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접받고 싶은 대로 대접하라
Bitte Pssst! 사랑하는 도시 빈을 거닐 때마다 자주 발견하는 문구다. 한글로 표기하면 ‘비테, 프스스트!’가 되지만, 원어로 읽을 때는 세 개의 ’s’를 하나처럼 길게 발음하는데 그러다 보면 쇳소리가 난다. 쇳소리가 나는 동시에 끝을 흐려주어야 발음하는 맛이 제대로다. 그런 다음 ’t’(트)를 살짝만 툭 무심하게 뱉어내면서 마무리하면 읽는 재미가 아주 쏠쏠하다. 발음의 포인트를 살려 표기해 본다면 ‘비터, 프슷트’ 느낌이랄까. 귀엽고 사랑스러운 구석이 있는 이 발음에 중독된 나머지 여행하는 내내 입에 붙어버렸다. 우리말로 옮겨보면 “쉿! 조용히 해주세요!”가 될 텐데, 조용히 해달라는 말이 이렇게 재밌고 매력적이면 어쩌란 말인가. 너무 조용히 하고 싶어 진단 말이다. 자주 보며 따라 말하다 보니 호기심이 일었다. 과연 지역 사회에 자연스럽게 자리 잡은 비에니즈(Vienese)들의 암묵적인 동의에 의한 문화인지 아니면 법으로 규제되고 있는 것인지.
찾아보니 오스트리아에는 지역 규정과 소음 조례가 있다고 한다. 빈과 잘츠부르크는 특별히 더 엄격한 규제를 가지고 있고, 특정 시간에 큰 소리로 말하거나, 노래를 부르거나, 음악을 연주하는 것을 금지한다고 한다. 지역 주민들과 다른 사업체를 방해하지 않기 위해 개별적으로, 그리고 자체적으로 소음에 관한 정책을 가지고 있을 수 있다고도 한다. 노천이 워낙 많은 곳인데 밤거리를 거닐다 보면 늘 한적하고 조용한 건 과연 무엇 덕분인지 꽤 궁금했었다. 결국, 질서와 배려를 위한 상호 간 협조와 규제의 컬래버레이션이었군. 기꺼이 지키고 배려하려는 마음과 명확하게 정립돼 있는 규정에 세월이 입혀지면 ‘문화’가 되는 게 아닐까. 누가 먼저랄 것 없이 상대방을 혹은 주변 환경을 먼저 생각하는 태도는 순식간에 전염된다. 지키기 싫지만 지키는 게 아닌, 기꺼운 마음으로 지키는 모습이 차곡차곡 쌓여 개인과 개인 사이, 개인과 지역사회 사이, 지역사회와 도시 사이에 자연스럽고 건강한 약속으로 자리 잡는 것. 약속과 질서의 힘은 오랜 시간 보존된 문화유산과 다름없는 가치를 지닌다.
할머님과 할아버님들께서 근육질 팔을 뽐내며 케이크도 만들고, 서빙도 하는 카페겸 레스토랑 ‘볼펜지온(Vollpension)’의 노천석엔 이렇게 쓰여 있다. “Die Oma is ned derrisch!: BITTE PSST - lautes Sprechen, Singen und Musizieren ist untersagt..” 번역해 보면 이러하다. “할머니는 귀가 좋지 않아요!: 제발 쉿 - 큰 소리로 말하거나 노래하거나 악기를 연주하는 것은 금지되어 있습니다.” 익살스럽고도 다정한 요청이다. 할머님을 위해 기꺼이, 즐거이 조용한 대화를 나눈다. 할머니 말 잘 듣는 기쁨 그 자체를 놓칠 수 없지. 빈의 노천은 낮에 가도, 밤에 가도 평온하고 잔잔하다. 도심 한가운데 있지만 물리적, 심리적 거리감이 느껴지니 쉬는 기분이 물씬 든다. 홀로 책이나 신문을 읽는 사람들, 반려견과 함께 잠시 쉼을 가지는 사람들, 친구들과 조곤조곤 대화를 나누는 사람들 속에 살포시 함께 있는 게 좋다. 여행자에겐 선물과도 같다. 특별한 교감 없어도 그림의 따뜻한 장면 속 한 자리를 차지하고 있는 듯한 포근함을 느낀달까.
잠시 머물다 떠나는 여행자에게는 그 ‘잠시’가 너무도 소중하다. 그 순간 온갖 긍정적인 감정들과 신선한 생각들이 마음을 스쳐 지나간다. 내 안의 어디엔가 새겨졌기를 바라는 건 욕심이었지만 뇌리에 스친 그 감정과 생각의 주인이 나라는 사실이 그저 좋았다. 낯설지만 간절히 원했던 곳에서 존재하고 있다는 사실만으로도 행복했고 말이다. 많은 사람들과 공간을 공유하지만 혼자 있는 것만 같은 그 찰나의 몰입과 충만함이 어쩌면 여행의 전부일지도 모르겠다. 그 순간을 갖기 위해, 느끼기 위해 나에게 집중하며 세상을 탐닉하는 여정이 여행이니까. 그 어떤 것도 방해하지 않고, 그 어떤 것으로부터도 방해받지 않는 순간의 희열은 꼭 한 번 만끽해 볼 만하다. 금세 사그라지지만 그 희열의 순간 찾아드는 ‘편안함’은 여행을 위해 힘쓴 모든 것에 대한 보상이 된다. 가지려고 할 땐 저만치 달아나고, 욕심을 부릴 땐 자취를 감추는 게 바로 여행 속 편안함 아닌가. 긴장감도, 욕심도 다 버린 순도 100%의 편안함을 느낄 때 ‘나, 이곳에 스며들었구나’라며 나도 모르게 읊조리는 거다.
내가 도시와 사람을 향해 마음 문을 여는 만큼 도시와 사람이 달라 보인다. 여행자요 이방인인 내가 먼저 마음의 문을 연다는 건 뭘까 늘 생각했다. 수년간 많은 생각이 들어오고 나가며 다듬어졌고, 한 꾸러미 핵심으로 귀결됐다. 그건 바로 ‘기다리기, 이방인이라는 것을 늘 ‘인식’하기, 거부당하는 침입자가 아닌 환영받는 손님 되기’다. 기다린다는 건 곧 잠잠히 관찰하는 것과 같다. 동네를, 사람들의 생활과 도시의 문화와 특징을 보고 또 보고, 듣고 또 들으며 알아가 보는 것. 무엇이 다른지 찾아낸다기보다 여행자로서 무엇을 알면 좋을지 발견해 보는 거다. 이방인이라는 걸 늘 ‘인식’한다는 건 누군가의 아늑한 생활권에 갑자기 들어가는 존재라는 것을 인지하고 할 수 있는 한 조심하자는 것이다. 다시 말해, 로컬의 최우선은 로컬 사람들이지 여행자일 수 없다는 것을 잊지 않는 것이다.
침입자가 아닌 환영받는 ‘손님’이 된다는 건 기다리는 것과 이방인임을 철저하게 인식하는 것의 결과다. 누군가의 도움 없이는 하루하루가 매끄럽게 흘러갈 수 없다는 걸 깨닫고 감사하는 것이다. 할 수 있다면 도움을 기꺼이 청하고 또 받고, 그럴 때마다 진심 어린 고마움을 적극적으로 전하는 것. 호텔 직원 분들, 공유 차량과 택시 기사님들, 카페와 레스토랑 서버분들의 서비스와 다정함을 당연하게 여기지 않는 것. 당분간은 내 몸과 정신에 배어 있는 익숙함을 뒤로하고 새로운 것들을 능히 받아들일 수 있도록 마음을 준비시키는 것. 원하는 속도, 기대하는 퀄리티가 아닌 경우에도 섣불리 차별로 단정 짓지 않고 중립의 자세로 지켜보고 기다리는 것. 건네오는 인사에 할 수 있는 한 화답하는 것. 그리고 여행자인 나의 시간만큼 여행지의 주인들인 로컬 사람들의 시간도 중요하다는 걸 잊지 않으려 노력하는 것. 마음만 먹어도, 하나씩 시도만 해봐도 어디에서든 환영받는 ‘손님’으로서 여행할 수 있지 않겠나.
‘여행을 준비하는 여정은 또 하나의 여행’이기에 여행을 앞둔 어느 시점부터는 탐구심이 폭발한다. 이런저런 정보와 함께 몇 년 전부터 꼭 찾아보는 게 몇 가지 있다. 최대 2만보의 하루를 보내는 보행자로서 ‘우측통행’을 하는지, ‘좌측통행’을 하는지 꼭 찾아본다. 몰랐을 때와 알고 난 후의 여행은 미세하지만 달랐다. 무엇보다도 알고 걸으니 어떤 순간에도 마음이 편했다는 것. 여행자의 자존감이 꽃피는 순간 아니었을지. 배려는 일방향일 때보다 양방향일 때 시너지가 크다. 그다음으론 특유의 ‘인사법’이 혹 있는지 찾아본다. 일례로 네덜란드에선 첫 만남일 때는 ‘악수’를 하며 인사를 하는 게 예의라고 한다. 빈에서 네덜란드 사람들을 만났을 때 그들의 악수에 화답하는 것으로 체화시킬 수 있었다. 레스토랑에서 전채 요리나 디저트를 둘이 함께 먹기 위해선 커트러리를 별도로 꼭 요청하는 게 좋다거나 식전주와 본식에 곁들일 드링크를 구분해서 주문하는 매너를 기억해 두고 자주 써먹으니 식사 경험의 즐거움이 배가 됐다.
감사를 분명히, 정확하게 표하고 건넬수록 돌아오는 다정함의 크기가 갈수록 커졌다. 현지어로 아침 인사, 헤어질 때 인사, 밤 인사만 겨우 했을 뿐일 때에도 한 단어라도 더 알려주려는 사람들을 여럿 만났다. ‘여행자는 당연히 모르는 게 많다’는 마음가짐으로 늘 묻고 다닐 때면 무표정의 시크함이 상징인 비에니즈들의 얼굴에 화색이 돌던 순간을 잊지 못한다. 무언가를 정중히 묻는 사람은 매력 있다. 정말이다. ‘나는 모릅니다’의 태도가 아니라면 묻는다는 게 결코 쉬운 일이기 아니기 때문이다. 누군가가 당신에게 무언가를 물었을 때 혹은 도움을 청했을 때 당신이 어떻게 반응했는지 생각해 보시라. 당신은 도움과 미소를 대가 없이 건네지 않았는가 말이다. 상대가 여행자였다면 그날 그의 여행은 이미 완성형이었을 거다.
비단 장거리 해외여행에만 국한되는 게 아니다. 해마다 여름의 초입 혹은 여름의 끝자락에 찾는 곳이 양평 서종에 있다. 별 거 안 하고 무념무상의 쉼을 즐기기에 제격인 곳이다. 은퇴 후 공기 좋은 곳에 집을 짓고 그 곁에 독채를 하나 더 지어 에어비앤비로 운영하시는 부부와 노견 슈나우저가 사는 곳이다. 충만한 쉼을 가진 후 떠날 때면 습관을 따라 모든 것을 제자리에 두고, 설거지나 간단한 청소를 하고 아내분께 인사를 건네곤 했다. 더할 나위 없는 만족감에 정성스럽게 리뷰도 남기고 그리워하곤 했는데, 어느 날 내 리뷰에 호스트가 댓글을 다셨다. “깨끗하게 사용하신 게스트분에게 감사드려요. 다음 분을 배려하신 겁니다.” 잊을 수 없는 한마디라고 하면 너무 과한가? 그렇지 않다. ‘배려’를 알아봐 주는 ‘배려’가 너무 귀하고 드물기 때문이다. 여행자가 거쳐가는 곳은 늘 ‘다음 분’이 있다. 내가 지나온 곳을 찾는 누구든 나의 배려로 인해 행복할 수 있다면, 난 어디에서든지 행복할 수 있는 여행자 아닐까.
오감과 육감을 활짝 열고, 나라나 도시마다의 주파수에 내 주파수를 맞춰보면 여행은 눈이 부시게 흥미롭다. 면밀히 관찰하고, 눈과 귀의 기능을 최대치로 끌어올린 다음 장기 기억 속으로 중요 정보를 각인시키는 작업은 대체로 짜릿하다. 빈을 다니면 다닐수록, 빈의 살롱 문화와 커피에 빠지면 빠질수록, 감각이 뾰족해진다. 말인즉슨, 멜랑즈와 카페라떼와 카푸치노의 차이를 감각할 수 있게 된다. 그 ‘차이’를 안다는 건 진정한 비에니즈가 되었다는 십여 가지 사인 중 하나라는 정설이 있다고 한다. 언어 표현의 차이도 흥미롭다. 베를린에선 어디에서든 ‘구튼 탁(Guten Tag)!’으로 인사를 주고받곤 했는데, 빈에서는 ‘구튼 탁’보다는 ‘Grüß gott(그뤼스 고트)’가 더 많이 들려왔다. 열심히 따라 하며 화답하다 보니 오스트리아 문화에 슬쩍 발 하나를 담근 것 같아 기분이 좋더라.
정확한 의미가 궁금해 찾아보니 본래 표현은 ‘Grüß dich gott(그뤼스 디히 고트)’로 ‘신이 당신에게 인사한다’라는 의미라고 한다. 신의 축복을 건네며 좋은 하루를 기원하는 인사말은 당장 외워두고 열심히 써먹어 마땅하지 않나. 하루에도 수차례 축복을 주고받은 덕분에 빈과 더 친해졌던 게 아닐지. 언어가 마음의 장벽을 금세 낮춰주기도 하지만 언어의 장벽이 전혀 문제가 되지 않는 경우도 물론 많다. 도쿄 긴자의 구석진 곳에 있는 위스키바 캠벨타운 로크(Campbelltoun Loch)에서의 어느 밤이었다. 서울에선 본 적 없던 희귀 보틀로 가득 찬 곳에서 황홀함과 신기함을 오가며 감동하고 있을 때 옆 자리 손님 두 분이 ‘좋은 선택’을 했다며 말을 걸어왔다. 일본어와 영어를 섞어가며, 번역기까지 동원해 위스키를 향한 애정과 관심을 서로 주고받다 보니 술은 더 맛있고, 흥취는 한없이 오르고, 분위기는 후끈했다.
일을 마치고 한 잔 하며 하루의 피로를 풀고 있는 로컬 사람들을 방해하고 싶지 않은 마음이었다. 대화는 최소한으로 나누고, 그저 위스키를 음미하고 있었는데 어느새 공간의 공기가 바뀌어버린 것. 나란히 앉은 우리 커플과 일본인 손님 두 사람 그리고 바 건너편에 있는 오너까지 다섯 명이 함께 세상에서 가장 조용한 파티를 한 셈이었다. 태도와 미소, 그리고 배려가 결국은 그 어떤 언어보다도 강력하다는 것을 여행을 할 때마다 깨닫는다. 여행 짐을 싸기에 앞서 ‘나만의 다정함과 필살기 미소’를 먼저 챙겨보는 거다. 인사말 서너 가지도 메모해 두고 연습해 보자. 조심스럽게 공간과 분위기에 스며든다는 건 말 한마디 없이 공기 중에 ‘배려와 호기심’을 띄우는 것과 다름없다. 대접을 원하고 기대하기 전에 먼저 주는 것이 충만한 여행을 만드는 지름길이다. 그럼, 지름길 지르밟고 다음엔 어디로 떠나볼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