음껏 나만의 여행을 디자인한다.


여행을 디자인하는 몇 개월의 시간은 그 시간만이 갖는 절대적 매력이 있다. 완성된 퍼즐을 얼크러뜨려 버린 후 첫 퍼즐 조각을 집어든 순간의 짜릿함. 퍼즐 조각을 여기저기에 갖다 대보며 제자리를 찾는 동안 시간과 예산 그리고 욕망의 외줄을 타는 스릴을 맛볼 수 있다. 얽히고설킨 생각과 호기심과 상상이 점점 유의미한 정보가 되어가는 만족감은 물론이다. 여행을 향한 깊고 열띤 질문은 결국 ‘나’를 향한다는 걸 깨닫는 기쁨도 뺄 수 없다. 나만의 여행을 하기 위해서는 나를 알아야 하는데, 나를 더 알려는 노력과 열정은 어느새 관심과 애정이 된다. 나의 내면으로 귀를 기울일수록 ‘진짜’가 모습을 드러내기 시작한다. 퍼즐 조각들이 한 데 모여 점점 만들어가는 그림은 의미와 가치를 갖기 시작한다. 여행에 가까워질수록, 퍼즐이 완성될수록 마지막 한 조각만 남겨둔 채 완성의 희열을 미리 보기 하는 게 하이라이트다.


첫 퍼즐 조각은 ‘호텔'이다. 짜릿함을 독차지하는 작업은 바로 호텔 탐색이다. 내 여행엔 키워드가 여럿 존재 하지만 단 하나의 핵심 키워드를 묻는다면 ‘호텔’이다. 호텔은 분명 어딘가 도시와 닮은 구석이 있다. 의도적으로든 은밀하게든 도시를 상징한다. 호텔이 위치한 동네 특유의 공기를 머금은 채 세월의 옷을 입는다. 여행자들의 자유로운 영혼과 호기심이 로컬 사람들의 개성 및 편안함과 만나 묘한 분위기를 자아낸다. 지역사회에 열려 있는 호텔일수록 활기와 생동감이 넘쳐흐른다. 커뮤니티를 사랑해 마지않는 호텔을 만나면 동네와 호텔에 머무르는 것만으로도 풍성한 여행이 된다. 동네와 친하게 지내는 호텔일수록 여행자도 도시와 더 빠르게 친해지는 것만 같다. 그 동네에만, 그 도시에만 있는 호텔일 때 이 모든 탐험과 즐거움은 배가 되면서 차원이 달라진다. ‘그 순간, 그곳에서만 느낄 수 있는 것’을 만난다는 생각만으로도 설렘이 폭발한다.

Paris - Le General Hotel

100년의 나이테를 지닌 호텔, 비밀 정원이 있는 호텔, 누군가의 저택으로 시간 여행을 떠난 듯한 호텔, 미감이 남다른 호텔, 신나게 일하는 사람들로 가득한 호텔, 자연과 가까운 호텔, 두 도시의 매력이 절묘하게 섞인 호텔, 도시 속 또 다른 여행지의 모습을 띤 호텔, 놀라운 디테일로 감동을 건네준 호텔, 그리고 완벽한 동선과 아름다운 인테리어 디자인에 현기증이 나는 호텔까지. 아, 끊임없이 이야기할 수 있을 것만 같다. 호텔 이야기는 언제나 세로토닌이 솟구친다. 호텔과의 만남을 차곡차곡 쌓아오면서 내 취향과 결이 닿아 있는 호텔을 찾는 기준과 노하우도 쌓아왔다. 먼저, 어떤 이유로든 호텔 밖으로 단 한 걸음도 나가기 싫을 수도 있다는 것을 기본 전제로 한다. 그렇다면 호텔에서 하루 종일 머무는 동안 하는 모든 것도 여행이라는 정의가 성립된다. 중요한 전제와 정의 및 기준이 있으니 내 속마음과 욕망을 정확히 읽어낼 확률도 높아진다.

Copenhagen - Hotel Alexandra

첫 탐색 과정에서는 가용 예산을 배제한다. 처음부터 예산을 염두에 두면 언젠가를 위한 ‘호텔 버킷 리스트’를 만들 수가 없기 때문이다. 다음으로는 여행을 가는 나라, 도시 또는 도시 속 특정 동네에만 있는 호텔로 범위를 좁혀 검색한다. 이와 더불어 틈 날 때마다 구글맵을 펼쳐두고 관심이 가는 동네마다 호텔을 찾아본다. 검색과 발견을 반복하다 보면 ‘오래된 혹은 새로 생긴, 부티크 호텔, 그 도시에만 있는, 개성과 색이 분명한, 특유의 분위기를 지닌, 레스토랑 혹은 바(bar)가 지역사회에 활짝 열려있는, 라운지나 라이브러리를 갖춘, 저녁을 먹고 들어가 한 잔 더 할 수 있는’ 등의 키워드로 취향과 기대를 정리한다. 꼭 가고 싶은 미술관이나 음악당, 레스토랑 등의 목록과 동선도 호텔을 찾고 선택하는 여정 동안 자연스럽게 만들어진다. 검색의 시작은 꼭 구글에서 영어로 하는 편이다. 아무래도 여전히 전 세계 호텔 시장의 변화와 여러 조건 기반 호텔 랭킹 및 리스트는 해외 매체가 활발히 다루고 있기 때문이다. 호텔 공식 홈페이지의 구석구석을 찾아 들어가 정보와 이야기를 정독한다. 역사와 철학을 다룬 이야기, 창립자의 생각과 기대를 엿볼 수 있는 인터뷰나 전문 매체의 분석 등 모든 게 흥미진진하다. 좋은 정보와 이야기는 숨어 있는 경우가 있으니 발견의 기쁨도 결정에 한몫할 수 있다.


이 모든 작업의 말미에 가장 현실적인 조건 ‘예산’이 등장한다. 호텔 리스트는 버킷 리스트와 현실 리스트로 나눈 후 더 뾰족한 집중과 협상의 시간이 시작된다. ‘언제 죽을지 모를 하루살이 인생인데 예산에 매몰되지 말자’는 생각과 ‘이 시대 최고의 리얼리스트가 되자’라는 생각이 한동안 열렬히 충돌한다. 아름다운 충돌이자 흥미로운 작업이라 해두자. 쉽잖은 이 방정식을 열정적으로 풀다 보면 놀랍게도 늘 ‘나만의 호텔’을 찾는다. 아니, 선택을 하고 그 선택을 믿기로 마음먹는 것일 수도 있겠다. 세상에 호텔은 차고 넘치게 많다. 그중에서 내가 원하는 곳, 영감을 자극하고 공감을 불러일으키는 곳, 더 머물며 교감하고 싶은 그곳을 발견하는 건 나에게 몰두하고 집중하지 않으면 얻을 수 없는 결괏값이다. 지금까지 간직해 온 잊지 못할 감동과 추억을 돌아보니 승리의 방정식 아니었나 싶다.


두 번째 퍼즐 조각은 ‘책’이다. 제일 먼저는 죽은 사람들의 이야기를 찾아본다. 그 도시에서 여생을 보낸 예술가나 문인의 책이나 그들의 예술과 삶을 맛깔나게 다룬 책은 내 여행에 새로운 정보와 관점을 제공한다. 시대가 다르지만 여전히 변하지 않은 것은 무엇인지 생각해 볼 수 있고, 시대의 흐름에 따라 사라졌거나 변화한 것을 알아보는 예리한 눈을 키워볼 수도 있다. 누군가가 오랜 세월 예찬한 도시를 향한 애가를 만난다면 진정 유레카 모먼트다. 이야기를 그러모아 내 여행 테마 혹은 콘셉트를 정하는 데 힌트가 되기도 한다. 내 여행 최고의 유레카 모먼트는 헤밍웨이였다. 어릴 적부터 그의 문학에 푹 빠져 살았지만 그의 에세이는 미처 읽어본 적이 없었다. 파리와의 재회를 앞두고 그의 특파원 시절 파리 체류기가 담긴 책 <파리는 언제나 축제>를 파리 여행의 주춧돌이자 테마로 삼았다. 번역서를 읽는 게 물론 더 빠르고 편하고 즐거웠을 테지만 편리함을 뒤로하고 낭만을 택했다.


파리 부셰리가 37번지에 있는 서점 ‘셰익스피어 앤 컴퍼니’에서 헤밍웨이의 책 <A Moveable Feast>를 샀다. 한참을 서점에 머무르며 책 읽기를 시작했다. 날마다 이 책을 들고 다니며 헤밍웨이의 발자취를 따라다니는 여행을 만끽했다. 마치 나도 예술가가 된 듯한 기분에 흠뻑 취한 채로. 파리의 예술과 문화가 부흥 절정기에 이르렀던 1920년대를 거니는 듯한 기묘한 기분은 보너스로 누리면서 말이다. 어느 날 밤 카페 레 두 마고(Les Deux Magots) 노천에 앉아 핫초콜릿을 마시며 책 속으로 빠져들었던 순간을 잊을 수 없다. 내 발걸음으로 파리를 누비는 여행도 행복했지만 헤밍웨이도 바라봤을 생제르맹데프레 수도원을 바라보며 그의 책 속으로 떠나는 여행이야말로 ‘진짜 여행’이라는 생각마저 들었다. 어느새 책과 나는 한 몸이 되었고 어딜 가서 무엇을 먹고 마시든 책과 함께 했다. 손엔 책이 들려 있었지만, 마음엔 헤밍웨이와 그의 친구들이 함께 했다.


메르시 카페에서 나 홀로 브런치를 즐기며 책을 읽고 있던 중 옆 테이블 중년 부부가 책을 가리키며 계속 말을 걸어왔다. 여행 전 (겨우 6주) 불어 과외를 받은 게 무색하게 헤밍웨이의 이름 외엔 아무것도 알아듣지 못해 그저 미소만 건넸던 웃지 못할 추억이다. 그런데 왠지 모르게 책에 대해, 헤밍웨이에 대해 할 말이 너무도 많아 속사포를 뱉어냈던 그 부부의 말이 격려가 됐다. 내용은 알 수 없었지만 그들의 제스처와 절제된 미소, 열띤 연설이 마치 헤밍웨이와 함께하는 내 여행을 향한 응원 같았기 때문이다. 꿈보다 해몽이다. 이후로도 나 홀로 여행자의 손에 들린 이 책은 활약이 제법이었다. 파리지엔들의 눈인사와 말인사가 빗발쳤던 것이다. ‘단 한 번이라도 그 의미를 이해할 수 있었다면 얼마나 행복했을까’라는 생각과 ‘어떤 의미일지 상상해 보는 게 더 흥미롭다’는 생각이 오고 갔다.


출판사 아르테의 ‘클래식 클라우드 시리즈’ 책들이야말로 여행의 든든한 지원군이자 친구이고 훌륭한 동반자가 돼주었다. 인문 기행 시리즈로 100인의 작가가 거장들의 흔적을 따라 여행한 이야기가 거장의 삶과 함께 담겨 있다. 오스트리아 빈 여행을 앞두고는 <클림트: 빈에서 만난 황금빛 키스의 화가>를 읽고 빈을 거닐며 클림트의 자취와 작품들을 따라다녔다. 그의 영혼과 호흡하는 느낌이었다. 팬데믹 직후 빈과의 재회를 앞둔 시점엔 <모차르트: 천재 작곡가의 뮤직 로드, 잘츠부르크에서 빈까지>를 읽고 빈을 음악으로 먼저 만났다. 생애 최초 빈 필하모닉과 만나 충전한 감동과 환희는 모차르트의 삶과 음악에서 받은 영감 덕분이었다. 세 번째 파리와의 만남을 앞두곤 <모네: 빛과 책으로 완성한 회화의 혁명>을 읽고 다시 만날 모네의 작품들을 어떻게 바라보고 해석할지 고대했다. 암스테르담과의 재회를 앞두고 만난 <고흐: 오베르쉬르우아즈 들판에서 만난 지상의 유배자>는 다시 만난 고흐의 후기 작품들 앞에 내 두 발을 오랫동안 묶어 둔 채 그의 지난한 삶을 작품에 투사해 볼 수 있게 해 주었다. 최근엔 <베토벤: 절망의 심연에서 불러낸 환희의 선율>을 읽었다. 도쿄 필하모닉 베토벤 전원 교향곡 연주를 마에스트로 정명훈의 지휘로 만나기 위해서였다. 카라얀의 컨설팅으로 지어졌다는 아시아 최고의 연주홀 산토리홀에서 죽은 거장 베토벤의 음악을 살아있는 레전드 정명훈을 통해 만난 건 황홀한 선택이었다. 여행 준비 자체가 또 하나의 여행이라는 말은 정말이다!


마지막 퍼즐은 ‘언어’다. 우리는 살면서 한두 번쯤은 이렇게 읊조린다. ‘불어 배워둘걸 그랬어’, ‘외국어 하나 공부했으면 원어민 됐을 세월이 지났네’. 나도 예외가 아니었다. 그런데 여행을 다니며 입으로만 외쳐대던 습관에서 벗어나 행동으로 옮기기 시작했다. 여행이 절호의 기회다. 회한을 멈추고 새로운 도전으로 향하기에 여행만큼 좋은 핑계도 없다. 여행에서 써먹기 위해 배우는 건 심적인 부담감도 적다. 그저 하나 더 알아듣고 하나 더 읽을 수만 있어도 행복한 뿌듯함이 밀려든다. 기대도 실망도 없는 즐거운 취미가 되기도 한다. 베를린 여행에서 독일어에 대한 편견을 걷어낼 수 있었다. 특히 여성들의 독일어 억양과 발음이 너무나 매력적으로 들렸다. 다음 여행지를 빈으로 정하고 나서 바로 독일어 과외를 받기 시작했다. 흉내 내고 싶었고, 알아듣고 싶었고, 아침 인사든 감사 인사든 현지어로 건네는 성의를 보이고도 싶었다. 아는 만큼 보이고 들린다는 걸 몸소 체험하고 싶었다.


베를린의 어느 레스토랑에서 무심코 건넨 ‘당커(danke)’ 한마디가 시작이었다. 자리를 안내해 주고 메뉴판을 가지러 가던 매니저가 발길을 멈추고 돌아와 내게 물었다. “독일인이세요?(German?)” 믿기지 않겠지만 실화다. 믿어주시라. 온라인으로 몇 개월 독일어 공부를 하고 떠났던 여행이었다. 아는 독일어는 총동원해서 써먹고 있던 참이라 호기롭기 그지없었다. 머쓱함을 무릅쓰고 ‘배우는 중’이라 답했다. 매니저는 “계속하세요. 포기하지 말고 계속 배우세요.”라며 나를 격려하고는 메뉴판을 건네고 홀연히 사라졌다. 이 경험이 계기가 됐고 과외를 받으며 문장 단위로 말을 할 수 있게 됐다. 첫 빈 여행에서 카페 첸트랄 입장을 앞두고 대기하고 있던 어느 따스한 오후. 할 줄 아는 말이 좀 생겼다 싶으니 입이 간지러웠고 곁에 있던 매니저에게 뜬금없이 안부를 물었다. 서울에선 절대 하지 않는 행동이다. 그가 예상보다 긴 화답을 건네준 바람에 적잖이 당황했지만 몇 마디 알아들을 수 있어 그저 즐거웠다. 주거니 받거니 짧은 대화를 하다 보니 자리로 안내받을 차례가 되었다. 돌아서려는 내게 그는 독일어를 배우고 있냐 물었다. 배우고 있다고 답하니 ‘훌륭한 선생을 두었군요’라며 격려를 건넸다. 여행을 마치자마자 과외 선생님께 이 사실을 고하고 함께 행복감을 나눴다.

Restaurant 'Lutter & Wegner' gegr.1811

두 번째 빈 여행에서는 호텔 체크인에서 독일어를 시도했다. 여전히 잊을 수 없는 다정한 사람 ‘제이콥’은 순식간에 내 마음을 읽어내더니 뚜렷한 발음으로 천천히 내 연습에 응해주었다. 그 순간 제이콥과 절친이 된 것 같은 과한 마음이 샘솟았다. 그는 4일 내내 호텔에서 마주칠 때마다 독일어를 알려주었다. 그 이후로 나는 제이콥을 은인으로 추억한다. 파리의 르 제네랄 호텔에서는 체크아웃을 할 때 불어를 시도했다. 역시 잊을 수 없는 사람 ‘네스타’는 다정하게도 단어 하나하나 알려주며 격려를 건넸다. 여행을 앞두고 제일 잘한 일이 있다면 언어를 향해 가졌던 호기심과 호기심에 그치지 않고 배움을 시도한 것이다. 이 내밀한 기쁨을 달리 표현할 길이 없지만 살면서 꼭 겪어볼 만한 일이다. 여행에는 어쩌면 ‘격’이 있고 ‘퀄리티’가 존재할 텐데, ‘언어의 활약’으로 격과 질을 높일 수 있을 거라 장담한다. 운명의 언어를 만나기도 한다. 한 천재 선생에게 긴 간격으로 불어와 독어 과외를 받아본 적이 있다. 맞다, 놀랍게도 한 사람이다. 그는 내게 불어는 잘 안 어울리고 못하는데, 독어는 잘 맞고 제법 잘 따라온다는 피드백을 건네주었다. 없는 말 못 하는 선생이라 길이길이 감사한 마음을 갖고 있다.


여행은 단 한 번으로 끝나지 않는다. 여행을 준비하는 시간 동안엔 호텔 탐색과 독서와 언어 공부로 일상을 이미 벗어나 새로운 여행을 하는 셈이다. 여행에서 돌아오면 일과 삶의 순간마다 불쑥불쑥 추억이 떠오른다. 그 추억은 이후 새로운 여행 준비와 얽히고설켜 여행을 새롭게 해석하고 전과는 다른 관점으로 다음 여행을 디자인한다. 여행이 계속되는 것이다. 매번 달라도 좋다. 나만의 여행에 중요한 ‘키워드’를 찾아보시라. 내 취향과 욕망이 깃든 키워드를 발견하는 순간을 만날 수 있다. 한 권의 책은 인생을 바꾸기도 한다는데 여행이야말로 인생을 바꿀 수 있는 경험이다. 책으로 도시를 혹은 도시와 역사를 함께한 인물을 미리 만나보자. 스토리로 만난 도시가 내게 건네줄 감동과 즐거움엔 한계가 없다. 그 위에 내 이야기가 쌓이면 여행을 ‘나만의 여행’으로, 도시를 ‘나만의 도시’로 만들 수 있다. 언어의 마법을 꼭 경험해 보자. 도시의 레이어를 하나씩 걷어내는 여행을 할 수 있다. 단 한 마디를 알아듣는 희열, 한 마디로 주고받는 따뜻한 마음, 한 마디가 안겨주는 기대 이상의 희열을 놓치지 마시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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