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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Wendy An Feb 01. 2024

호텔 이사하기

동에서 서로, 남에서 북으로

도시 여행의 매력은 도시가 품고 있는 다양성에서 비롯된다. 특히 오랜 역사를 지닌 유럽 도시들의 구시가지는 독보적인 분위기를 자아낸다. 시간여행을 하듯 옛 정취와 이야기 속으로 빨려 들어간다. 도시를 이리저리 누비다 보면 정신에 즐거운 분열이 일어나곤 한다. 갑자기 바뀌는 풍경, 사뭇 달라진 사람들의 표정과 걸음걸이, 동네를 점유하고 있는 색채와 공기의 냄새까지 곳곳마다 꽤 다르니 말이다. 수많은 다름 속에서 나와 케미가 맞는 곳을 만나는 희열이야말로 도시 여행의 묘미라 할 수 있다. 동네마다 뽐내는 고유한 개성을 만드는 건 단연 환경과 사람의 상호작용 아닐까. 서로에게 영향을 끼치며 닮아가고, 함께 진화하는 관계가 바로 도시와 사람이니까. 원주민들과 여행자들 사이에 흐르는 묘한 긴장감과 은은한 눈빛 교환을 상상해 보라. 도시를 채우는 에너지가 더 짜릿해진다.


도시의 구석구석을 누비며 많은 걸 보고 듣고 느끼려는 욕심은 끝이 없다. 슬프게도 시간과 에너지는 제한적인고로 욕심을 정교하게 깎아내야만 한다. 비결을 나누자면 나만의 여행은 어떤 여행인지 먼저 키워드로 표현해 보는 거다. 예술, 건축, 미식, 음악, 자연, 카페, 역사 등 무엇이든 키워드가 될 수 있다. 내게 중요한 여행 키워드 중 하나는 ‘호텔’이다. 호텔은 도시의 축소판과 다름없는 복합 문화 공간이자 영감의 장이다. 에베레스트에서는 네팔과 티베트가 베이스캠프로서 등정의 근거지가 되듯 내 모든 여행의 베이스캠프는 호텔인 것이다. 여행을 준비하는 과정에서 첫 설렘 폭발 구간은 호텔 찾기에 탐닉하는 시간이다. 잠재적 목록을 만들고 나면 얼마간 심리적 거리를 둔다. 여백은 여유를 부르는 법. 선택과 결정이 산뜻해진다. 내면의 목소리를 따라 마침내 취향과 욕망에 찰싹 들어맞는 호텔을 찾는다. 여행 준비의 99%가 완성되는 순간이다.


한 도시에서 일주일 동안 머물다 보면 그 도시에 서서히 스며든다. 길가의 풍경과 방향에 익숙해지면서 도시와 친해지는 느낌도 들고 말이다. 느슨하게 거닐수록, 더 자세히 들여다볼수록 도시는 길을 잃는 행운을 선사해 주기도 한다. 길을 찾는 것보다 길을 잃는 게 더 어려워진 오늘날의 세상에서 길을 잃고 뜻밖의 발견에 이르는 건 선물이다. 그뿐이 아니다. 먼저랄 것 없이 서로 다정함을 주고받다 보면 도시와 나의 관계는 한 단계 더 발전한다. 기분 좋은 밀고 당김을 즐겨보지만 결국 사랑 앞에서 굴복하고 마는 건 언제나 여행자다. 짝사랑일지언정 기꺼이 뛰어들고 싶은 그런 마음이랄까. 사랑하기로 결심하고, 온 맘 다해 사랑에 빠지고, 그 사랑을 추억하며 일상을 살아가는 것. 여행이 가르쳐준 최고의 마음가짐이다. 도시마다 여행자에게 마음을 여는 속도가 다르지만 그마저도 흥미롭다.


도시가 품고 있는 다양성이 가장 잘 드러나는 건 다름 아닌 ‘동네’다. 뉴욕의 어퍼이스트 사이드와 미트패킹 디스트릭트, 파리의 마레지구와 16구, 베를린의 미테지구와 슈판다우, 그리고 빈의 노이바우(7구)와 베링(18구)은 각각 다르고도 다르다. 다르기에 더 아름답다. 각 동네마다 뚜렷한 개성이 쌓이고 쌓여 직조된 분위기는 남다른 오라를 발산한다. 유독 매혹적인 자태로 여행자를 유혹하는 곳도 있다. 매력은 매력을 부르기 마련 아닌가. 어떤 끌림에 이끌려 어딘가 낯선 동네로 발걸음 했다면 저항 없이 머물러 보자. 계획에 없던 동선일지라도 적극적으로 살펴보는 거다. 골목으로 깊이 들어가도 보고 동네 사람들도 힐끔힐끔 구경해 보자. 호기심을 자극하는 카페나 상점에 들어가 동네 특유의 분위기도 느껴보자. 관성이 작동해 이제 그만 돌아갈까 싶을 때쯤 낯선 방향을 향해 한 번 더 들어가 보자. 보물은 꼭 한 발짝 더 움직일 때 나타나더라.


내게는 원칙 아닌 원칙이 있다. 완곡한 표현으로 순화시켜 보자면 ‘선호’나 ‘취향’이 되려나. 여전히 애정하고 있지만 언제든 버리고 바꿀 준비가 돼있는 잠정적 우선순위기도 하다. 아, 여행자의 몰랑몰랑한 마음이여. 취향은 움직이니까! 아무튼 아직은 고수하고 있는 1순위 원칙은 바로 ‘호텔 이사하기’다. 그러니까 동에서 서로, 또는 북에서 남으로 말이다. 한도시에서 최소 한주 동안 머무는 것을 전제로 일부러 즐거이 이사한다. 단언컨대 ‘호텔 이사하기’는 깨알 재미를 보장한다. 이를테면, 독특한 환경과 분위기, 새로운 미식의 세계, 주민들의 일상의 모습과 연령대, 낯선 건축 양식에 이르기까지 ‘다름’의 향연이 펼쳐진다. 아침과 낮 풍경, 밤 풍경도 느낌이 다르다. 이른 아침 활기찬 모습이 인상적인 동네가 있는가 하면 밤에 이르러서야 비로소 진가를 발휘하는 동네가 있다. 아, 정말이지 다름은 매력이고, 매력은 마력이다.


동네로 잠깐 놀러 가는 것과 동네에서 먹고 자보는 건 차원이 다르다. 동네의 정취와 역사를 머금은 호텔은 내게 이야기를 건네는 듯하다. 다만 은밀하고 비밀스럽게. 이 은밀한 비밀과 가까워지려면 일단 몸과 마음의 속도를 늦춰야 한다. 느슨해진 정신에 틈새를 두어야 여유가 피어오를 수 있으니. 그러고 나면 눈동자에 씌어 있던 두터운 막이 사라지고 개운함이 찾아든다. 새로운 시선을 갖게 되는 순간이다. 보지 않던 것을 애정 어린 시선으로 보게 된다. 이방인의 특권을 마음껏 누리는 거다. 동네 사람들의 표정과 그들의 시선이 향하는 장면으로 나의 시선도 가져다 둔다. 길바닥의 타일과 가로수의 높이, 흩날리는 나뭇잎과 구석에 피어있는 이름 모를 꽃이 예사롭지 않아 보인다. 카페 사장님과 이웃집 꽃집 사장님이 장난기 가득한 얼굴로 대화를 나누는 장면을 감상한다. 자연스레 그들 대화의 내용을 상상하며 미소 짓고 있는 나를 발견한다.


호텔 이사하기에 제대로 재미를 붙이기 시작한 건 지난 2016년 파리에서부터다. 도시를 깊이 음미한다는 게 무엇인지 맛을 본 것이다. 15년 만에 재회하는 파리의 여정을 어디에서 시작할지 고민하던 중 흥미로운 전시를 발견했다. 쁘띠 팔레에서 열리는 피카소 오마주 작품 전시였다. 20인의 아티스트의 회화, 조각, 미디어 아트와 더불어 피카소의 작품들도 몇몇 볼 수 있는 기회였다. 암스테르담에서 기차를 타고 파리로 넘어가자마자 하고 싶은 건 쁘띠 팔레로 달려가는 것이었다. 파리와 다시 만나는 날의 어스름 녘에 궁전으로 달려가 피카소를 만나는 건 무척 근사한 일이라 생각했다. 이 감격적인 재회의 세리머니를 염두에 두고 구글맵을 몇 날 며칠 들여다보며 비대면 동네 탐색을 시작했다. 


오직 나만을 위한 동선을 그려보는 일은 일종의 심리 치유 효과가 있다. 믿어 보시라, 정말이다. 해도 해도 질리지 않는 일이 이 세상에 얼마나 된다고 보는가. 새롭고 설레기 그지없는 셀프 테라피에 꼭 동참해 보시길. 세로토닌과 옥시토신이 열일하는, 그야말로 호르몬 밸런스 맞춤 트리트먼트다. 다시 파리로 돌아가 보자. 열띤 탐색 끝에 개선문이 내려다 보이는 16구 언덕길 어귀 호텔을 찾았다. 작지만 어여쁜 곳이다. 창문마다 넝쿨이 드리워 있고, 몽글몽글한 온기를 지니고 있었다. 옛 건물들이 촘촘히 자리한 조용한 골목길에서 잔잔한 존재감을 지닌 호텔이었다. 저녁놀을 벗 삼아 천천히 그리고 우아하게 샹젤리제를 걸어 쁘띠 팔레로 향했다. 두근거리는 가슴, 점점 가까워지는 콩코드 광장 대관람차의 반짝거림, 쁘띠 팔레 위에 걸터앉은 핑크빛 구름까지 참으로 감동적인 재회였다. 쁘띠 팔레로 들어가 감상을 즐기던 중 갑자기 피카소가 나타났다. 거대한 피카소의 탈을 쓴 마네킹이 두 팔을 한껏 벌리고 있었던 것. 풉, 웃음이 새어 나왔다. 피카소의 미간은 찌푸려져 있었지만 나는 알 수 있었다. 파리는 분명 나를 격하게 환영하고 있다는 것을.


16구 호텔 머큐리 파리 샹젤리제에 머무는 동안 고요함, 차분함, 그리고 사색을 즐겼다. 호텔 주변 동네 이곳저곳을 무작정 거닐어 보았는데 어디를 가도 조용했다. 무채색 조용함이 아닌 오색 창연한 조용함이었다. 분명 생기를 띠고 있지만 결코 소란스럽지 않은 기품이 느껴졌다. 사람들의 움직임은 실크처럼 부드러웠다. 오랜 세월 파리를 오해하고 있었던 건 아닐까 싶었다. 혹시 말을 하면 안 되는 투숙 규칙이 있나 싶을 정도로 극강의 고요를 유지하던 호텔은 동네를 닮은 듯했다. 덕분에 편안하고도 느슨하게 파리를 만끽했다. 16구와 나, 제법 결이 맞는 사이라는 생각도 했고. 아침마다 호텔 커피로 잠을 깨운 후 빵을 몇 개 집어 들고는 몽소 공원으로 향했다. 왕복 60분, 공원 내 산책 약 30분, 벤치에 앉아 멍 때리기 30분, 도합 120분의 아침이라니. 혹 파리지엔보다 럭셔리하게 쓴 아침 아닐까? 여행의 아침 마니아인 내겐 두 시간의 천국이었다. 16구에서 찾고 누린 즐거움을 다 열거하자니 시간도 지면도 부족하다. 왜냐면 이제 이사를 가야 하니까!


호텔은 팬데믹에 문을 닫았다. 그리움과 아쉬움이 크게 남는다.


분명 오페라 가르니에가 저기 보이는데 택시는 길에서 꿈쩍도 하지 않았다. 답답함은 잠시 나도 모르게 읊조렸다. ‘그렇지, 옳지, 이게 파리 아니겠나’. 16구와 아름다운 이별을 하고 오페라구로 호텔 이사를 하던 참이었다. 화려함과 아름다움에 기꺼이 압도당하고픈 마음으로, 예술의 정신을 한 조각이라도 훔치고픈 소망으로 향했던 파리의 심장. 좀 더 거친 생동감과 좀 더 두꺼운 공기, 하모니를 이루는 다양한 음역대의 소음과 관광색이 짙게 드리운 골목에 도착했다. 호텔을 찾으려 잠깐 서 있던 찰나 빵 냄새가 코끝을 제대로 치고 갔다. 지금 호텔이 대수랴 빵부터 먹어야 했다. 몇 번 두리번거리고 나니 순식간에 빵냄새의 근원지를 찾을 수 있었다. 역시 블랑제리 폴(PAUL)에서 삐져나온 강렬한 유혹이었다. 냉큼 빵을 한 아름 사고는 몇 걸음 옮겨 호텔 오페라 당탱으로 향했다.

아, 아름다운 오페라 가르니에!


방문을 연 순간 일단 미소가 새어 나왔다. 어느 고택의 다락방을 차지한 기분이 들었다. 짙은 고동색의 오래된 빛깔의 가구들, 면적 대비 매출은 신경도 안 쓴 것 같은 널찍함, 두꺼운 벨벳 커튼과 대리석 욕조까지 모든 게 좋았다. 방의 구석진 공간 한편 비스듬한 벽 아래 책상이 놓여 있었다. 예스러운 분위기를 물씬 풍기는 게 심상찮아 보였다. 일순간 내 상상력을 마구 자극했다. 책상에 앉아 편지를 쓰면 시간 여행을 할 수 있지 않을까 하는 이상한 느낌. 영화 미드나잇 인 파리 과몰입에 여전히 빠져 있는 중이다. 바로 옆엔 귀여운 사이즈의 정사각형 창문이 있고 레이스 커튼이 드리워 있었다. 창문의 모양새 때문인지 창밖 풍경이 온통 지붕뿐인데도 그림처럼 감상하곤 했다. 가장 사랑스러운 포인트는 바로 창문 아래 놓인 낡은 가죽을 덧씌운 스툴이었다. 낮은 등받이가 있는 스툴인데 놓인 모양새를 보아하니 바깥 풍경을 뒤로한 채 생각에 잠겨보라는 것만 같았다. 그래서 바로 실천했다. ’공간이 말을 걸어오는 게 바로 이런 느낌이구나’.


화이트 와인을 땄다. 뜨거운 욕조에 몸을 반쯤 누이고 와인 한 모금, 빵 한 입을 오가며 유희를 즐겼다. 이대로 충분히 좋다는 생각뿐이었다. 넉넉히 쉼을 즐길 심산이었지만 언제곤 마음 바뀌면 뛰어나갈 참이었다. 여기는 오페라구 아닌가. 경쟁하듯 반짝이는 화려한 조명빛과 와인에 물든 사람들의 수다 소리 그리고 끊임없이 유혹하는 브라세리로 가득 찬 동네 말이다. 아늑한 밤을 보내고 오페라구의 아침 풍경 속으로 들어가 보았다. 이른 시간에 오페라 가르니에를 한없이 바라볼 수 있다는 건 정말 호사였다. 확 트인 시야로 눈호강을 제대로 즐기고는 파리에서 가장 아름답다는 스타벅스 오페라에서 커피를 마셨다. 뇌가 깨어나는 느낌이 들었지만 꼭 깨울 필요가 있나 싶더라. 황홀감에 둘러싸여 있는 마당에 이성을 붙잡는 건 옳지 않게 느껴졌다. 이 커피는 분명 내가 아는 그 맛일 텐데 달리 느껴졌다. 기분이 감각을 압도하는 순간이었다.


파리를 기점으로 호텔 이사하기의 역사가 시작됐고, 진화하고 있다. 베를린에선 미테 지구에서 쿠담지구로, 빈에서는 노이바우에서 요제프슈타트로 이사했다. 스톡홀름에서는 외스터말름에서 노말름으로, 코펜하겐에서는 인드레 바이에서 외레스타드로 이사했다. 7년 만에 다시 만난 파리에선 11구와 사랑에 빠져 버렸는데 호텔 ‘르 제네랄’의 활약 덕분이었다. 도시를 탐닉하는 여행에 최고의 동반자는 호텔이다. 내 취향과 욕망을 제대로 저격한 호텔을 찾아 도시 여행의 베이스캠프로 삼아보자. 동서남북으로 도시를 탐험하며 도시와 열렬히 연애해 보는 거다. 잘 벼려진 칼이 훌륭한 요리의 기반이 되듯 호텔 이사하기로 도시와 더 깊이 교감하며 취향을 벼려보자. 단, 조심할 것! 첫 눈에 반한 호텔이라면 그곳에서의 쉼과 사유에 빠져버린 나머지 도시를 잠시 잊을 수 있으니.

파리 11구 르 제네랄 호텔룸 발코니 전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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