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angi bene, vivi meglio
손가락 끝으로 몇 번만 터치하면 전 세계 어느 레스토랑도 손쉽게 예약하는 이 시대의 편리함은 종종 지루하다. 하이테크와 빠른 변화는 시간과 에너지를 절약해 주지만 재미와 흥미는 삭감시킨다. 극히 주관적인 해석이지만, 어쩌면 우린 ‘덜 흥미로운’ 세상이 된지도 모른 채 변화와 속도만 따라가고 있는 건 아닐까. 다시 하늘 길이 열리기 시작한 무렵 오스트리아 빈과의 세 번째 만남을 기획하는 과정에서 레스토랑 마르코디(Marcodi)를 발견했다. 순전히 몇 주 동안 구글맵을 유영한 결과다. 지도 안에 언제나 답이 있다. 마르코디는 오직 전화와 이메일로만 예약을 받는 로컬 레스토랑이다. 엄밀히 보면 이메일은 아날로그가 아니지만 메시지를 손수 하나하나 작성해야 한다는 게 왠지 로맨틱하다. 검지손가락 손끝으로만 끝낼 수는 없는 작업이니까. 인사도 건넬 수 있고, 짧게나마 나를 소개할 수도 있다. 원하는 일시에 예약이 어렵다면 몇 차례 더 이메일을 주고받아야 한다. 얼굴도 본 적 없는 사람과 통성명을 하고, 외국어로 인사와 이야기를 나누는 건 분명 정감 있는 일이다. 설렘과 불안을 넘나드는 재미가 보장된 일이랄까. 다정함이 여행을 구원하는 순간을 경험하는 행운도 누려볼 수 있다.
마르코디 홈페이지에 접속하면 제일 먼저 만나는 문장이 있다. “Mangi bene, vivi meglio.” “잘 먹고, 잘 살자”쯤으로 해석할 수 있겠다. 무척 직관적이고 단순한데 진리의 색채를 띤다. 오너 셰프인 마르코 피차토(Marco Pizzato)의 짤막한 편지도 실려 있다. 본인만의 고유한 창의성을 발현해 생선과 해산물을 요리하고 싶었고, 동시에 손님들과 친밀히 접촉하고 싶었다고 한다. 그러기 위해선 테이블 수가 적어야 하는 공간적 제약이 있다. 하지만 손님들 개개인의 요구를 적극 반영하는 메뉴를 만들 수 있고, 잊을 수 없는 미식 경험을 선사할 수 있다고 그는 말한다. 다년간의 가스트로노미 경력을 뒤로하고 ‘작지만 훌륭한(small-but-nice)’ 공간 마르코디를 만드는 게 꿈이었다는 이야기를 먼저 접하고 나니 레스토랑 마르코디와 친해진 듯한 기분이 들었다. 누군가의 꿈에 들어가 본다는 건 꽤 근사한 일이다.
유럽의 많은 레스토랑들은 온라인 예약 가능 여부와 상관없이 홈페이지를 갖고 있다. 콘셉트를 위시한 콘텐츠로 멋짐이 폭발하는 오늘날의 SNS에 비하면 다소 투박하고 예스럽지만, 풍성한 이야기로 가득하다. 메인 메뉴의 레시피를 공개한 곳도 있고, 오랜 세월 동안 어떤 변화를 거쳐 왔는지 사진과 글로 보여주는 페이지도 있다. 예상컨대 역사를 중시하고 시간의 흐름과 축적을 믿고 존중하는 문화에서 비롯된 게 아닐는지. 오래된 식당이 많으니 세월이 지나며 켜켜이 쌓인 이야기도 많을 것이다. 동네마다, 식당마다 그 이야기들이 얽히고 설켜 버무려지면서 만들어진 특유의 분위기가 존재하는 이유일 테고 말이다. 도시 여행을 앞두고 있을 때면 책을 읽듯 정성스레 홈페이지 구석구석을 정독한다. 호텔이든 식당이든 미술관이든 오케스트라든 홈페이지로 먼저 만나는 재미가 만만찮다. 예습이 필요한 세상의 많은 일 중에서 가장 즐거운 일 아닐는지.
명색이 독일어 과외를 받아본 사람으로서 주제넘는 자신감으로 마르코디에 예약 이메일을 보냈다. 구글의 도움을 한 스푼 얹은 건 물론이지만. 빈에서의 마지막 밤 저녁 식사 예약이었다. 빈에서의 첫 저녁 식사는 리추얼을 따른다면, 마지막 날 저녁 식사는 새로움 혹은 특별함을 추구한다. 한주 반 가량 시간이 지나도록 회신이 없어 포기하려던 즈음 넬리(Neli)에게서 ‘저녁 7시 웬디를 만나길 기대할게요’라는 답장을 받았다. 셰프 마르코는 홈페이지에서 사진과 글로 먼저 만났지만 넬리는 누구일지 호기심이 일었다. 그리고 유난스럽게 너무 기뻤다. 이런 유난스러움이라면 더 만들어야겠다고 생각했다. 자주 기뻐하고, 작은 것에 크게 감동하는 나를 많이 발견하는 건 역시 여행이다. 일상을 여행처럼 보내는 건 영원히 쉽지 않을 과제지만 여행의 순간들이 축적되면서 삶이 여행의 순간들을 닮아가고 있는 건 분명하다.
빈의 8 구인 요제프슈타트(Josefstadt)는 제법 많이 돌아다녀본 익숙한 구역인데도 불구하고 마르코디로 향하는 길은 처음 걸어보는 길이었다. 이방인이자 여행자에게 잦은 간격으로 찾아드는 큰 즐거움이 있다면 바로 ‘낯섦’과 ‘새로움’이다. 요제프슈타트를 좀 안다고 생각했던 나의 오만방자함이 부끄럽지만 귀여웠다. 고요한 주택가를 십여분 걷고 나니 길 건너 따스한 불빛이 새어 나오는 마르코디가 보였다. 어두운 무대 위에서 홀로 핀 조명을 받고 있는 풍경이다. 창밖에서 바라보니 단 하나의 테이블을 제외하고는 사람들로 이미 가득 차 있었다. 문을 열고 들어서려는데 문이 어찌나 안 열리는지 금세 얼굴이 붉게 달아올랐다. 연인과 함께 번갈아 시도했지만 계속 실패했다. 더 이상은 감당할 수 없을 만큼 목덜미가 뜨거워지려는 찰나에 구세주 넬리가 나타났다. 넬리는 우리를, 정확히는 나를 바로 알아보고는 ‘웰컴, 웬디!’라고 외치며 환영을 건네주었다. 그녀의 환대에 볼과 목에 서려있던 붉은 당혹감은 금세 사라졌다.
마르코디는 셰프 마르코를 전적으로 의지하는 코스로만 디너를 즐길 수 있다. 그가 칭한 디너 코스의 이름은 ‘Gourmet Journey(미식의 여정)’이다. 메뉴판은 없지만 넬리의 친절한 스토리텔링이 제공된다. 그녀는 불가리아 태생으로 오스트리아 이민자다. 여행을 좋아해 가족과 함께 자주 다닌다고 하며, 무려 4개 국어를 구사한다고 한다. 불가리아어, 영어, 독일어 그리고 이탈리아어. 치사량을 과하게 넘긴 매력과 능력의 소유자다. 남편의 모국어 이탈리아어를 배웠다는 게 너무 로맨틱하지 않은가? 그럼 마르코도 불가리아어를 하느냐 물었더니 ‘아주 조금만’이라며 윙크를 날려주는 그녀가 너무나도 사랑스러웠다. 그런데 무엇보다도 그녀에게서 가장 빛났던 것은 이방인이자 여행자인 우리를 대하는 특유의 섬세함과 따뜻함이었다. 언어적으로 그리고 비언어적으로 넬리가 건네준 다정함에 가슴이 녹아내릴 지경이었다. 주방에선 셰프 마르코 혼자, 홀에선 넬리 혼자서 일하는데 마치 대여섯 명이 일하고 있는 듯 매끄럽고도 꽉 찬 느낌이 들었다.
홈메이드 프로세코로 목을 축이는 동안 미식 여정이 시작됐다. 셰프 마르코가 담갔다는 프로세코가 어찌나 맛있던지 두 눈이 번쩍 뜨였다. 역시 술이든 음식이든 집에서 만든 맛과 풍미는 남다를 수밖에 없는가. 마르코의 어머니가 이탈리아에서 만들어 보내셨다는 선드라이 토마토, 허브에 굴린 치즈, 그리고 올리브오일에 절인 블랙 올리브가 애피타이저로 나왔다. 감탄이 절로 나오는 엄마표 맛에 저항할 틈도 없이 바로 굴복하고 말았다. 프로세코 한 잔 더! 맞은편 자리에서 나와 함께 감탄하느라 정신이 없던 연인은 프로세코 대신 넬리의 추천으로 로컬 드래프트 맥주를 주문했다. 엄마밥과 이탈리아 미식을 향한 무한신뢰가 한층 더 깊어졌다. 어느새 우리의 이야기는 언젠가 꼭 함께 하기로 약속한 ‘이탈리아 여행’으로 이어졌다. 마음을 조금 가다듬을 무렵 또 애피타이저가 나왔다. 레몬 빛깔을 띤 으깬 감자 위로 통통한 문어 다리 두 점과 굽기가 완벽한 마늘이 올려져 있는 어여쁜 디쉬였다. 사이좋게 한 점씩 나눠 먹으며 프로세코와 맥주로 여행의 마지막 밤을 위한 축배를 들었다.
코스의 첫 번째 메인 디쉬는 비트에 절여 붉게 물든 채소와 과일 위에 얹어진 흰 살 생선이었다. 어디에서도 맛보지 못했던 과일의 달콤 상큼함과 담백하게 구운 생선살의 묘한 조화에 감각이 활짝 열렸다. 이어지는 디쉬는 그린 페스토와 각종 피클을 곁들인 참치 타다키. 흐름을 깨고 싶지 않은 마음에 화이트와인 한 잔을 성급히 주문했다. 입안에서 열린 생선과 피클과 와인의 축제는 영원히 붙잡아 두고 싶은 향연이었다. 다음 디쉬도 역시 생선이겠거니 했으나 예상을 깨고 녹진한 향이 코를 찌를 듯 퍼지는 블랙 트러플 뇨끼였다. 넬리는 잠시 쉬어가는 시간이라면서 어깨를 으쓱했다. 이탈리아에서 온 트러플의 풍미를 이탈리안 셰프가 만든 뇨끼로 충만히 만끽했다. 잠깐의 휴식이라기보단 호사스러운 휴가다. 무언가에 홀린 듯 나는 어느새 와인을 비우고 프로세코 한 잔을 또 주문했다. 훌륭한 음식 앞에 바치는 환희와 행복의 송가라고나 할까. 와인을 부르는 맛을 느껴본 사람이라면 이 지점에서 격한 공감을 할 거라 믿는다.
공기에 감도는 기운과 시간의 농도로 절정의 순간이 곧 다가오고 있음을 느낄 수 있었다. 기분 좋은 예감은 적중했다. 셰프 마르코가 드디어 주방에서 나온 것이다. 홈페이지 사진으로만 보다가 미식 여정이 최고조에 달하고 있는 와중에 조우하니 더 반가웠다. 사진보다 훨씬 거구인 셰프 마르코를 마주하니 문득 책 제목이 하나 떠올랐다. 이탈리아 셰프계의 전설이자 이단아로 불리는 미슐랭 3 스타 셰프 마시모 보투라의 책 <Never Trust a Skinny Italian Chef>. 음식을 자신만의 스타일로 만드는 것도 대단하지만 먹기를 즐겨하는 셰프의 저력과 상상력은 다를 수밖에 없다. 먹는 즐거움을 향한 진심이 통하겠다는 생각에 순식간에 내적 친밀감이 피어났다. 셰프 마르코의 손에 들린 크나큰 오븐 트레이 위에는 배가 불룩한 소금산이 영롱하게 반짝이고 있었다. 그는 수줍음과 장난기가 공존하는 미소와 함께 홀을 한 바퀴 돌며 모두에게 소금산을 보여주었다. 우리를 비롯한 모든 사람들의 함성과 박수가 터져 나왔다. 한 편의 쇼를 보며 함께 환호하는 관객이 된 듯했다. 모두가 서로에게 낯선 남에 불과하지만 짧은 순간 같은 것을 바라보며 즐거워한다는 게 나쁘지 않았다. 소금산을 깨트리는 세리머니와 함께 미식의 여정 마지막 장이 열리고 있었다.
하얀 접시 위에 데친 시금치 한 줌과 소금산 속에서 꺼내 정성스레 살을 발라낸 대구를 얹어주는 셰프 마르코는 엄숙해 보였다. 생선의 흰색과 시금치의 녹색이 이룬 색의 대비는 한 폭의 정물화 같았다. ‘가장 아름다운 건 가장 단순하다’. 시금치 위에 드리운 드레싱에서 일단 놀라움이 시작됐다. 올리브오일과 레몬과 소금의 맛이 한꺼번에 혀에 몰리더니 크림을 먹는 듯한 식감의 시금치와 만나 폭죽처럼 터졌다. 좋은 식재료와 탄탄한 기본기가 만들어낸 궁극의 단순함은 실로 근사했다. 설레는 마음으로 이어서 맛본 대구는 놀랍도록 탱탱하고 육즙이 가득했다. 말로 표현할 수 없는 어떤 감칠맛이 분명 가득했는데 아마도 소금산 속에서 일어난 미스터리 아니었을지. 유럽에서 만난 가장 단순하지만 가장 품격 있는 최고의 한 접시였다. 접시 위에서, 입 안에서 또 다른 여행을 하고 있는 것만 같았다. 온갖 감각을 깨워내는 건 물론이고 상상력 마저 자극하는 요리 앞에서 할 수 있는 건 오직 찬탄뿐이었다. 접시 안에 우주가 펼쳐져 있었다.
미술관에서 회화나 조각을 보다 보면 유독 나에게 말을 걸어오는 작품이 있다. 작품과 나 사이에 존재하는 틈새에서 감각과 해석 그리고 상상이 활개를 치며 수많은 질문들이 뿜어져 나오는 것이다. 질문이 솟아나는 순간 작품에 생기가 어린다. 살아있는 듯 생동감을 뿜어내며 나를 자극하는 그 힘에 계속해서 이끌리는 거다. 셰프 마르코의 요리가 그랬다. 존재하는지도 몰랐던 어떤 세계로 우리를 데려다주었다. 시각적으로는 반전미랄 게 딱히 없는, 기본에 충실한 요리인데 맛보고 감각하는 순간 미지의 세계로 끌려 들어갔다. 알 것 같지만 도저히 말로는 정확히 표현할 수 없는 맛의 향연에서 집중해야 할 일은 온 감각을 깨워 맛보고 음미하는 것이었다. 열과 성을 다해 음미하고 즐기다 보니 어느새 황홀한 여정이 끝나고 있었다. 달큼한 취기가 뒤통수를 따라 올라왔다. 영화 속에 들어갔다 나온 마냥 신비로운 기시감 마저 감돌았다. 마지막 날 밤이면 으레 찾아오던 멜랑콜리는 자취를 감췄고 최대치를 능가하는 만족감이 차올랐다.
빈에서 해산물 요리를 먹어봐야겠다는 하나의 작은 생각에서 시작된 여정이 이리도 황홀하게 펼쳐질 줄은 미처 몰랐다. 아니 몰랐기에 다행이었다. 어떤 일이 일어날지, 어떤 세상을 만나게 될지 알 수 없는, 나약한 인간에 불과하다는 것에 이토록 감사하게 될 줄이야. 다년간 차곡차곡 쌓아온 체지방과 직감이 이토록 훌륭하게 기능할 줄이야. 연거푸 감동만 하느라 정신이 혼미했지만 어린아이가 된 마냥 신이 났다. 순수한 즐거움이 지닌 힘을 선명하게 감각할 수 있었다. 그저 몇 시간 동안 이어진 저녁 식사에 불과한 자리가 아니었다. 고밀도, 고농도의 행복, 교감 그리고 배움의 장이었다. 열린 마음으로 여행을 하고 있다고 생각했는데, 더 활짝 열려 있는 마르코와 넬리를 만나고 나니 마음속에서 무언가가 꿈틀댔다. 삶을 향해, 여행을 향해 그리고 사람을 향해 마음의 문을 더 열고 싶다는 소망과 용기가 샘솟았다. 여전히 그곳이 어디인지 정확히 알 길 없지만 또 하나의 미식의 세계, 미지의 세계가 열렸다. 그 세계를 다시 만날 수 있을 그날까지 격렬히 마르코디를 그리워하련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